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93화 (1,293/1,329)

19화

김지훈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종합 병원 완공이 불과 칠팔 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채 일 년도 남지 않은 개원 시점을 맞추려면 비슷한 시기에 모든 준비가 끝나야 했다.

모든 사안이 전문 병원 설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였다. 특히 실질적으로 병원을 끌어 나가는 인력 부분 등이 무척 중요했다.

정식으로 의사, 간호사, 의료 기사, 행정 등 직원 선발 공고가 게재됐다. 서류 전형과 최종 면접을 통해 개원 석 달 전까지 완료될 것이다.

“원장님 이하 과장님들과 각 직종의 간부급 직원들 초빙은 언제 진행하실 겁니까?”

“이번 달까지 추천을 받은 후 신 이사장님이 주관하는 인사 위원회에서 결정할 겁니다. 다들 훌륭한 분들이겠지만 핵심은 결국 직접 일하는 사람이잖아요. 많이 지원해 줘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동종 병원 최고 수준의 근무 조건과 보수를 책정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재를 원하면 그만한 물질적 대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특성상 명성이나 세간의 평가 등이 중요 요인이 될 수 있지만 여느 직장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인턴부터 펠로우는 비슷한 상황에 놓이겠지만, 그 역시 수련 병원만의 특성이었다. 실제 주 몇 시간 근무가 법으로 정해져도 수련의들은 주당 88시간이 법적 허용치였다. 하루에 열두 시간씩 일해도 채우지 못할 시간이니 가히 살인적인 근무라 할 수 있었다.

‘의사도 직업인 중 한 명인데 현실적인 벽을 넘을 수가 없네. 꾸준히 개선을 요구하면 차차 나아지겠지.’

“어떤 경우에라도 사람이 가장 우선이라는 기준을 버리지 맙시다. 그래야 힘들어도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장비와 시설 계약은 어떻게 됐습니까?”

“복수로 업체를 선정했고, 곧 경쟁 입찰에 들어갈 겁니다. 리베이트 제공이나 사적 인연을 불법적으로 동원한다면 계약이 파기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습니다.”

“계약과 집행을 이원화시켰으니까 그런 불상사는 없겠죠. 신 이사장이 불법적인 일을 묵과할 리도 없고요.”

세세한 문제까지 논의를 이어 나갔다.

김지훈이 지그시 민정호를 보았다.

모든 계획이 완벽해지고 있었다.

민정호라는 한 사람의 능력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지 몰랐다. 천문학적 예산과 한도 끝도 없는 준비를 이끌어 나가는 일이 결코 쉬울 리 없었다.

수많은 직원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가 분명하지만 전체를 장악하고 통솔하는 일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심이 없어 전적으로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요소가 없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고마워서요. 민 부원장님 아니었으면 훨씬 더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해야 하는 분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드릴 수는 없죠. 그리고 진상미 대리를 비롯해 모든 직원들의 땀이 아니었으면 저 역시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박현철 이사님도 정말 고생 많이 하고 계십니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나도 이준영 선생님과 원장님을 비롯해 동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데 우리가 인복이 있는 모양입니다.”

“인복까지만 즐기겠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제 평생 지금처럼 일이 많았던 적이 없습니다. 전문 병원이 끝인 줄 알았는데 종합 병원의 시작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군가의 일복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저도 부원장님과 함께 일조를 했고, 그 이상의 보람을 느끼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일복이 왜 나와요? 솔직히 나야말로 누군가의 재정 타령 때문에 일이 엄청 많아졌다는 사실 몰라요?”

“그래서 제 나이대에 굉장히 걸리기 힘들다는 아뻬 수술까지 받게 됐군요.”

“아뻬 걸린 게 내 탓이라고요? 농담이죠?”

“몸에 칼자국이 생겼는데 농담이겠습니까? 어쨌든 부원장님이 결정하셔야 하는 부분의 행정적인 일은 구십 퍼센트 이상 진행됐으니까 그나마 편해지시겠습니다. 저야 직원들과 함께 죽도록 일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김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앓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민 부원장이 이렇게 빙빙 돌려 말한 적이 있었나? 분명 뭔가 원하는 게 있는데 도대체 뭘까?’

“애먼 소리 하지 말고 우리 솔직해집시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기본 업무에 종합 병원 준비 업무까지 맡고 있는 직원들의 사기 진작이 필요합니다.”

‘사기 진작?’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이 있어도 대가가 있어야 보람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처우가 바뀌긴 하겠지만 지금은 추가 근무의 연속이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수당 지급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휴가야 민 부원장님이 눈치만 안 주면 규정대로 갈 수 있을 테고, 혹시 특별 보너스?”

“역시 말이 통하시는군요.”

김지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행정직은 별도 수당 항목이 많지 않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근데 그런 문제는 예산을 집행하는 민 부원장이 결정해서 원장님께 결재를 받으면 간단하게…….”

‘아! 중이 제 머리 못 깎는구나. 월급 많다고 특별 보너스를 받지 말라는 법도 없고 말이야.’

민정호의 새로운 면을 봤다.

사안을 가리지 않고 맺고 끊는 것이 누구보다 확실한 사람이었다. 반면 자신의 물질적 이득과 관련된 일만큼은 본인의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 모양이었다.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재정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합리적인 액수만 책정해 오세요. 원장님께 결재받아 줄 테니까 일단 내게 제출해요. 단 한 명의 직원도 빼지 마시고요. 아! 박현철 이사님은 우리 병원의 유일한 임원이시니까 제외합니다.”

‘유일한’에 힘주어 말했다.

“감사합니다.”

얼추 마무리됐다.

김지훈이 의자를 돌려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 일은 다 끝났죠? 그럼 이만!”

한발 빨랐다.

퇴근하는 내내 어깨가 팔랑팔랑 흔들렸다.

‘민 부원장도 인간적인 면모가 있네. 후우! 행정적인 일 대부분 마무리 단계고, 인력 선발도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 이제 환자에게만 집중하면 되겠지?’

무척 홀가분했다.

차원이 달라진 병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열정과 체력을 갖고 있는 김지훈이었다. 한 손에 든 짐을 덜었다고 마냥 좋아할 리 없었다. 오히려 분산됐던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당장 여파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손일석과 함께 모처럼 커피 한 잔을 하던 나종진과 오만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뻬와 치질 수술 후 출혈이 발생하는 경우가 극도로 드문데 모두 김지훈이 수술했거나 관련됐다는 말이 나온 참이었다.

“선생님, 일복은 그렇다 치고 요즘 김지훈 선생님 눈빛이 달라진 것 같지 않으세요?”

“나 교수도 많이 예리해졌네. 뭐가 보이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

“그냥 느낌일 뿐인데 뭔가 꽉꽉 조여 오는 기분이랄까요? 어제는 본인 수술도 아닌데 들어오셔서 재필이가 타이하는 걸 보시더라고요. 눈빛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후배들만이 아니라 환자하고 관련된 일은 전체적으로 더 빡빡해지셨습니다. 일 잘하고 있는 고경철 선생까지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들었다니까요.”

오만석까지 십분 동의했다.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우리 병원에서 제일 담력이 좋은 오 교수까지 살벌한 기운을 느꼈으면 확실히 달라진 거겠지. 이유 별거 없어.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김지훈이란 의사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보면 간단해.”

나종진과 오만석이 바짝 귀를 기울였다.

김지훈의 변화는 결코 찻잔 속의 태풍이 아니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영향력이 대단해 신임 교수인 자신들마저 강력한 폭풍에 휘말릴 수 있었다.

“어떤 분인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인턴들도 알고 있을 겁니다. 구체적인 이유가 뭡니까?”

“주말에 함께 술 마셨는데 먹는 내내 행정 일에서 거의 다 벗어났다고 좋아 죽더라. 가뜩이나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의 어깨를 꽉 짓눌렀던 일 하나가 줄었어. 그러면 남은 열정이 어디로 쏠릴까? 다시 강조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일복의 화신, 김지훈이야.”

나종진의 눈가가 떨렸다.

“환자와 우리네요.”

“그렇지! 개인적인 일상은 계속 허술하겠지만 환자 치료에 관해서는 이빨도 안 들어갈 거야. 난 김 부원장과 동기라는 사실이 너무 고마워.”

오만석이 넥타이를 풀었다.

“우리도 좀 낫겠죠?”

“재필이와 경철이가 끝일까? 펠로우들이 지적을 받으면 과연 신임 교수들에게 책임을 안 물을까? 서도진 선생 레벨까지가 마지노선이라고 본다.”

“후우! 하던 대로 하면 될 텐데 우리까지 사정권이라는 말에 왜 이렇게 긴장이 되죠?”

“오 교수, 그냥 덩치로 버텨. 그렇다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간 완전히 뭐 된다.”

“흘려듣는다고요? 죽을 일 있습니까?”

오만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가장 어려운 선배는 성질이 지랄 같거나 무서운 사람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하며 후배를 존중하는 사람이야말로 오히려 더 어렵고, 무서운 선배였다.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만큼 무겁기 때문일 것이다.

손일석이 입맛을 다셨다.

“하! 이거 느낌 좋지 않네. 나 교수, 오 교수, 나는 안 어려워? 나 쉬운 선배 아니다. 김 부원장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사인방 중 한 분이신데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 사인방, 그거 좋은 소리 아니었나?”

“좋다는 것과 어렵다는 것이 꼭 상반된 의미만은 아닙니다. 후배 눈에 선생님들은 특히 그렇고요.”

사실이었다.

개개인의 특징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을 숨긴다!

농담을 입에 달고 사는 손일석이었다. 하지만 수술 중에는 한 자루의 비수라는 사실을 부인할 후배는 아무도 없었다. 사적인 감정을 갖고 태우지 않기에 더 어렵고,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교수가 된 지금도 말이다.

이경석이라고 다를까?

송재덕 교수의 제자답게 사람 좋은 웃음이 트레이드마크였다. 과장이 된 이후에도 화를 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속에 숨긴 망치는 비수 이상으로 아팠다.

신현수라는 또 한 명의 써전이 서울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냉철한 논리의 도마 위에서 잘근잘근 다져지는 일은 살벌함 그 자체였다.

‘진충기 선생님도 계시는구나.’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김지훈의 변화만큼 두려운 일은 없었다. 리틀 이준영이라 불리며 화염방사기를 난사할 때가 차라리 행복했다.

스승의 그림자를 벗어나 김지훈만이 남았던 그 순간부터 상상 이상의 뜨거움을 맛보았다. 부원장이 돼 행정적인 일에 여력을 빼앗겨 잠시 숨을 돌렸지만 이제 낭만적 기대를 접어야 했다.

‘우리를 가장 많이 챙겨 주는 선생님이신데 불평할 일이 아니지. 혼자 잘나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잘되자고 하는 거잖아. 복에 겨운 소리 하지 말자.’

최고의 써전과 최고의 수술 팀!

목표가 같았다.

더구나 가공할 일복에 가려 보기 힘들 뿐 후배 사랑 역시 남달랐다. 이혁원을 비롯해 세 명 모두 교수가 되는 데 김지훈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런 선배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종진과 오만석의 걱정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이혁원이 펠로우 이하 후배들을 만날 때마다 침까지 튀기며 똑같은 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오프는 칼처럼 가도 좋아. 단, 근무 중에는 절대 요령 피우지 마. 자신이 맡은 환자는 완벽하게 파악한다는 자세로 일해야 돼.”

“왜 그러십니까?”

“부원장님 얼굴이 활짝 폈어. 이제 환자만 보고 살아도 된다며 엄청 좋아하시더라. 설명 더 필요해? 인턴이라고 봐줄 분이 아니니까 다 전달해.”

소리 없는 긴장이 퍼졌다.

효과가 있었다.

일이 있어 잠깐 응급실에 들른 김지훈이 간호사들의 살벌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당직 인턴이 환자를 정말 열심히 보고 있었다.

차트 작성도 마음에 들었다.

“인턴 선생, 마음에 든다.”

“예? 감사합니다.”

“역시 환자를 보는 의사 모습이 제일 아름다워. 완전히 자기 일에 몰두한 사람 이상으로 멋있는 사람도 없지. 중환자실부터 병동까지 인턴 선생들 분위기 참 좋네. 수고해.”

“예. 안녕히 가십시오.”

“아! 수련 부장에게 말해 놓을 테니까 다음 주 내로 인턴 선생들 오프 좀 맞춰 봐.”

“왜 그러십니까?”

“가기 전에 인턴 선생들끼리 밥 한 번 먹어야지. 회식비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회식이야 어느 과나 있다. 하지만 각기 소속이 다른 탓에 인턴들만의 회식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더욱이 선배들과 밥 먹는 일 자체가 부담일 수도 있기에 일종의 배려일 수도 있었다.

‘다른 병원도 우리 회식을 챙겨 주나?’

멀뚱멀뚱 김지훈의 등을 바라보던 인턴이 후다닥 당직실로 들어가 전화기를 잡았다.

“선호야, 성오야, 부원장님이 오프 맞춰서 우리끼리 회식하란다. 회식비도 따로 주신대.”

만세!

우스워 보이지만 인턴들은 초짜 의사이자 사회 초년병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가 많다 적다 할 수 없지만, 작은 일 하나에도 기뻐하는 시기임은 분명했다.

그 시간 양재필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