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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92화 (1,292/1,329)

18화

다음 날.

다행히 아뻬 수술 후 출혈이 발생한 환자의 피가 멈췄다. 중환자실에서 하루 정도 더 지켜보고 싶었지만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어쩔 수 없이 일반 병실로 옮긴 탓에 도리어 의사들이 불안해졌다.

치질 환자 역시 통증만 호소할 뿐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그러나 두 환자 모두 의료 분쟁의 당사자가 될 수 있어 무척 신경 쓰였다.

실제 회진 때마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유리한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보호자와 의사 사이에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느라 애를 먹었다.

‘당연히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사고나 다름없을 텐데 중립적으로 보일까? 수술한 선생님들도 잠을 못 자겠지?’

다른 병원, 다른 의사만의 일이 아니었다.

전문 병원에서도 언제든 똑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잘 넘겨 왔지만 수술의 크기와 질환을 생각하면 오히려 확률이 더 높았다.

방심이 화를 부르는 법이었다.

긴장해야 할 일이었다.

김지훈이 컨디션 조절에 애를 썼다.

‘오늘 당직인데 요새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아서 그런지 꺼림칙하네.’

단단히 마음먹고 오후 회진을 돌았다.

치질 환자가 입원한 병실로 들어가는 순간 답답함이 싹 사라졌다. 홍재순이 진지한 표정으로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 오전까지만 해도 격앙됐던 보호자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김 부원장, 환자분 많이 좋아졌네. 통증은 조금 더 가겠지만 모레쯤 퇴원해도 되겠어.”

“혹시 환자 보러 오신 겁니까?”

“수술로 끝이 아니잖아. 퇴원하실 때까지 올 생각이었는데 상태 보니까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네.”

“다행입니다.”

써전의 책임을 다하는 홍재순을 본 덕인지 없던 힘이 슬슬 솟구쳤다. 무엇보다 보호자의 얼굴이 좋아진 이유가 궁금했다.

병실을 나와 슬며시 물었다.

“무슨 말씀을 나누셨어요?”

“과실 여부를 떠나 타협밖에 더 있어? 이런 경우 서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합의하고 끝내는 것이 최선이야. 도의적 책임이란 말이 있잖아. 처음 수술한 선생도 동의했으니까 치료 이외에는 신경 안 써도 돼.”

개인 병원을 운영하는 홍재순의 공력이었다. 사실 잘잘못을 따지며 마지막까지 가는 순간 양측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해결 방안이었다.

‘합리적인 해결은 아니지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드네. 간단하다고 생각되는 수술일수록 환자도 합병증이 발생할 것이란 생각을 못할 테니 더 조심해야겠어.’

위험하지 않은 수술이 없었다.

홍재순이 팔을 툭 쳤다.

“시간 괜찮으면 가볍게 맥주나 한잔하고 싶은데 오늘은 바로 퇴근하나?”

“어이쿠! 당직입니다.”

“뭐? 당직? 먼저 간다. 연락 줘.”

흠칫 놀란 홍재순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고맙다는 인사도 할 틈이 없었다.

항문 질환 환자가 올 리 없건만 응급실이 있는 정문 쪽이 아니라 후문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까지 뺑 도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응급실이 북새통으로 변했다.

인턴 한 명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양재필에 이어 고경철까지 환자를 봐야 했다. 그럼에도 손이 가는 환자가 많아 인력이 부족했다.

“부원장님이 당직이지? 차라리 수술 환자가 있는 날이 낫네. 이 선생, 인턴 선생님 좀 도와줘.”

“열나는 애기만 보고요.”

“어후! 내과, 소아과 환자는 또 왜 이렇게 많아? 펠로우 선생님이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김지훈이 쓰윽 나타났다.

“어머! 수술할 환자도 없는데 퇴근 안 하셨어요? 김 선생, 혹시 누가 연락한 거야?”

“아니요. 아무도 안 했어요.”

헛기침 터졌다.

“애초에 퇴근했으면 몰라도 이런 상황인데 쉽게 발이 떨어지나요.”

자리 지켜 봐야 무언의 욕만 잔뜩 먹을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짐짓 여유를 부리며 한창 치료 중인 처치실로 들어갔다. 손이라도 보태야 제명대로 살 것이다.

“고경철 선생, 수처할 환자가 많네.”

“선생님 오셨습니까? 크게 다친 부분은 없는데 다발성 열상 환자가 많습니다.”

“양재필 선생까지 있으니까 내가 도울 일은 없겠구나.”

허구한 날 하는 수처지만 후배들의 손을 그냥 지나칠 리 없는 김지훈이었다. 팔짱을 낀 채 수처하는 손을 유심히 보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나, 둘, 셋, 넷. 왜 네 명이지?’

외과 전공의 둘에 응급실 인턴까지 세 명이어야 하는데 머리 하나가 남았다. 어이없게도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정선호가 양재필을 돕고 있었다.

‘얘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정선호 선생, 중환자실은 어떻게 하고 여기 있어? 응급실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거 몰라?”

김지훈 앞이라 모두 긴장한 상태지만 그나마 삼 년 차의 여유를 가진 고경철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오프랍니다.”

“그런데 왜?”

“오프를 당직실에서 보내고 있네요. 환자 많은 거 보더니 자다 말고 나와서 돕고 있네요.”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웃음도 안 나왔다.

‘나도 인턴 때 꽤 열심히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뭐지? 집에 갈 시간이 안 되면 술 한잔하고 인턴 숙소에서 자는 게 정석 아닌가?’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격무에 시달리는 인턴이 오프 때 동료들을 도와주는 일 자체가 정말 희귀한 일이었다. 그것도 응급실인 데다 당직실에 왜 있었는지 몰라도 정선호가 희귀한 놈이 분명했다. 어쨌든 손을 보탠 덕분에 일 분이라도 더 빨리 치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대견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나라도 더 배우겠다는 생각인가?’

그때 무언가 반짝였다.

양재필은 물론 인턴 두 명의 가운 주머니에 기구 하나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불현듯 마음이 뜨끈뜨끈해지며 후배 사랑이 확 치솟았다.

‘냉정해야 돼.’

그간 수시로 인턴들의 실력을 파악했다. 이제 시작이기에 직접적인 처치로 평가할 수 없었지만 열정 하나만은 인정해야 했다.

모든 의사에게는 첫 시작이 있다.

무엇 하나 검증되지 않은 시기에 첫걸음을 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연코 선배들 덕분이었다. 김지훈 역시 선배였고, 누구보다 매서운 눈을 갖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빠르지만 너희들에게는 빠르지 않은 것 같다. 오늘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치료했는지 평생 기억하기 바란다.’

마침 환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종아리가 제법 깊게 찢어진 환자였다.

고경철과 양재필이 수처를 끝내자마자 바로 환자 앞에 앉은 김지훈이 인턴 둘에게 손짓을 했다.

“고경철 선생, 환자 많이 밀렸더라. 이 환자는 내가 수처할 테니까 양재필 선생하고 같이 봐. 인턴 선생, 둘 다 어시스트 서.”

삼 년 차 공력이 있다.

더구나 전공의 중 김지훈을 가장 잘 아는 고경철이었다. 눈치 딱 채고 인턴들에게 제대로 하라는 강력한 눈빛을 보냈다.

김지훈이 자세를 잡았다.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고, 천으로 덮었다.

따르륵! 따가각!

어느새 피하 지방층 봉합이 끝났다.

쩍 벌어졌던 피부가 빠르게 닫혔다.

정확하고 깔끔했다.

인턴들의 눈에는 현란하기까지 했다.

불과 세 바늘 남았다.

그때 김지훈이 정선호를 보았다.

조용히 수처 기구를 건넸다.

“시작해.”

“예?”

환자의 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인턴과 전공의가 있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이상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사실 전문의가 꿰매나 인턴이 꿰매나 결과에 차이가 있을 손상도 아니었다.

말없이 열상 부위를 가리켰다.

기구를 받아 든 정선호가 훅 숨을 내쉬었다. 삼겹살을 이용해 꾸준히 연습했지만 사람의 몸은 차원이 달랐다. 주삿바늘 찌르는 일과도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은 조용히 기다렸다.

따르륵! 따가각!

조심스럽게 첫 바늘을 환부에 찔렀다.

진한 긴장이 전해졌다.

‘지금처럼 하면 돼. 침착하게 해.’

두 번째, 세 번째 수처가 끝났다.

이마에 땀이 맺힌 정선호가 김지훈을 보았다. 무사히 해냈지만 평가는 어디까지나 김지훈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일 것이다.

김지훈이 눈길도 주지 않고 드레싱을 했다.

“환자분, 다 끝났습니다.”

그러고는 당직실로 향했다.

응급실 환자를 모두 처리한 고경철이 뒤를 따르려는 정선호에게 눈짓을 하고는 혼자 들어갔다. 제법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대화가 끝났다.

“환자 없지? 난 퇴근한다.”

“수고하셨습니다.”

고경철이 바로 인턴들을 소환했다.

“정선호, 나 똑바로 하라는 말 들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 다음번에도 같은 말 들으면 널 죽일지도 몰라.”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성오, 너는 오늘 못 받아서 서운하겠지만 오프인 사람을 배려하신 것뿐이야. 적절한 케이스 생기면 오늘이라도 바로 주라는 오더 내리셨으니까 연습 열심히 해. 잘하면 쌍으로 죽을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말고.”

인턴 두 명의 얼굴이 벌게졌다.

각기 다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으스스한 눈빛으로 정선호를 한 번 더 째려본 고경철이 뒤돌아서며 씨익 웃었다. 삼 년 차인 이상 김지훈의 말에 조금 더 살을 붙여도 괜찮을 것이다.

‘자식들, 벌써 수처를 받고 복인 줄 알아. 선호야, 성오야, 우리 과 지원하면 정말 예뻐해 줄게.’

도리어 쫓아내는 건 아닐까?

어쨌든 김지훈의 당직 아직 안 끝났다.

수술 두 건 하고, 환자 치료하는 사이 날이 밝았다. 곤죽이 된 지성오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이 벌게진 채로 히죽히죽 웃었다.

‘수처, 실제로 하니까 재밌네. 맞아 죽더라도 한 번 더 해 보고 싶다. 선호 이 자식은 언제 올라갔대?’

어느 과를 할지 몰라도 적성이 외과 쪽인 모양이었다. 다만 절대 입 밖에 낼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듣는 순간 진짜 귀여움을 받고도 남았다.

착각이었다.

이미 수처를 받은 것으로 시작됐다.

지성오의 다음 텀이 하필이면 외과였다.

응급실 못지않게 빡빡한 근무인 데다 응급실에도 수시로 불려 나가 밤을 새기 일쑤였다. 맥주 한 잔을 못 이겨 오프를 모두 날려 먹을 수밖에 없었다.

‘우와! 어떻게 편한 날이 없냐. 어느 병원이든 응급실이 제일 힘들다고 들었는데 확실한 거야? 수처하는 맛에 내가 산다. 난 역시 필드 체질이야.’

내과로 간 정선호도 다르지 않았다.

병동 일이 외과보다 더 많은 데다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피할 처지도 아니었다. 환자가 몰릴 때면 내과의 암묵적인 동의 속에 자연스럽게 손을 보태야 했다.

헉헉헉!

눈가에 기미가 꽃을 피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좋은 선배들을 만나 다행이었다.

기본적인 술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 응했다. 물론 내과나 외과나 주말 집담회에서 새카맣게 탄다는 펠로우까지였다.

교수들은 냉정한 눈으로 평가만 할 뿐이었다.

인간관계도 변했다.

함께 죽도록 고생하는 동료만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정선호와 지성오가 거의 붙어 다녔고, 은연중 확실하게 챙겨 주는 양재필과 고경철 또한 따를 수밖에 없는 선배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파릇파릇한 후배들 때문일까?

김지훈과 손일석도 툭하면 웃었다.

“자식들! 잘 버티네.”

“손 교수, 살살 해. 그러다 도망간다.”

“성오는 그럴 놈이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수처하는 거 봤잖아? 인턴 중에 그만큼 잘하는 놈 없을걸? 게다가 기구만 잡으면 눈이 초롱초롱해져요. 잘 키워서 잡아먹어야 되겠어.”

김지훈이 코웃음을 쳤다.

“선호가 그렇지. 이론과 실전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놈이야. 솔직히 수처도 성오보다 낫고.”

“어허! 어디서 망발을 남발해? 하여튼 우리 병원 첫 인턴이라 그런지 유난히 마음이 가. 잘 키워 보자고.”

“경철이는 확정이지만 재필이까지 아예 영구 파견으로 근무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둘 다 우리 과 지원했으면 좋겠다.”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같은 시국에 전공의 네 명이면 빵빵하지. 알게 모르게 작업 들어가자.”

“무슨 작업?”

“배운 대로 해야지. 스승님들 특기가 밀당이잖아. 풀어 줄 때는 확실하게 풀어 주고, 잡아야 할 때는 확실히 잡아서 우리 과 특유의 매력을 알려 주면 돼.”

“그게 통할까?”

“정답인지는 몰라도 틀린 답은 아니야. 그걸 못 버티면 어차피 뽑을 이유도 없고 말이야.”

김지훈이 슬며시 손일석을 보았다.

‘내가 밀릴 수는 없지. 정선호, 똑바로 하자.’

바람을 떠나 확정되지 않은 미래까지 나갔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제대로 마시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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