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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91화 (1,291/1,329)

17화

입장에 따라 나쁜 기억일 수도 있었던 일을 즐거웠던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생판 처음 보는 민정호에게도 특별히 숨기지 않았다.

“하하하! 말은 못해도 부원장에게 신세 많이 졌는데 또 신세를 지게 되네요.”

“부원장님이 후배시잖아요?”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직도 김 부원장 일복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힘들어하겠지만 난 도리어 그 덕을 많이 봤어요. 우리 유석재 선생은 힘들어서 난리를 쳤지만 말이에요.”

“선생님에게만 한 말을 여기서 꺼내시면 어떡합니까? 솔직히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수술 상당히 하고 살았습니다.”

“김 부원장이 환자 잡아 오면 우리가 하는 꼴이었지요. 전공의 시절인데도 원 없이 칼바람 날리고 살았네요.”

다들 웃었다.

분명 서운한 점이나 미흡한 점이 적지 않았을 텐데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과 기억으로 남아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정말 잘 간다.

어느새 아홉 시가 넘었다.

“홍재순 선생님, 늦었습니다. 내일도 수술이 많으실 텐데 이제 일어나시죠. 병원 구경도 할 겸 일간 찾아뵙겠습니다.”

“불안하니까 빨리 결정해서 알려 줘.”

“소문난 써전이 왜 이러세요? 우리에게도 큰 득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병원을 나섰다.

응급실 앞을 통과하기 직전이었다.

홍재순이 피식 웃었다.

“매일매일 일복 넘친다더니 오늘은 조용하네. 당직이 아닌가 봐. 우리 때문에 또 늦어서 미안해.”

“아닙니다. 즐거웠습니다.”

그때 이혁원이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환자가 있는 모양이었다.

응급실이 조용하고, 로비에 사람도 거의 없어 중한 환자일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다.

“누구한테 배웠는지 바로 보이네. 바이탈 흔들리는 환자가 아니면 여유 있게 와도 되지 않아?”

홍재순의 말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김지훈이 느긋하게 물었다. 교수가 돼서도 환자를 기다리게 하지 않는 모습이 흡족할 뿐이었다.

물론 느긋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난 당직 아니지요. 그래도 궁금하네.’

“이혁원 선생, 무슨 일이야?”

“개인 병원에서 치질 수술을 했는데 피가 멈추질 않는답니다. 어? 홍재순 선생님, 유석재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급해서 죄송합니다.”

꾸벅 인사만 하고 응급실로 들어갔다.

다들 표정이 묘해졌다.

하필이면 치질 수술 후 출혈이라니!

급하다면 급한 환자였다.

김지훈의 눈이 자연스럽게 홍재순과 유석재를 보고 있었다. 이미 한 손은 손잡이를 잡았고, 한 발은 응급실 안으로 들이민 상태였다.

홍재순과 유석재가 무엇에 홀린 듯 뒤를 따랐다. 아홉 시가 훌쩍 넘어 빨리 가야 하건만 말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재야의 고수 두 명이 환자 앞에 섰다.

줄줄줄!

지켜볼 수준이 아니었다.

출혈로 인한 항문 부종까지 발생해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무척 민감한 부위기에 무통 주사를 달고 있다고 해도 참을 수 있는 통증이 아니었다.

홍재순이 바로 판단을 내렸다.

“해바라기 형태로 발생한 치질을 수술한 것 같네. 출혈도 문제지만 부종이 더 심해지면 고생 엄청 하니까 가급적 빨리 수술실에서 지혈해야 되겠어.”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요새 무슨 일 있나? 아뻬도 모자라 치질 수술 후 출혈은 또 뭐야? 일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일이 왜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 거야? 치질 수술은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나네. 내가 해도 한 시간 가까이 걸리겠어.’

만능 써전은 없다.

더더욱 이혁원은 항문 쪽 수술 경험이 거의 없었다. 하려면 하겠지만 재야의 고수이자 가히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 써전 두 명이 있었다.

김지훈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부기가 있어서 확실하게 말하기 힘들지만 출혈하는 양상이 정맥 하나 찢어진 것 같아. 유석재 선생, 이삼십 분이면 되겠지?”

“충분할 것 같네요.”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출혈 양상만 보고 원인을 유추했다. 게다가 불과 이삼십 분이면 해결할 수 있다니 자신이 예상한 시간의 딱 절반 정도였다.

답 나왔다.

환자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마다한다면 김지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홍재순과 유석재는 이미 응급실에 한 발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몸을 푹 담근 상황이었다.

김지훈이 숨도 쉬지 않았다.

‘우리 병원에 홍재순 선생님이나 유석재 선생님보다 항문 쪽 수술을 잘하는 선생은 없다. 환자를 위해 항문 수술의 고수에게 부탁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려면 나도 들어가야겠지?’

이혁원에게는 눈짓, 손짓으로 양해를 구했다.

“선생님, 저하고 같이하시죠.”

“응? 같이? 김 부원장이 해도 전혀…….”

지혈 시간이 그렇다는 거지, 준비와 마취에 수술 후 지혈 상황까지 최종 확인하려면 족히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짓던 홍재순이 흠칫 놀랐다.

김지훈이 씨익! 으스스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순간만은 후배가 아니라 전문 병원의 부원장이라는 눈빛을 강하게 표출했다.

“선생님의 손을 보여 줄 좋은 기회잖아요. 믿어 의심치 않지만 부원장 판단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외래 교수 건 자체가 물 건너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적극 추진할 수도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거의 반협박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말이 오고 갔다 해도 김지훈이 칼자루를 잡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환자에 관한 한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는 써전이라는 점을 무시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출혈 환자 빤히 봤는데 거절했다간 없던 일로 하고도 남을 사람이지. 후우! 일복!’

“그… 그러지, 뭐.”

“이 교수, 이 환자분 우리가 수술할게. 당직인 거 아는데 양해해 줘.”

“알겠습니다.”

상황을 이해한 이혁원이 까마득한 선배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김지훈 못지않은 즐거운 미소를 감추려 애를 쓰며 말이다.

‘갑갑했는데 잘됐네.’

홍재순과 유석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얼굴도 볼 겸 상의하러 왔다 졸지에 수술하게 됐다. 더구나 당직도 아닌 김지훈이 함께 수술한다니 거절 자체가 힘들었다.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일복이라는 말을 절대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김지훈이 모른 척하고 보호자를 만났다.

내심 미안했지만 전문 병원에서 일하려면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응급이 거의 없는 항문 파트의 외래 교수라 해도 말이다.

항문 분야 최고의 전문의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집도의가 전문 병원 소속이 아니라는 사실에 머뭇거렸다. 한참 상의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부원장님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말씀 믿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해결될 겁니다.”

첫 수술을 한 개인 병원 의사도 함께였다.

정맥 확장이라는 치질의 원인과 수술의 특성상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이었다. 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사고나 다름없었다.

“학회 때 발표를 들은 적이 있어 홍재순 선생님과 유석재 선생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수술 이후에 또 문제라도 생기면…….”

“집도만 안 할 뿐 제가 어시스트를 설 겁니다. 보호자도 동의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모든 이에게 결코 만만찮은 부담이었다.

바이탈만 흔들리지 않을 뿐이었다.

수술실이다.

홍재순과 유석재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애초 세 명이 달라붙어 수술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수술 후 보호자를 만나고, 치료를 담당해야 하는 김지훈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눈길이 간 곳은 나란히 선 후배들이었다.

이혁원은 물론 펠로우에 전공의 삼 년 차라는 고경철까지 당직 팀 전원이 참관을 하고자 했다. 항문 수술에 무려 여섯 명의 써전이 들어오다니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마취과와 간호사까지 포함하면 아홉 명이었다.

홍재순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김 부원장이 들어오라고 했어?”

“아니요.”

“근데 왜?”

“배우고 싶은 모양이죠. 우리 병원 성격상 보지도 못하는 수술이잖아요. 저도 출혈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부담스럽다.”

“고수가 왜 이러세요.”

마취가 시작됐다.

전문 병원에서는 시행할 일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 척추 마취였다. 종합 병원 진료가 시작되면 숱하게 시행해야 할 방법이기에 마취과 입장에서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옆으로 돌아누우세요. 치질 수술할 때 경험하셨죠? 미리 피부 마취를 했지만 따끔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기다란 바늘이 환자의 등을 지나 척추 사이를 뚫기 시작했다. 다소 불안정하던 심박동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띠띠띠띠띠!

김지훈이 급히 환자의 손을 잡았다.

“긴장하지 마세요.”

긴장할 이유가 많았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재수술만으로도 긴장될 텐데 의사들마저 바글바글했다. 자칫 정말 큰 문제가 생겼다는 오해를 하며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만 들어올 걸 그랬나?’

“다른 수술이 있어 잠시 들어온 선생님들입니다. 환자분 때문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환자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취 끝났습니다. 자세 잡으셔도 됩니다.”

김지훈이 유석재와 함께 치질 수술할 때와 똑같이 환자의 자세를 잡으며 이혁원에게 은근슬쩍 눈짓을 했다.

‘환자 눈에 안 보이게 피해.’

참관 의사 모두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수술 준비가 끝났다.

공간상 항문을 보며 기구 조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도 옆으로 빠지며 참관만 하고자 했다.

홍재순은 별말 하지 않았다.

상당 기간 함께 수술해 온 유석재와 손을 맞추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다. 김지훈도 그 편이 더 환자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시작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바짝 긴장했다.

미덥지 못한 탓이 아니었다.

항문 분야에 관한 한 실력이 훨씬 더 좋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었다.

집도의가 홍재순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언급했다고 해도 전문 병원과 부원장인 자신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책임 소재가 분명하다는 말이었다.

‘다른 병원에서 수술한 환자들이 모두 무사히 퇴원해 다행이지만 문제가 생기는 순간 입장이 무척 곤란해질 수도 있겠네. 환자와 보호자가 동의한다고 해도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해야겠어.’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했다.

손가락 한두 개 간신히 들어가는 공간에서 줄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종까지 발생해 자칫 손상을 주고도 남을 상태였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막힘없이 수술이 진행됐다.

“수처! 타이! 컷!”

“한 곳이 더 있네요. 고무 밴드로 잡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오케이!”

피가 멈췄다.

치질 수술을 하고 나면 지저분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또 손을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이드를 이용해 닦아 낸 수술 부위가 의외로 깔끔했다.

김지훈이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 지혈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수처 몇 바늘과 밴드 하나로 해결됐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과 이를 뒷받침하는 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엄청난 경험을 쌓았다는 의미기도 했다.

“김 부원장, 끝내도 되겠어. 혹시 몰라 오더는 내가 낼게. 보통 치질 수술 후 하루 뒤에 퇴원하면 되는데 재차 손을 댔으니까 삼사 일 정도 걸릴 거야.”

‘그렇게 빨리?’

“수고하셨습니다.”

홍재순과 유석재가 김지훈이 터트린 일복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함께 보호자를 만나 설명하고, 한 시간 후에 다시 확인한 후 돌아갔다.

김지훈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조건 외래 교수로 모셔야 돼. 어후! 정식 교수로 초빙할 수는 없을까? 제길! 이럴 때는 명문화된 인사 시스템이 도리어 발목을 잡네.’

연배를 고려하고, 항문 파트에 국한한다면 적어도 부교수 정도는 돼야 하기에 욕심일 뿐이었다. 날고뛰는 써전들이지만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쉽기 짝이 없었다.

‘짧은 수술이었지만 정말 많이 배웠어. 옛날에 봤던 항문 수술이 아니야. 다른 수술에서도 동일한 판단과 방식을 적용시킬 수 있을까?’

비단 항문 파트만의 일이 아니었다. 일반외과의 모든 분야의 진료가 시작되면 잊었거나 새로 배워야 할 지식이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만큼 평생의 목표도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종합 병원이 빨리 완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에 없이 커졌다. 이후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채워야 할 것이다.

보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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