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간단하게 통화를 끝냈다.
목소리만 들어도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법이었다. 서로에 대한 기억이 다를지라도 품은 감정만큼은 비슷할 것이다.
‘약속 시간을 제대로 맞추려면 오늘은 최대한 일찍 끝내야겠네. 일만 생기지 마라.’
간만에 멀리서 찾아오는 선배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촉각을 곤두세운다고 막지 못할 테지만 시늉 정도는 해야 했다.
은근히 걱정이 됐다.
다행히 오후 회진까지 잘 마쳤고, 당직 팀도 정상적으로 근무에 들어갔다. 첫 수술 후 출혈로 재수술한 고령의 중환자실 환자는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선호 선생, 내 방에 있을 거니까 문제 생기면 곧바로 연락해도 돼. 참! 밥 한 끼 산다고 했지? 시간을 잡기가 쉽지 않네. 일단 다음 주로 미루자.”
“전 괜찮습니다.”
“약속은 지켜야지.”
김지훈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중환자실을 나갔다. 매일매일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느긋하게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정선호가 잠시 눈길을 주었다.
말단 중의 말단이자 감기 환자도 제대로 보기 힘든 인턴에게 지나가는 인사처럼 한 약속이었다.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는 말처럼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그만이었다.
‘정말 사 주실까?’
왠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 같았다.
부원장이나 되는 의사가 인턴인 자신을 존중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해 보니 전문 병원의 분위기 역시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정선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보호자를 만나 상태를 설명하느라 시간을 꽤 잡아먹은 김지훈이 서둘러 부원장실로 향했다.
마지막 일과만 남았다.
민정호와의 자리였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뻬로 말미암아 주어진 일주일의 병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복귀했다. 밀린 업무 처리만이 아니라 눈앞의 일을 두고 보는 성격이 아닌지 밤늦게 퇴근하기 일쑤였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민 부원장도 쉬엄쉬엄 일하는 법이 없구나. 아뻬라서 다행이지, 다른 수술이었으면 또 누웠겠어.’
다행히 이젠 특유의 여유를 되찾았다.
밀린 숙제 다 한 모양이었다.
그간 의도적으로 회의 시간을 줄여 길게 얘기할 틈이 없었다. 걱정해 주기 애매모호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제법 신경이 쓰이긴 했다.
“몸은 어때요?”
“수술한 지가 언제인데 계속 물으실 겁니까? 직장 다니는 사람이면 모두 저하고 똑같이 복귀해 일합니다. 그만 물어 주십시오.”
‘걱정을 해 줘도 쌀쌀맞기는…….’
“있을 때 서로 잘합시다. 오늘은 상의할 일이 얼마 안 되고, 곧 손님도 오시니까 빨리 끝냅시다.”
상의를 하던 민정호가 김지훈을 보았다.
전보다 확실히 말이 많아졌다.
이참에 주도권을 휘어잡으려는 행동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느낌이 강했다. 자신을 무리하지 않게 하려는 일종의 배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도권 등등의 의도가 있다면 애초 전문 병원은 선택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런 기분 나쁘지 않네.’
결정 또한 신속하게 내렸다.
같은 사안이라면 몇 배 이상 합의 속도가 빨라졌다. 민정호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업무를 파악했고, 김지훈 역시 행정 부분에 상당 부분 적응된 덕분만은 아니었다.
“얼마 안 있으면 지긋지긋해하시는 일이 거의 다 해결될 것 같습니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말을 그렇게 해! 흐음! 인력 충원이 남아 있지만 홀가분해지는 것은 사실이니까 없는 말도 아니네요.”
“인력 충원이야 해마다 있는 일 아닙니까? 곧 환자와 치료에만 몰두하실 수 있을 텐데 원하시는 목표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전보다 더 빨리 끝났네요. 그럼 이…….”
“잠깐!”
“하실 말씀이 더 있습니까?”
‘이 타임에 그럼 이만을 불러? 에이! 나이가 몇인데 농담할 때가 아니지.’
“함께 봐야 할 선생님들이 손님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갈 생각 하지 말고 일단 앉아요.”
김지훈이 웃으며 시계를 보았다.
똑똑똑!
딱 맞춰 도착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앉으십시오. 홍재순 선생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혹시 차 종류 없어? 예전에는 괜찮았는데 언제부터인지 이 시간에 먹으면 잠을 못 자.”
나이 들었다는 증거 중 하나였다.
유석재도 그럴까?
“알겠습니다. 선생님은요?”
“같은 걸로. 그런데 이분은?”
“우리 병원 행정부원장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민정호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지훈이 차를 준비하는 동안 인사가 오고 갔다. 예의상 한 말이 아닌지 민정호를 보는 홍재순과 유석재의 눈빛이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차를 내온 김지훈이 간단하게 근황을 물으며 그간의 소회를 풀었다. 평일인 데다 둘 모두 갈 길이 멀어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일전에 전화 주셔서 말씀하셨던 문제 때문에 오신 거죠?”
“맞아.”
“이준영 선생님은 만나 보셨어요?”
“오자마자 인사드렸는데 일절 언급을 안 하시네. 김 부원장이 결정권자라고 직접 얼굴 보며 상의하라는 말씀밖에 못 들었어. 이 과장하고 손 교수, 진충기 선생님인가? 그분도 마찬가지고.”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선배님들한테까지 내가 부원장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실 필요는 없는데 그냥 말씀하시지.’
전문 병원의 미래와 관련이 깊은 일이라 홍재순에게 첫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상의했다. 다른 병원 상황을 파악한 후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때문에 가볍지 않은 사안이라 해도 먼저 말을 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스승은 제자 이전에 부원장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존중했고,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민정호도 눈치챘다.
‘아! 이 선생님들이셨구나.’
유석재가 다소 초조한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결정을 내렸어?”
김지훈이 잠시 뜸을 들였다.
‘정말 능력이 있는 선배님들이지만 개인적 인연이나 감정을 앞세우면 안 된다.’
홍재순과 유석재가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외래 교수 임명이었다.
많은 대학 병원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제도였다. 대개 의국 출신이나 긴밀한 연계를 맺어야 할 근처 병원의 의사들을 대상으로 했다.
단, 교수라는 호칭이 붙지만 진료나 수술 등 실질적 업무를 시행하는 교수가 아니라 대부분 이름뿐인 직위에 불과했다. 친분 강화나 명예 등 양측의 이해가 맞물리는 데다 환자에게 끼치는 실질적 영향이 없어 잡음이 없을 뿐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도 하등 문제가 될 소지가 없었다. 그러나 김지훈은 현 제도의 운영에 다소 비판적이었다. 본래의 목적과 순기능을 충분히 살려야 하건만 형식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홍재순과 유석재의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개인 병원을 운영하거나 근무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지만 누구에게나 갈망이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대학 병원을 떠난 대부분의 써전은 수술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마이너 수술에만 국한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수술을 하고자 했다.
반면 무슨 일이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이미 교수 임용이 가능한 나이가 지난 상황에서 수술할 여건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꼴이었다. 외래 교수라는 직함이 현실에서는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에 자신들의 바람이 무리라는 사실을 결코 부인할 수 없었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교수들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서로의 목적과 생각이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제도 시행 후 발생할 문제는 별개의 일이었다. 현실적인 부분을 감안해야 할뿐더러 써전의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눈빛을 굳혔다.
‘원하는 바를 모두 충족시키기 어렵겠지만 제도를 시행해야 하는 우리가 먼저 요구 사항을 제시하는 것이 맞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래 교수 제도의 본뜻대로 시행하고자 합니다. 잠정적으로 시행 결정이 나더라도 선생님들의 실력과 여건이 우리 병원과 맞아야 최종 승인 날 겁니다.”
“당연한 일이야.”
“승인이 난다면 최소 주 일 회 진료와 수술을 하셔야 하며, 해당 요일을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수술 후 회진은 우리가 맡지만 환자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반드시 직접 회진을 도셔야 합니다.”
홍재순이 눈가를 굳혔다.
‘일주일에 두 번 근무라!’
자신의 병원을 가진 개원의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자칫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다 빈손이 될 위험까지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근무를 시작하신 후에도 의국 회의에서 추가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항문 파트의 기본이 되는 수술만 하셔야 합니다.”
홍재순이 콧등을 찡그렸다.
항문 쪽 질환 중에서도 치질, 치루, 항문 주위 농양 등 간단한 수술만 했다. 김지훈의 말대로라면 현재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일본에 연수도 수차례 다녀왔고, 관련 학회 활동도 등한시하지 않았어. 대장 쪽과 연계된 수술을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실력을 떠나 마이너와 메이저에 따른 책임과 차이를 생각해 주십시오. 회진을 반드시 돌아야 한다는 이유도 그런 맥락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도 배워야죠.”
“내게?”
“재야의 고수라는 말이 괜히 있습니까? 솔직히 대학 병원이 모든 부분을 선도하는 것 같지만 질환에 따라서 오히려 전통적 방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항문 파트는 개인 병원이 훨씬 더 빨리 수술 방식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배울 것이 많겠죠.”
홍재순이 웃었다.
“일단 내 밑천부터 내놓으라는 말이구나.”
“내년부터는 수련 병원입니다. 더구나 장비와 인력 모두 제공하고, 보수까지 드려야 하는데 그 정도는 해 주셔야죠. 단, 원하신다면 항문 파트는 거의 전적으로 맡길 의향이 있습니다. 이후 방향에 대해 신경 쓸 일 없으시도록 대장 파트 교수 임용 때 미리 조율하겠습니다.”
‘전공의들을 가르쳐라? 이건 거의 항문 파트 교수로 근무하는 것과 다르지 않네. 솔직히 교육은 생각도 못했어.’
유석재도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진료와 수술의 순차적 보장은 몰라도 전공의 교육은 생각도 못했다. 현재 근무 형태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하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게다가 뒤늦은 출발이자 애초 요구 자체가 무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홍재순 선생님, 개인 병원을 운영하면서 가능하시겠습니까? 주 이 회라면 지장이 많으실 테지만 양보하거나 협의할 사안이 아닙니다.”
“다행히 함께 일하는 과장님들이 몇 분 계셔. 내가 빠진다고 해서 수술이나 운영에 지장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마.”
항문 전문 병원을 크게 하는 홍재순은 경제적인 여건은 물론 시간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한때 이혁민 교수의 총애를 받으며 위장관 수술에 주력했던 유석재는 어떨까?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젠 항문 수술 전문 써전이기 때문이었다.
인생 외길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살며, 때론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언제든 진로가 바뀔 수 있고, 그것이 흠이 될 세상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유석재에게 눈길을 주었다.
“두 분이 미리 상의하셨을 테니까 선생님도 동의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나는 이의 없어. 고마울 뿐이야.”
“그럼 저희에게 원하는 것이 따로 있으십니까? 가능한 선에서 수용하겠습니다.”
“지금 한 말만 확실히…….”
홍재순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았다.
‘중간에 다른 소리 할 김지훈이 아니지. 그나저나 말이며 자세며 정말 부원장답네.’
고개만 끄덕였다.
“좋습니다. 보수는 최종 승인이 난 후 민 부원장과 따로 상의하시면 됩니다. 외래 교수로 근무하시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겸사겸사 그 전에 얼굴 확실하게 익혀 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돈이 걸린 일이었다.
규모가 큰 개인 병원에는 원무과와 총무과 등 행정 직원이 다수 있지만 여러모로 차원이 다른 사람 한 명을 만나게 될 것이다.
“확실하게라니, 무슨 소리야?”
“하하하!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이로써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
인사를 담당한 교수들의 결정만 남았다.
간만에 봤는데 용건만 말하고 끝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간략하게나마 홍재순과 유석재가 어떤 준비를 했는지도 알 필요가 있었다.
김지훈이 화제를 돌렸다.
“유석재 선생님도 일본 연수 다녀오셨어요?”
“나도 몇 번 갔다 왔어. 일본 애들이 항문 쪽에서는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빨라.”
부담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김지훈의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각자 많은 노력을 해 왔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함께 고생하며 자신을 가르쳤던 선배들이었다. 하기에 추억도 참 많았다.
‘오색 선생님! 이론의 달인, 레이서, 수술 중 발등을 밟아야 했던 일까지 정말 다채롭네. 석재 형이 아니었으면 악어와 주먹다짐을 했을지도 몰라. 두 분 다 병원에 남았으면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을까?’
홍재순과 유석재도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