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느새 이 주가 지났다.
인턴들이 삼 주간의 첫 근무를 마친 후 새로운 과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무렵이었다. 간만에 신현수가 빠진 사인방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지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손 교수, 인턴 선생들에게 내준 과제를 매일매일 확인하니까 옛 생각도 나고, 기본을 다시 쌓는 것 같지 않아? 이젠 내 눈에도 고민한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딱 보이네.”
비슷한 과제를 내줘도 확실히 수준 차이가 있었다. 같은 자료를 토대로 작성했을 테니 머릿속에 든 지식이 아니라 성의 문제였다.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아니래. 타이 제출한 것만 봐도 누가 했는지 딱 보인다니까? 전공할 과를 떠나서 기본 중의 기본이라 지금 잘 배워 놔야 하는데 걱정이야. 하긴 그걸 알 때가 아니지.”
“선호는 어때?”
“알면서 뭘 물어? 과제 좀 작작 내. 최소 잘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사돈 남 말 하고 있네. 타이하고 수처 연습이 훨씬 더 걸려. 인턴은 그렇고 경석이 형, 재필이는 더 가르쳐도 될 것 같은데 어때요?”
“서울 병원으로 복귀하기 전에 칼 줘도 될 것 같아. 따르륵 소리 내며 타이 연습까지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젠 써전이잖아? 그 전에 바짝 조이자.”
손일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역시 웃는 사람이 더 무서워. 과장님, 재필이를 아주 죽일 셈이십니까?”
“제대로 가르쳐서 보내야 할 거 아니야? 서울 병원 선생님들도 그걸 바라실 거야. 반듯하게 만들지 못하면 원장님께 한 소리 듣는다.”
“설마 야야야 터지겠어요?”
“그걸 누가 알아? 손 교수, 요새 감이 떨어져? 멀리서 찾지 말고 가까운 데를 봐. 이준영 선생님이 재필이를 볼 것 같아? 우리를 볼 것 같아? 무시무시한 소리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어이구! 농담도 못하겠네.”
사인방 후배 교육에 강한 의욕을 불태웠다.
당연히 인턴과 전공의 모두 죽을 맛이겠지만 초반이라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최선을 다해 응급실을 돌고, 과제에 가장 충실했던 정선호마저 수처를 받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람 몸을 직접 치료하는 일은 별개 문제였다. 양재필조차 수술 후 마무리할 때나 기구를 잡아 보는 상황이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정선호의 다음 근무는 중환자실이었다. 전공의도 없이 혼자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가히 살인적인 일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평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순서만 다를 뿐 전문 병원에 파견 나온 인턴 모두 똑같은 일정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펠로우 선생님들은 물론 이준영 선생님과 김지훈 선생님까지 중환자실 환자에게 정말 신경을 많이 쓰신다. 외래 진료와 수술만으로도 피곤하실 텐데 저런 체력이 어디서 나올까? 책임감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열정인가?’
이틀에 한 번씩 오프를 가는 자신도 근무가 끝날 때면 천근만근인데 어떻게 버티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십사 시간을 꼬박 일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나이 차이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정선호가 중환자 치료와 대처에 관한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눈가가 빡빡할 정도로 피곤했지만 응급실보다 더한 긴장이 하루 종일 감도는 중환자실이었다.
‘오늘은 별일 없을까?’
그때 급박한 소리가 들렸다.
띠띠띠띠띠띠!
당직실에서 달려 나간 정선호가 콧등을 찡그렸다. 간호사들이 이미 환자를 에워싼 채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더 빨리 반응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선호가 상태를 파악하자마자 바로 보고를 했다. 연락을 받은 펠로우가 득달같이 달려왔고, 김지훈 역시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다행히 일시적인 변동이었다.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료를 위해 외래로 향했다. 잠시 숨을 돌릴 법도 했지만 의자에 앉을 틈조차 없어 보였다.
인턴은 감히 눈도 마주치기 어려운 이준영 교수도 다르지 않았다. 수술 등의 불가피한 일이 있지 않는 한 반드시 환자 상태를 확인했다.
정선호가 얼굴을 비볐다.
선배들은 분명 일할 때는 오직 일에만 전념하고, 쉴 때는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야 버틸 수 있다고 했건만 불과 몇 주 만에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다소 다르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을 보면 쉬는 시간이 없어 보인다. 전문 병원만의 일일까? 저렇게 일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의사이기 때문인가?’
학생 때 생각했던 의사의 모습은 피상적일 뿐이었다. 수많은 선배들이 이토록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했다.
전문 병원에 답이 있을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해야 할 의문이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넥타이를 풀었다.
어떤 환자든 바이탈이 흔들리면 초긴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번 환자는 간 이식을 받은 환자라 십년감수한 느낌이었다.
‘후우! 다른 때보다 외래 진료가 일찍 끝난다 싶더니 이런 일이 생기네. 그냥 다섯 시까지 쭉 환자 볼 테니까 이러지 맙시다. 수명 줄어듭니다.’
뜬금없이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 김지훈이 진료를 이어 나갔다. 시간이 밀려 입에 단내가 나도록 환자를 보고서야 일과를 끝낼 수 있었다.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네 시밖에 안 됐네. 환자들이 시간 없다고 빨리 봐달라고 한 덕에 이게 웬 횡재야.’
뜻하지 않았던 한 시간의 여유!
회진을 일찍 돌면 퇴근 시간까지 앞당길 수 있었다. 오늘 하루 푹 쉬라는 하늘의 계시인 듯 민정호와의 약속도 없는 날이었다.
느긋하게 진료실을 나선 김지훈이 몇 걸음 걷다 말고 화들짝 놀랐다. 아예 습관이 됐는지 자신도 모르게 응급실로 향하고 있었다.
‘욕먹고 죽을 일 있나? 왜 이래?’
끼이이익!
급브레이크 잡고 방향 돌렸다.
막상 갈 곳이 없었다.
부원장실에 발 디디면 느닷없이 민정호가 나타날 것 같았고, 느긋한 시간을 함께 즐겨야 할 교수들 모두 수술과 진료로 코빼기조차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귀중한 휴식을 취하고 있을지 모를 펠로우 방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 외래밖에 갈 데가 없네.”
다시 발을 돌리려는 순간!
왜애애애앵!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거칠게 문 열리는 소리, 간이침대 바퀴가 급박하게 구르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정말 급한 환자라는 느낌이 확 다가왔다.
김지훈이 응급실로 끌려 들어갔다.
마치 자석처럼!
부리나케 달려 나온 인턴이 환자를 보고 있었다. 환자 파악도 다 하지 못한 상황인데 김지훈이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자 무척 놀란 눈치였다.
“무슨 환자야?”
“개인 병원에서 아뻬 수술을 받은 환자인데 피가 멈추지 않아 전원된 환자입니다. 전화받자마자 한수영 선생님에게 미리 연락드렸습니다.”
“피가 안 멈춰? 바이탈은?”
“다행히 안정적입니다.”
당장은 혈압이 유지되고, 심박동도 빠르지 않았지만 한수영이 올 때까지 지켜볼 환자가 아니었다. 일단 흔들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바로 환자를 살폈다.
우하복부에 난 절개창이 피하 출혈로 검붉게 멍들어 있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드레인을 따라 떨어지는 빨간 피였다. 다행히 피를 구했는지 이미 수액과 함께 수혈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똑! 똑! 똑!
심상치 않았다.
“수술 언제 했대?”
“어제 했습니다.”
“혈액 검사는?”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다른 검사 오더는 아직 못 냈습니다. 혈액 채취 후 바로 내겠습니다.”
약간은 미숙한 손길로 혈액을 채취했다.
세월을 따라 인턴의 일도 변했다.
예전에는 간호사가 맡았던 업무 중 많은 부분이 의사의 업무로 바뀌었다. 대표적으로 혈액 검사나 수액 라인을 잡는 일 등등은 아예 기본이었다.
특히 환자 몸에 가하는 직접적인 처치는 예외를 두지 않았다. 물론 무작정 모든 병원에 적용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한 데다 노련한 간호사가 훨씬 더 잘하겠지만 진즉에 시행됐어야 할 부분이기도 했다.
‘혈관도 잘 안 보이는데 잘하네.’
김지훈이 드레인을 다시 확인했다.
똑! 똑! 똑!
80세 고령의 환자였다.
나이도 문제였지만 혈액량이 적을 수밖에 없는 마른 체구를 고려할 때 속도가 너무 빨랐다.
‘어제 수술했다면 타이가 잘못됐을 리는 없고, 동맥을 묶은 부위가 녹았나? 동맥이라면 출혈 속도가 더 빨라야 하는데 뭐지? 혹시 복강 내로 더 많이 새고 있나?’
원인과 출혈 속도, 바이탈에 따라 수술 시기와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반면 경우에 따라서는 수술이 답이 아닐 수도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했다.
아뻬가 아무리 간단하다고 해도 배를 열고 혈관을 잡아야 하는 수술이다. 노련한 써전에게조차 어려울 때는 한없이 어렵기에 얼마든지 실수가 나올 수 있고, 불가피한 일도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실수가 차라리 낫다는 점이었다.
재수술을 통해 바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과실 여부 등등 섣불리 개입하기 어려운 분쟁이 발생하겠지만 핵심은 환자의 안정이기 때문이었다.
문득 예전 경험이 떠올랐다.
혈액 검사상 나타나지 않는 간경화나 응고 질환, 혹은 어떤 검사에서도 이상 소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피가 멈추지 않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실제 수술 후 원인 모를 출혈로 수백 파인트의 혈액을 투여해야 했던 환자가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섬뜩하기만 했다.
‘원인이 뭘까? 고령이기 때문에 빠르게 결정해야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신중해야 한다.’
김지훈이 보호자를 만났다.
“혈전 용해제같이 특별하게 복용하는 약이나 앓고 있는 지병이 있습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평소 매일 한 시간씩 걷기 운동을 할 정도로 건강하셨던 분입니다.”
“수술 전에 특별히 들은 말은 없었고요?”
“맹장염이 확실하고, 피 검사 괜찮다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겁니까? 우리 어머니 괜찮으신 겁니까?”
“일단 경과를 봐야 하지만 현재 상태로 출혈이 지속된다면 재수술을 해야 합니다.”
보호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노모에 대한 걱정과 동시에 수술한 의사를 원망하며 욕하고 있을 것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이미 보상이나 소송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수술이 잘못된 겁니까?”
“그 부분은 배를 열어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검사 결과부터 확인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행히 혈압이 괜찮아 CT까지 시행하겠습니다.”
환자가 곧바로 CT실로 옮겨졌다.
“인턴 선생, 환자 의식 상태 잘 봐.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바이탈 체크하고 연락해.”
인턴이 바짝 붙어 움직였다.
검사 결과를 보며 잠시 고민하던 김지훈이 수술과 관련이 깊다는 쪽으로 기우는 순간 집도를 한 개인 병원 의사에게 연락이 왔다.
(고령인 분이라 동맥 처리를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아뻬가 터져 농양까지 발생했지만 수술하기 어려웠던 케이스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아침 갑자기 출혈이 발생해 저도 당황스럽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지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종 치료를 담당하는 병원이라고 해도 써전은 결코 무모하게 수술하지 않는다. 개인 병원에서 80세 고령 환자를 수술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실력은 물론 필요한 시설까지 모두 완비돼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고 실수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농양이 발생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네. 혹시라도 놓친 부분이 있다면 문제가 꽤 커지겠어.’
후폭풍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반면 설령 과실이라고 해도 환자를 위해 눈에 보이는 명백한 원인이 있어야 했다. 같은 의사로서 답답한 일이었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일하고도 정확한 해답이었다.
다소 늦은 시각에 한수영이 내려왔다.
“지금 수술이 끝나 이제 내려왔습니다. 죄송합니다. 환자 보고 조치 취하겠습니다.”
출혈량과 고령, 지속적인 수혈이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중심 정맥을 잡았다. 곧이어 나온 CT 결과를 확인하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피가 상당히 고였네요.”
“어떻게 판단해?”
“백혈구 수치가 증가한 것 이외에 특별한 이상이 없고, 혈소판 수치도 정상입니다. 농양이 발생했다면 주변 조직이 무척 약해졌을 겁니다. 조직이 녹으며 동맥 결찰이 풀어진 것이 아닐까요? 출혈 양상으로 볼 때 바이탈이 유지되고 있을 때 바로 수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똑! 똑! 똑!
변함없었다.
수혈로 막을 수준이 아니었다.
평소 건강했다고 해도 고령의 노인인 이상 이대로 지켜본다면 지속적인 출혈과 다량의 수혈에 따른 합병증이 발생하고도 남았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했다.
내원 당시부터 환자를 본 의사가 수술하는 것이 원칙이자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다. 이제 와 당직 팀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수술하자.”
“직접 하실 겁니까?”
“그래야지.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어.”
한수영이 입술을 모았다.
의사의 과실 여부가 달렸다. 더군다나 최악의 경우 재수술을 하고도 출혈을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은 그에 따른 책임을 펠로우에게 넘길 생각 자체가 없었다.
‘내게 넘기면 신경 쓰실 일도 없을 텐데 죄송하지만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정말 든든하네요.’
즉시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