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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87화 (1,287/1,329)

13화

정선호가 훅훅 숨을 내쉬었다.

퍼스트를 섰다는 흥분만이 아니었다.

김지훈의 수술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다.

아뻬 수술은 학생 때 참관을 했기에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다들 빠르게 끝낸다지만 딱 십오 분 만에 수술이 끝날 줄은 몰랐다. 오히려 준비 시간이 더 오래 걸렸고, 마취까지 계산해도 한 시간이 턱없게 길어 보일 정도였다.

무엇보다 배를 열었는데 피를 거의 보지 못했다. 피부와 근육을 찢고, 수술 내내 당겨 손상을 주었건만 거즈 몇 장 젖지도 않았다.

‘후우! 생전 처음 퍼스트 자리에서 봐서 그런지 정말 다르게 보였어. 손이 안 들어갈 정도로 작게 열고도 깔끔하게 수술하는 것이 가능했구나.’

최고라 불리는 써전의 손을 본 설렘이었다.

어머니의 회복이 왜 그렇게 빨랐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수술의 크기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써전의 손, 즉 실력이라는 사실이 절실하게 다가왔다.

정선호가 돌연 눈가를 찡그렸다.

대략 원하는 분야가 있었지만 아직 어떤 과를 전공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솔직히 수련 때 편하고, 전문의가 돼 돈 많이 벌 수 있는 과를 택해도 될 성적이기에 흔히 말하는 3D 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Dirty(더러움).

Difficult(힘듦).

Dangerous(위험함)!

‘일반외과야말로 그런 과가 아닌가? 김지훈 선생님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텐데 왜 선택하셨을까?’

사람이 아니라 일반외과가 과연 어떤 과이기에 김지훈 같은 의사가 평생 직업으로 선택했는지 알고 싶었다. 그 또한 전공을 떠나 정말 의사가 될 수 있는 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깊었다.

내일 아침 근무를 시작하려면 자야 했다. 과제가 마음에 걸려 불안했지만 눈이 따끔거릴 정도로 피곤해 다른 일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보였다.

김지훈이었다.

‘수술 끝난 지 한 시간 가까이 됐는데 왜 이제 가시지? 다른 일이 있으셨나?’

문득 양재필의 말이 생각났다.

‘김지훈 선생님 때문에 죽겠다. 마이너 수술을 하고서도 수술 직후에 꼭 병실을 찾으시는 바람에 정말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선호야, 나 언제 자니? 나흘에 한 번 가는 오프만 기다려진다.’

김지훈은 어머니 수술 때도 그랬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면서도 당연하게 여겼건만, 의사가 돼 생각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김지훈은 오더만 내리면 되는 위치였다.

‘전화 한 통만 해도 확인할 수 있는데, 수술 후에 병실까지 올라간 환자를 직접 보시는 이유가 뭘까?’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뒤척뒤척 잠을 이루지 못하던 정선호가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고된 육신도 문제였지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정신적 스트레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왜 꿈에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차트에 불이 났다.

온통 빨간색으로 물들었다.

심적 부담이 너무 컸던지 급기야 과제물과 타이 묶음을 들고 망연자실한 자신이 보였다. 이내 이를 악물고 타이를 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똑바로 하자!’

이 목소리는 또 뭘까?

정말 혼란한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수술 방 휴게실이 떠들썩했다.

첫 수술을 준비하는 써전들의 입에 김지훈과 민정호가 오르내렸다.

“우리 김 부원장 참 대단해. 얼마나 좀이 쑤셨으면 일과 끝나고 다른 사람도 아닌 민 부원장을 환자로 만들어 수술했을까?”

“그러게 말입니다. 어이구! 퇴근 때 김 부원장님 만나지 않도록 정말 조심해야겠습니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병원 곳곳을 살피고 있는데 그게 돼?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어.”

“운명이라면 전 아뻬를 택하겠습니다.”

“아직 달고 있었구나. 나도 달고 있어서 불안해. 멀리하는 게 상책인데 난 이미 거미줄에 걸려든 신세야. 친구로도 부족해서 동서 사이라니.”

김지훈도 함께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있는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하긴 손일석과 서도진 정도면 웬만한 말은 하고도 남을 사이였다.

‘그래. 마음껏 떠들어라.’

“김 부원장, 민 부원장은 어때?”

“회진 때 봤으면서 뭘 물어?”

“난 그냥 아는 의사잖아. 집도의 소견상 별문제 없겠지? 이참에 일주일 푹 쉬라고 해.”

“안 그래도 못 박았어.”

“병 주고 약 주는구나. 참! 응급실 인턴하고 수술했다며? 선호 이 자식도 설마 김 부원장 계열인가? 수련 부장, 어떻게 생각해?”

서도진이 눈가를 좁혔다.

“다른 인턴들이 응급실을 돌아봐야 알겠지만 싹이 보이긴 합니다. 전보다 확실히 환자가 늘긴 했거든요. 재필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배울 걸 배워야지, 왜 일복을 배우고 앉았대.”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손 교수, 애먼 소리 하지 말고 오프인데도 자청해 수술을 들어왔다는 사실에 집중해. 얼마나 고마워?”

“아름다운 행동이야. 암! 아름답지. 그래서 오늘도 듬뿍 귀여워해 주고 왔어. 내가 당직 설 때 수처를 줄 수도 있다는 떡밥을 던지니까 눈이 반짝반짝 빛나더라. 수련 부장, 요새도 삼겹살에 연습하나?”

“응급실 간호 선생들에게 수처 기구 빌려 갔답니다. 설마 사람 피부와 제일 비슷한 돼지 껍데기 두고 종이에 연습하겠습니까?”

“으음! 이왕이면 삼겹살이 아니라 껍질까지 있는 오겹살이 좋은데 제대로 샀겠지?”

김지훈이 내심 입맛을 다셨다.

교수, 그것도 부교수 이상 되면 신경 쓸 일이 많아 인턴에게까지 관심을 주기 어려웠다. 그런데 근무 시작한 지 불과 열흘도 안 된 정선호가 벌써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후배 사랑은 곧 관심이었다.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건만 왠지 신경이 쓰였다. 특히 타이에 이어 수처를 당근으로 제시하며 과제를 던지는 손일석의 행보가 마음에 걸렸다.

‘일석이 저 자식이 찍었나? 학교 성적이 좋다는 말은 성실하다는 의미고. 근무하는 모습을 보면 실력과 열정을 다 갖춰서 정말 제대로 된 써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적극적으로 나서 볼까?’

이미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반면 전공의가 아니라 인턴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했다. 여기서 더 밀어붙이면 오히려 멀어질지도 몰랐다. 심지어 외과 쪽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눈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었다.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인턴이 이렇게 마음을 흔들어 놓을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제자처럼 키워 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러온 성급함일까?

‘우리 과 지원하라고 아무리 열심히 얘기해도 결정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좋은 의사 만들어 가며 차근차근 보자. 재필이가 더 급해.’

좋은 의사 만드는 방법이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결국 실력이었다. 최소 업무 중에는 끊임없이 두드려 더욱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필이면 김지훈이 새롭게 각오를 다진 그 시간 양재필이 세컨으로 들어왔다. 세컨에게 할 일이 주어지는 마무리만이 남자 집도의의 눈이 더욱 매섭게 빛났고, 퍼스트는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게 알았다.

실망시키지 않았다.

“양재필 선생, 나 좀 보자.”

휴게실이 활활 불길에 휩싸였다.

그날 오후.

민정호도 후끈 달아올랐다.

“지금 앉아 있는 거예요? 그 좋은 복근 놔뒀다 뭐에 쓰려고 키웠어요? 당장 일어나 빨리 걸읍시다.”

“지금까지 세 번 운동했습니다.”

“방귀는?”

“그게 벌써 나와야 합니까?”

“빠른 사람은 반나절도 안 걸립니다. 빨리 밥 먹고 퇴원해야죠. 병실이 아무리 좋아도 집만 하겠어요? 빨리 나오지 않고 뭐 해요?”

거의 내쫓기다시피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야 했다. 행정부원장으로서 자주 봤던 간호사들의 눈초리마저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어머! 제가 말할 때는 안 나오시더니 부원장님 말씀은 바로 따르시네요.”

“제가 필요해서 나온 겁니다.”

“호호호! 그러시구나. 열심히 하세요. 강 선생, 오후 주사 놓을 때 강 선생이 직접 놔 드려. 안 아프게.”

환자는 환자다.

치료와 회복을 위한 간호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눈총받기 마련이었다. 살짝 불길한 기분이 든 민정호가 서둘러 발을 놀렸다.

덕분일까?

부욱!

복도에서 민망한 일 벌어졌다.

하필이면 간호사에게 딱 걸렸다.

“호호호! 곧 물을 드실 수 있겠네요.”

‘역시 사람은 아프면 안 돼. 건강하게 살며 일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하구나.’

과도한 관심이나 익숙한 얼굴도 때론 불편할 때가 있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병원에서 수술받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득이 적은 것이 아니었다.

“별문제 없으면 모레 퇴원합시다.”

복강경으로 수술한 것도 아닌데 딱 삼 일 입원으로 치료 종결이었다. 남몰래 웃던 민정호가 돌연 눈가를 찌푸리며 머리를 톡톡 쳤다.

다른 환자도 다 그렇게 퇴원했다.

시간 참 빨리 흘렀다.

민정호가 퇴원했다.

피치 못하게 주어진 휴식이지만 배만 살짝 당길 뿐 수술 후 거의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단 며칠이라도 머리 아픈 일에서 벗어날 것이다.

김지훈도 덩달아 편해졌다.

민정호의 부재로 인해 종합 병원에 관한 업무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덕분이었다. 급하게 서둘러야 할 일이 없어 퇴근 시간도 자연히 빨라졌다.

여유는 곧 힘이었다.

이틀마다 빨간 펜이 춤을 췄다.

정선호의 눈가가 점점 시커메졌다.

전공의가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양재필에겐 험난하기만 한 상황이 연이어졌고, 주말 집담회에서는 가히 정점을 찍었다. 고경철과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선생님, 비록 인턴 때 참석했지만 서울은 껌이었네요. 매주 이런가요?”

“후우! 더 살벌해진 것 같아.”

“어떻게 살죠?”

“잡일 없는 것으로 위안 삼아. 죽어라고 공부하면서 환자만 보면 그래도 살길이 보일 거야. 솔직히 난 이준영 선생님이 조용히 계신 것만으로도 만족해.”

양재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앉아 있는 것 자체로 위압감을 전하는 이준영 교수였다. 선배들에게 어떤 의사인지 수없이 들었기에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 아니었다.

‘김지훈 선생님부터 사람 좋다는 안호석 선생님이나 송진우 선생님까지 다 이준영 선생님과 똑같은데, 그러면 뭐 해?’

층층시하!

고경철 말대로 예전처럼 잡일까지 시켰다면 당장 짐을 싸고도 남을 병원이었다. 하지만 일반외과에 지원한 후 우연히 고경철의 수술을 보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했다.

‘다른 선생님들과 확실히 달랐어.’

결코 실력 없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은 양재필이었다. 전문 병원은 한 단계 더 높은 실력자를 만들어 내는 병원이 분명했다. 특히 열심히 하면 그만한 보상을 보장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이번에 펠로우 마친 선생님들이 모두 교수가 됐다는 말은 나 역시 가능하다는 얘기다.’

죽어라 노력할 일만 남았다.

물론 선배의 역할도 중요했다.

하! 하! 하!

김지훈의 당직 날 딱 걸렸다.

수술이 없으면 단체 교통사고가 떴고, 간신히 처리하고 나면 다시 수술이 기다렸다. 연이어 집도하는 펠로우는 부러움 그 자체였고, 마무리할 때마다 받는 수처와 타이는 가물의 단비였다.

당연히 대가 치렀다.

김지훈이 요구하는 일 년 차의 기준은 어마어마하고도 무시무시하게 느껴졌고, 수처와 타이마저 예외가 없었다. 하지만 양재필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모든 선생님들이 기본을 강조하셨다. 이준영 선생님과 김지훈 선생님에게 배운 것은 그것이 모두라는 말씀까지 하셨다. 기본부터 쌓자.’

어느 틈엔가 오프 때마저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정선호와 함께 타이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혁원에게 정말 소중한 조언을 들었다. 심지어 김지훈은 전문의가 돼서도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따르륵! 따가각!

기구가 손안에서 놀기 시작했다.

‘정선호, 너는 지원할 과도 정하지 않았으면서 왜 따라 하는 거야?’

후배가 주는 자극이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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