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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86화 (1,286/1,329)

12화

어째 자세도 꾸부정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배가 좀 아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법 통증을 느끼는 것 같은데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며 일부터 처리하려 하고 있었다. 눈가를 좁힌 채 민정호를 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뭔가 감이 와.’

경험 풍부하고 노련한 써전은 환자의 자세나 얼굴만 봐도 내과 질환인지, 외과 질환인지 구별한다는 말이 있다. 김지훈 역시 그 정도 공력이 쌓였다.

특히 아뻬라면 말이다.

“일단 배부터 봅시다.”

“괜찮습니다. 그냥 체한 겁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누워 봐요.”

“괜찮다니까요.”

“어허! 느낌이 안 좋으니까 고집 부리지 말아요. 배 한 번만 만져 보면 되는 일인데 뭘 그렇게 힘들어해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이었다.

행정직이라도 병원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환자와 질환을 접하다 보면 병이 병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때론 자가 진단을 하며 작은 병을 큰 병으로 만드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잠시 실랑이를 벌였다.

같은 부원장이라고 해도 영역이 달랐다. 행정 쪽 일은 김지훈이 한 수 접어야 하지만 의료 부분은 민정호가 몇 수를 접어야 했다.

결국 와이셔츠 올렸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王) 자! 임금 왕 자!

“평소 운동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매일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이렇게 자기 관리 철저히 하는 사람이 왜 아픈 걸 무시해요? 근육 자랑하지 말고 배에 힘 빼요. 여기 누르면 어때요? 다른 부분보다 더 아파요?”

“윽!”

비명 소리로 끝났다.

그동안의 경과와 증상, 촉진 결과를 종합할 때 아뻬가 분명했다. 감별 진단을 위해 다른 검사를 할 필요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아뻬네.”

“예? 수술해야 합니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체했다고 고집이나 부리고, 그동안 뭘 본 거예요? 당장 준비해서 수술합시다.”

부원장의 진단이었다.

민정호가 찍소리 하지 못했다.

VIP라면 VIP다.

그간 쌓은 정과 오고 간 마음속 욕이 적지 않은 이상 다른 의사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더구나 체했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 억지로 잡아 앉혔다. 진단에 이어 직접 수술까지 한다면 두고두고 안줏거리가 될 것이다. 가만 놔뒀으면 죽을 뻔한 사람 살렸다는 생색도 내고 말이다.

김지훈이 민정호와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어제, 그제 안색이 좀 안 좋더니 그때부터 시작한 모양이네. 늦지 않아 다행이네.’

제법 환자가 있었지만 대부분 처치가 끝나 한가해 보였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간호사들이 김지훈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퇴근 복장이 아니라 가운을 입고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여기 이분이 아뻬네요.”

농담으로 들렸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간호사가 벌떡 일어났다. 아파 보이는 안색도 안색이었지만 인심을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머! 민 부원장님이 아뻬라고요? 이 선생, 빨리 베드 준비해요. 민 부원장님, 빨리 가서 누우세요.”

난리 났다.

모두에게 VIP였다.

“필요한 검사 확실하게 빨리 진행합시다. 아주 잘 익었을 겁니다. 그런데 인턴 선생은 왜 안 보여요?”

“오늘은 고경철 선생님이 응급실 당직인데 수술 들어가셨어요. 양방인 데다 작은 수술이 아니라서 두세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아! 선호가 오프였지? 누가 당직인데 이 시간에 벌써 양방을 띄웠지? 나만 일복 터지는 게 아니구나.’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누구 일복인지 우리 간호 선생들 힘들겠네요. 힘냅시다. 민 부원장님 수술은 어차피 내가 할 거니까 양방이어도 별 상관 없겠네.”

간호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번지수 잘못 찾았다.

당직도 아닌 사람이 퇴근은커녕 환자를 데려왔다. 이젠 외부도 모자라 직원 중 한 명을 수술하면서 다른 사람 일복 타령을 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씨도 안 먹힐 소리에 실소가 터졌다.

“사돈 남 말 하세요.”

김지훈이 찍소리 하지 못했다.

민정호가 졸지에 환자로 변했다.

아픈 와중에도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가슴과 복부 사진에 심전도 찍고, 혈액 검사를 시행하는 내내 표정이 평소와 똑같았다. 감정을 전혀 내보이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보호자 서명이 필요한 상황이 되자 살짝 반응을 보이긴 했다.

“가족과 친척 모두 너무 멀리 있습니다. 제 서명으로 끝냈으면 합니다.”

VIP라고 수술과 마취의 위험성이 줄어들 리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직원이기에 더 철저히 설명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결혼을 하지 않은 민정호의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지금까지 결혼도 안 하고 뭐 했대. 배에 왕 자 새길 시간에 사람을 만났어야지.’

“정말 올 사람이 없어요?”

“시간에 맞춰 올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부원장님께서 직접 수술해 주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내가 한다고 다른가?’

“후우! 어쩔 수 없네. 전화는 가능하죠?”

“사정이 있어 불가능합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어딘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엇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고,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어 본인 동의로 끝내야 했다.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됐다.

마취과도 민정호가 환자라는 사실을 고려했는지 바로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하필 복강경 기구 모두 점검에 들어가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배에 살이 없어서 개복이나 라파로로 하나 상처 크기가 비슷할 테니까 열어서 합시다. 괜찮죠?”

“예. 진행해 주십시오.”

‘본인 수술인데 다른 사람 수술하는 것처럼 말하네. 침착한 거야? 아니면 성격이 별난 거야?’

한술 더 떴다.

“라파로로 한 환자들은 대부분 며칠 내에 퇴원하던데, 이삼 일이면 업무 복귀가 가능합니까?”

“퇴원하자마자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사람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일주일 정도 푹 쉬어요.”

“일주일은 너무 깁니다.”

“민 부원장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요? 박현철 이사님과 진 대리님도 계시잖아요? 다른 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요. 병가는 뒀다 뭐 하려고.”

김지훈이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어떤 사유로든 민정호 역시 쉴 자격이 충분했다. 사실 아뻬 수술 후 퇴원했다고 바로 출근을 요구하는 직장이라면 관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제 수술을 함께할 사람만 있으면 된다.

당직 팀이 양방으로 수술 중이라도 퍼스트를 설 딱 한 사람만 구하면 되기에 별걱정 하지 않았다. 인턴과 전공의도 무려 세 명이나 보강한 터였다. 다만 당직 의사 모두 수술에 들어갔다면 전공의도 당연히 그 안에 있을 상황이었다.

아쉬운 대로 인턴을 찾았다.

‘세컨 역할만 하면 되니까 문제없겠지.’

인턴 숙소에 전화를 걸었다.

정선호가 받았다.

“혹시 우리 과 인턴 선생 숙소에 있나?”

(오늘 오프입니다.)

“뭐? 오프라고?”

(왜 그러십니까? 아마 근처에 있을 텐데 급한 일이시면 연락해 볼까요?)

“수술 하나가 있긴 한데 됐다.”

김지훈이 쩝쩝 입맛을 다셨다.

감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느 병원이나 인력이 크게 모자라지 않는 한 양방 정도는 야간 수술이 가능했다. 반면 수술 방 세 개를 여는 일은 인원이 넘치는 대학 산하 종합 병원에서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인턴과 전공의가 갑자기 늘은 데다 마취과까지 승낙을 한 탓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지? 응급 수술 중 하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이고! 마님에게 전화를 안 드렸네. 일단 전화부터 하자.’

김지훈이 재빨리 당직실로 들어갔다.

응급 수술이 있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고경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다급히 민정호를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평상시 분위기를 되찾았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잘하세요.)

“예, 마님!”

이제 수술만 남았는데 의사 한 명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혼자 할까 생각을 해 봤지만 불의의 사고에 대처할 인력이 부족한 야간이었다.

보호자 동의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적으로 무리였다. 게다가 수술 방 역시 가뜩이나 부족한 인원을 모두 동원해 수술과 마취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어후! 의사 생활 몇 년인데 수술 팀도 생각하지 않고 스케줄을 올렸을까? 답이 안 나오네. 큰일이다.’

그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정선호였다.

“무슨 일이야?”

“수술 들어갈 사람이 없다고 하셔서…….”

“그래서?”

“괜찮으시면 저라도…….”

“네가 들어오겠다고?”

“다른 건 몰라도 배를 끌 수는 있습니다.”

오프인 인턴이 일을 자청하다니 깜짝 놀라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초응급 상황이 아닌 데다 아무리 아쉽다고 해도 쉬어야 할 후배를 끌고 들어가 수술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반복하면 자칫 습관 된다.

절대 용인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용인될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내일 아침 바로 응급실 근무를 시작해야 하는 데다 과제까지 내준 마당이었다.

“오프라고 제대로 쉬지도 못할 텐데 됐다. 조금 있으면 수술 끝나니까 넌 가서 쉬어.”

“간호 선생들에게 선생님도 당직이 아니시라고 들었습니다. 환자가 병원 직원이라고 들었고, 어차피 외과를 돌아야 하는데 미리 배우고 싶습니다.”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무척 마음에 들었지만 찜찜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금방 끝나는 아뻬라는 사실에 슬슬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지금쯤 마취과도 다 준비했을 텐데, 이제 와 미루자고 하면 욕 한 바가지 먹겠지?’

결국 타협을 하고 말았다.

“좋아. 오늘 한 번만 신세 지자.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빌리는 대신 밥 한 끼 살게. 고맙다.”

“아닙니다. 제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수술 방으로 환자 올리고, 배만 잘 끌어 주면 돼. 그 정도는 실습 때 해 봤지?”

민정호가 인복이 있는 건지, 정선호가 스스로 일복을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보기 드문 후배라는 사실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민정호를 수술 방으로 옮겼다.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동안 내내 혼자 지낸 건가? 밉든 곱든 이럴 때는 가족이 옆에 있어야 하는데 민 부원장도 심난하겠다.’

일사천리로 수술이 준비됐다.

김지훈이 직접 배를 소독하고, 천을 덮었다. 정선호는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셈인지 김지훈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수술 시작하셔도 됩니다.”

“마취과 선생, 고맙습니다. 굿모닝 아뻬로 보이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배를 열었다.

김지훈이 일일이 손의 위치를 잡아 주어야 했지만 정선호의 서툰 손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 때부터 아뻬 밭이라는 구미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많이 수술했다. 그 이후에도 수없이 해 왔고, 결정적으로 민정호는 근육질의 마른 체격이었다.

복막을 열었다.

기구 몇 번 움직이자 빨갛게 익은 아뻬가 방긋 인사를 했다. 농담이라 해도 전형적인 굿모닝 아뻬였고, 이보다 쉬운 수술은 없었다.

“이렇게 끌고 있어.”

김지훈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다.

순식간에 아뻬가 절제됐다.

이리저리 정선호의 손을 움직여 가며 복강 내를 확인한 김지훈이 곧바로 배를 닫기 시작했다.

피부 봉합만이 남았다.

김지훈이 슬쩍 정선호를 보았다.

‘그냥 수처 기구로 혼자 타이하면 되지만, 손으로 타이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미리 봐 두는 것도 괜찮겠지.’

워낙 작게 열었다.

단 세 바늘의 봉합으로 끝나지만 눈썰미가 있다면 귀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같은 술기를 봐도 학생 때와 인턴 때의 눈이 다르기도 했다.

김지훈이 직접 타이를 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끝났지만 정확하고 확실하게 열린 피부를 밀착시켰다.

“컷!”

정선호가 처음 퍼스트를 섰다.

한 일이 거의 없다고 해도 그 자체로 부담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무조건 손이 떨릴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가위질을 하는 정선호의 손이 의외로 침착했다.

‘배를 끌 때도 시야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보였는데 써전의 자질이 보이네.’

“끄으응!”

시간 맞춰 민정호가 잘 깨어났다.

딱 십오 분 걸렸다.

즉시 회복실로 옮겼다.

직접 오더를 내던 김지훈이 정선호에게 이제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모니터에 나타나는 바이탈을 확인하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선호 선생, 내가 볼 테니까 빨리 가.”

“아닙니다. 환자분 병실 올라갈 때까지 있겠습니다.”

“괜찮아.”

얼굴을 붉히면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마음에 쏙 든다.’

후배의 열정이 아름답기까지 했다.

덕분인지 민정호가 무사히 병실로 올라갔다.

먼저 시작된 수술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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