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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85화 (1,285/1,329)

11화

역시 새로운 피는 활력이었다.

신규 임용된 펠로우, 각 과로 파견된 전공의와 인턴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몰려드는 환자와 밀린 수술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불편과 문제들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데 일조하고도 남았다.

그만큼 몸이 편해졌다.

의료진에게만 국한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관련된 모든 직종에게 영향을 줬고, 결국 병원 전체에 가해지는 부담과 스트레스가 다소나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일을 나눴다는 것은 곧 누군가 짊어졌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가장 힘든 과정 속에 있는 전공의들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가 된 펠로우마저 죽는 소리를 할 정도니 인턴들은 어떨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응급실에 들른 김지훈이 힐끗 정선호를 보았다. 이틀에 한 번씩 오프를 가건만 불과 근무 사 일 만에 눈가가 시커메졌다. 게다가 보통 의기소침한 얼굴이 아니었다.

‘실수 한 번 했다고 서도진 선생에게 된통 한 소리 들었다고? 별것도 아닌데 서도진 선생이 널 잘 본 모양이다.’

일의 성격상 살갑지 못한 써전들 특성인지 무엇인가 기대를 주는 후배들에게 유독 엄한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한 성격 하는 서도진이니 눈물을 쏙 빼놓았을 것이다.

위로해 줄 일이 아니었다.

일일이 떠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환자와 관계된 일은 무조건 평생 명심해야 하는 것이 마땅했다. 혼났다고 씩씩거리며 끝낼지, 스스로 이유를 찾아 한 걸음 더 나아갈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달린 일이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일 없었어?”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점점 마음에 드네.’

이쯤이면 어깨 한 번 두드려 주며 기운을 북돋아 줄 법도 했다. 오히려 힘이 될 만한 말은커녕 볼펜 하나를 척 꺼내 들었다.

빨간색이 춤을 췄다.

“쯧!”

혀를 차는 소리까지 냈다.

얼굴이 하얘지며 점점 쪼그라드는 정선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것처럼 또 하나의 리포트를 내주었다.

“아뻬하고 감별할 질환과 응급실에서의 올바른 대처에 대해 리포트 작성해. 아! 우리 과 인턴 선생에게 얘기 들었지? 다음 주에 타이 확인할 거니까 준비해.”

‘헉’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김지훈은 인턴에게 오프가 어떤 의미인지 아예 모르는 사람 같았다. 어머니를 수술하고 치료하는 동안 보였던 친절하고 자상한 모습이 본래 모습인지, 후배 상황은 생각하지도 않고 무지막지하게 대하는 지금이 원래 모습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더구나 한 명이면 감당할 구멍이라도 있겠지만 손일석까지 툭하면 과제를 내던졌다.

‘두 분 기준이 다르면 어떻게 하지?’

“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다.

김지훈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사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수 없는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교수에게 그런 방식으로 배운 탓도 있겠지만 환자와 관련된 사안에는 일체 예외를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의사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이때 배우지 못하거나 기본을 쌓지 못하면 평생 실력 없는 의사로 남기 마련이었다.

선배의 의무기도 했다.

‘힘들어도 이겨 내야 돼.’

초반부터 너무 누르면 백 중 구십구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수긍할 이유와 함께 적당한 자극이 가미된 한마디가 필요했다.

“정선호 선생, 환자는 절대 의사를 기다려 주지 않아. 같은 실수가 반복되면 실력이 된다는 사실 잊지 마.”

정선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사실 불만이 없던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으로나마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항변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거의 모든 과가 압박을 가해 인턴 동기들은 아예 게거품을 물었다. 내심 동조했지만 김지훈의 말을 듣는 순간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자신이 정말 의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다. 응급실 인턴으로서 환자만 담당 과에 연결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구나.’

김지훈과 손일석이 왜 근무 때마다 과제를 내주는지, 서도진이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됐다. 선배들의 눈에 자신은 인턴이 아니라 의사였던 것이다. 동료 인턴들도 말뿐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수고해.”

김지훈이 당직실을 나갔다.

모든 선배들이 간호사나 환자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자신을 질책하거나 모자란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이 이상스레 고마웠다.

그때 내과 일 년 차가 들어왔다.

비록 전문 병원에서 인턴을 마치지 않았지만 비슷한 경험이 없을 수 없었다. 정선호의 표정 하나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빤히 알고 있었다.

“힘들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 한마디만 들어도 혼나는 것 같은 시기가 인턴 때야. 나도 한참 지나서야 느끼기 시작한 건데, 잘 새겨들으면 피가 되고 살이 될 거야. 솔직히 전문 병원에 이상한 선생님들은 없잖아?”

“이상한 선생님이요?”

“가르쳐 주는 것도 없이 욕부터 나오는 사람 있어. 환자에게 문제 생기면 인턴이나 아래 연차 탓하는 사람도 많고. 몇 번 부딪치면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까지 난다.”

악어나 정갑수 같은 인간이 사라질까?

어디에나 언제나 있기 마련이었다. 부당한 지시에 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그런 인간들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흔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정선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 좋은데 과제가 너무 많아요. 시험 볼 때보다 더 힘든 것 같아요. 오프 때 잠잘 시간마저 부족합니다.”

“김지훈 선생님이지?”

“일주일 만에 세 개 받았습니다.”

돌연 일 년 차가 웃었다.

“난 심각한데 왜 웃으세요?”

“너 찍혔구나?”

“예? 제가 뭐 잘못했나요?”

정선호가 화들짝 놀랐다.

일 년 차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도 들은 얘기긴 한데, 김지훈 선생님 하면 뭐가 떠올라? 파견 결정 났을 때 들은 말이 있을 거 아니야?”

“일복의 화신, 수술 제일 잘하는 선생님, 이사장님과 친구 사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힘과 능력 하나로 부원장님까지 되신 선생님?”

“그건 눈에 딱 보이는 사실이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후배 사랑 아니겠어? 우리 근무 조건, 월급, 복지까지 엄청나게 신경 쓰시는 선생님이라는 평이 압도적이야.”

“그래요? 근데 찍혔다는 말은 뭐예요? 우리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도리어 쉴 시간을 충분히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약간 다른 말이긴 한데 결국 네가 마음에 든다는 소리야. 실력, 열정, 성격 이외에 다른 건 전혀 안 보신다는 말도 꽤 돌아. 야! 우리 선호가 보기보다 실력과 열정이 대단한가 봐. 다시 봐야겠어.”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디 있어요?”

일 년 차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단 하루면 노련한 선생님들에겐 다 보인다는 말 못 들었어? 가끔이지만 내 눈에도 보일 때가 있다.”

정선호가 졸음마저 잊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후배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김지훈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 다른 이유도 아닌 실력과 열정 때문이라니 기분이 묘했다.

흥분이랄까?

“자식! 당장이라도 외과 지원할 얼굴이네. 어이구! 검사실 가야 하는데 늦었다.”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정선호가 물끄러미 천장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김지훈의 기대가 무엇일지 곰곰이 고민한 결과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외과 전공의가 필요하신 건가? 아니야. 그러면 도리어 편하게 일하도록 해 주셨겠지. 진짜 의사가 되기를 바라시는 게 분명해.’

힘들어 죽겠다는 몸과 달리 정신이 또렷해졌다. 인턴을 시작하며 가졌던 각오, 어머니의 수술을 지켜보며 느꼈던 감정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하루라도 빨리 진짜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 시간 김지훈이 귀를 팠다.

“왜 이렇게 가려운 거야?”

‘그나저나 정선호 같은 선생들이 우리 과를 지원해 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밀어붙였나? 이러다 잘 키워서 다른 과 좋은 일만 시키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마음에 쏙 드는 정도를 넘어 왠지 큰 인연이라도 닿은 후배 같았다. 내심 무슨 수를 써서라도 꽉 잡아 훌륭한 써전을 만들고 싶었다.

불현듯 걱정 하나가 생겼다.

‘일석이가 타이를 과제로 줬다고? 이 자식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건가? 양보할 수 없지.’

눈을 빛내던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김칫국 너무 빨리 마셨다.

아닐 수도 있었다.

적어도 선배 입장에서는 말이다.

평소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절대 먼저 연락하지 않았던 이준영 교수가 갑자기 김지훈을 찾았다. 더군다나 수련 부장인 서도진과 함께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인턴 선생들 교육에 문제없겠지?”

“그 일은 서도진 선생이 맡고 있습니다만,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서도진도 다소 의아한 얼굴이었다.

“같은 얘기 두 번 할 필요 없어 함께 왔다. 내년이면 우리도 전공의를 선발해야 하는데 바짝 신경 써서 좋은 재목으로 만들어 봐.”

김지훈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인턴과 직접적인 접촉이 거의 없는 이준영 교수였다. 때문에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면 수술실에서 자주 봤을 일 년 차인 양재필일 가능성이 높았다. 돌려 말하는지도 몰랐다.

반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정선호가 유독 눈에 들어오긴 했지만 양재필 역시 손색없는 의사였다. 웬만하면 싫은 소리 안 하는 송진우까지 나서서 휴게실을 애용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를 입증하고도 남았다.

“안 그래도 다들 신경 쓰고 있습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선생이 있으시거나, 반대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시는 건 아닙니까?”

“고경철 선생과 양재필 선생을 보니 생각이 많아져. 수련 부장에게도 말했지만 그런 의사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우리 책임이다. 인턴도 마찬가지야.”

오직 환자와 수술에만 전념하는 이준영 교수였지만 후배 교육에 대한 관심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아마도 김지훈은 물론 전문 병원의 써전들에 버금가는 의사를 더 만들어 내고 싶다는 욕심일 것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도진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말 나온 김에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양재필 선생에게 첫 집도를 언제쯤 줘야 할지 애매모호합니다. 예전에는 백 일 당직 말미에 줬지만 지금은 그런 기준이 없어서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고민하거나 상의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전공의 교육에 대해 확고한 기준을 지닌 스승과 제자의 의견은 토씨 하나까지 다르지 않았다.

“자격이 되면.”

“자격이 되면.”

간단하게 결정됐다.

판단은 선배들의 몫이었다.

이제 퇴근할 시간이었다.

이준영 교수와 서도진이 일어나며 김지훈을 보았다. 오늘도 또 일이 있는지 묻는 눈치였고, 불행하게도 당연한 일이었다.

“민 부원장하고 상의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퇴근하시죠. 서도진 선생, 다음에는 너무 심하게 혼내지 마.”

“그 정도도 못 버티면 바이탈 못 다룹니다. 인턴이라고 기본적인 일이나 잡일만 하는 시대도 아니고요.”

“하긴.”

인턴 잡(Job)은 곧 잡(雜)일이라는 말이 통용될 시기가 아니었다. 잡다한 일을 모두 피할 수 없겠지만 최소한으로 줄여 주는 것이 마땅했다. 당연히 남는 시간은 환자를 볼 수 있는 의사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어야 했다.

책상을 두드리며 민정호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일단 약속하면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인데 시간이 너무 지났다.

화가 나기보다 걱정이 됐다.

‘무슨 일이 있나?’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계만 바라보던 김지훈이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병원 안에 있을 텐데 안 오는 사람 기다리며 욕하느니 먼저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다. 만약 약속을 잊었다면 처절하게 응징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흐흐흐! 깜빡했다면…….’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민정호였다.

한마디 하려던 김지훈이 돌연 깜짝 놀라 눈만 멀뚱거렸다. 신기할 정도로 표정을 잘 숨기는 민정호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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