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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83화 (1,283/1,329)

9화

김지훈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반듯한 후배를 보는 즐거움이었다.

또한 귀하기만 한 전공의 일 년 차였다.

때문에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반외과를 지원한 마음이나 각오는 다르지 않겠지만, 같은 연차 없이 혼자 근무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배 이상 힘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변하며 수련 방식도 변했다.

대표적으로 인간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던 공포의 시간, 백 일 당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적정한 오프와 보수를 보장했고, 그것이 또한 정당한 대우였다.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발생했다.

일 하나 시킬 때도 과중한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물론 중도에 그만둘까 봐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보는 일까지 생긴 것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일각에서 전공의가 상전이라는 불평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어쩌면 지금이 보다 합리적일지도 몰랐다. 힘들었던 과거 경험을 끄집어내 봐야 오히려 과거 방식의 비합리성만 부각시키는 꼴이었다. 추억이 아닌 기억으로 끝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었다.

‘배울 거 다 배우면서 편하게 일할 수 있으면 그게 가장 좋겠지. 하지만 일 년 차 때 기본기를 제대로 쌓아야 진정한 써전이 될 수 있어.’

미소가 슬슬 옅어졌다.

어떤 방식으로 수련을 진행해도 몸과 마음이 모두 편할 방법이 없었다. 한 사람의 목숨과 삶을 걸고 수술을 해야 하는데 어설픈 써전을 만드는 것만큼 책임을 방기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이젠 전공의들을 일일이 가르쳐야 할 위치가 아니었다. 수련 부장인 서도진을 비롯해 고경철까지 교육을 담당할 의사가 넘쳐났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보다 더 깊게 고민하고 지원했을 후배들이네. 나까지 직접적으로 끼어들었다간 상전만 하나 더 만드는 꼴이겠지.’

스승처럼 행동하면 되는 일이었다.

“회진 돌자.”

김지훈의 입이 다시 찢어졌다.

일찍 일어난 놈이 뭐 하나 더 얻는다더니 운이 좋았다. 일반외과 내 서열 사 위라 함께 회진 돌 기회가 없을 것이라 여겼는데 무려 세 명과 함께 회진을 돌게 됐다.

‘이런 호사를 누리려면 매일매일 가장 먼저 출근해야 하나? 자식들! 바짝 긴장했구나.’

인턴이 부리나케 앞장섰다.

환자 명단을 보며 병실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명색이 의사인 인턴에게 하등 불필요한 일이었지만 하루 정도는 두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전공의 일 년 차가 환자 앞에 섰다.

“간 이식으로 수술받은 지 열흘째 되는 환자입니다. 특별한 문제 없습니다.”

“간 기능 수치는?”

“그게…….”

뒤적뒤적!

전공의에게 회진은 단순히 환자를 안내하는 일이 아니었다.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현재 상태는 어떤지 등등 환자를 파악한 후 필요한 조치를 배우고 시행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김지훈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고경철이 도끼눈으로 일 년 차를 보며 재빨리 김지훈이 원하는 답을 했다. 누구보다 힘들고, 엄격한 수련을 받은 삼 년 차답게 환자를 꿰뚫고 있었다.

“좋아. 환자분, 불편한 데 없으시죠?”

“예, 괜찮습니다.”

환자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회진 풍경 때문이었다. 줄줄이 의사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에 대학 병원다운 분위기를 느끼는 것 같았다.

일 년 차 이마에 땀이 맺혔다.

실수 연발이었다.

툭툭 내뱉는 김지훈의 질문은 송곳 같았고, 그때마다 자신의 준비가 부족했음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가장 신경을 쓴 드레싱마저 말없는 지적을 몇 번이나 받았다.

고경철의 얼굴이 갈수록 살벌해졌다.

회진이 끝났다.

결국 한마디 들었다.

“고경철 선생, 똑바로 하자.”

일 년 차가 하얗게 질렸다.

첫 근무로 전문 병원 파견이 결정됐을 때 선배들 모두 김지훈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결코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은 없지만,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첫 근무 시작한 날, 첫 회진을 돌자마자 들은 것이다. 게다가 김지훈보다 더 무서운 삼 년 차 선배가 대신 들었다. 이제 막 병원 생활을 시작한 인턴까지 깜짝 놀라 멈칫거렸다.

‘죽었다!’

“후우!”

고경철의 한숨은 바윗덩어리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병동을 떠나는 김지훈의 뒷모습이 왜 사신처럼 보이는 걸까?

일 년 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지훈이 히죽히죽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연이은 실수와 미숙함에도 전공의는 듬직하기 짝이 없었고, 중환자실을 지키는 인턴은 존재만으로도 즐거웠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없지. 경철아, 너도 그랬으니까 살살 다뤄.’

즐거움이 쭉 이어졌다.

교수 서열이 아니라 수술의 경중에 따라 전공의의 수술 참가가 결정되기 때문에 일 년 차가 김지훈의 수술에 들어오게 됐다.

간 이식이다.

세컨을 선다지만 엄청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적절하게 가르치고, 유도해 나가는 것 또한 선배의 의무였다.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의 긴장이 배가 됐다.

퍼스트인 모찬우가 있지만 수술에 집중하며 모든 것이 미숙한 후배를 가르치는 일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 아마도 모찬우는 더 힘들 것이다.

“이 부분은 힘줘서 닦으면 안 된다.”

“시야 가리지 마.”

“여기서는 확실하게 끌어야지.”

부글부글 끓는 가슴이 보였다.

결코 능력이 부족한 후배가 아니었다.

다만 대부분의 수술을 전문의들끼리 해 온 탓이었다. 전공의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한 후 전문 병원에 파견된 고경철에게 적응된 것도 한몫할 것이다.

‘이런 부분은 우리가 적응해야 할 일이네.’

또 하나의 시험이 남았다.

기본 중의 기본인 수처와 타이 실력이었다.

아무리 기구가 발전해도 모든 과정을 대체할 수 없었다. 또한 기구 역시 인간의 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술기였다.

“모찬우 선생, 마무리해.”

자연스럽게 손을 넘긴 김지훈이 조용히 전공의의 손만 바라보았다. 무슨 의미인지 잘 아는 모찬우가 배를 봉합하며 타이를 시켰다.

열심히 연습한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전문의, 특히 김지훈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피부를 봉합할 때 타이가 가장 쉬운 만큼 속도부터 세기 조절까지 배워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다.

“쯧!”

가볍게 혀 한 번 찼다.

아홉 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김지훈이 어깨를 휘휘 돌렸다.

꽤나 피곤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깨는 것까지 확인한 후 웬일인지 잠잠했던 응급실로 향했다. 아뻬 환자가 있다는 연락을 막 받은 참이었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휴게실은 어디에든 있지.’

모찬우 역시 김지훈 라인이라면 라인이었다. 혀를 차는 소리 들었고, 전공의 교육이 무엇인지 아는 이상 휴게실행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활활 불타오를 것이다.

‘그나저나 아뻬면 일 년 차가 꼭 들어와야 할 수술인데 어떻게 하지? 이 시간에 또 데리고 들어갔다간 차트 정리는커녕 환자 파악도 제대로 못하겠네.’

한 명의 전공의를 수련시키는 일이야 이미 경험했지만 단 한 명뿐인 일 년 차는 정말 생소했다. 수련 부장인 서도진이 미리 대처했을 것이라 여기고 응급실에 들어서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안녕하십니까?”

“인턴 선생? 어? 정순옥 환자분 아들?”

“예. 정순옥 환자가 제 어머니이십니다.”

세상 참 좁았다.

진단에 골머리를 썩었던 환자 아들이 학교 후배인 거야 그럴 수 있다지만, 인턴 첫 근무지로 전문 병원에 파견되다니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름이?”

“정선호입니다.”

“똑같은 정씨야?”

“본관이 다릅니다.”

“그렇구나. 우리가 누구인지 빤히 알면서 왜 미리 말 안 했어? 어머님이나 아버님께 실수한 거 없었지?”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잘 치료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계십니다.”

“다행이네. 그건 그렇고, 서도진 선생에게 환자 노티는 인턴 선생이 직접 한다고 들었는데 해 봐.”

정선호가 눈가를 굳혔다.

“22세 남자 환자입니다. 이틀 전 발생한 복통으로 내원했습니다. 당직 선생님께 연락드리고, 방사선 검사 및 혈액 검사 시행했습니다.”

“차트 보자.”

김지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될 놈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얼마나 정확하게 환자 상태를 기록했는지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근무에 임하는 자세와 각오를 엿볼 수 있었다.

만족스러웠다.

힐끗 보인 다른 환자의 차트 역시 성의가 가득했다. 결국 최선을 다해 환자가 호소하는 고통에 귀를 기울였다는 말이었다.

‘임상 지침서를 달달 외운 모양이네.’

“환자 보자.”

송진우가 한참 환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지훈이 서둘러 달려갔다.

“송진우 선생. 아! 송 교수, 내가 당직인데 왜 나왔어? 펠로우 선생은?”

“다른 병원과 체계가 많이 달라 익숙해질 때까지 한 달 정도 저희가 같이 근무하기로 했습니다. 펠로우 선생은 마취과 만나러 수술 방 올라갔습니다.”

“그래? 고생이네. 환자분은?”

“바로 수술해야겠습니다.”

하루 차이라 해도 이젠 엄연한 교수였다.

아뻬를 진단하지 못할 리 없었고, 무엇보다 교수로서 대우해야 했다. 이미 수술이 결정됐는데 환자를 다시 진찰하고, 설명하는 일 역시 예의가 아니었다.

“알았어. 수술 진행해.”

송진우가 바로 수술 팀을 짰다.

“마취과하고 얘기 됐지? 일 년 차하고 둘이 라파로로 할 테니까 응급실만 커버해.”

(방금 전에 수술이 끝났는데 제가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뻬에다 전공의까지 있는데 펠로우가 왜 들어와? 모찬우 선생에게 얘기하고, 응급실로 내려오라고 해.”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가차 없었다.

가장 여린 마음을 가진 송진우도 일 년 차를 어떻게 수련시켜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이상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믿고 맡기면 될 일이었다.

‘그래. 근무 시작부터 확실하게 오프 주는데 할 일은 해야지. 일 년 차 때 반드시 배워야 할 부분인데 힘들다고 도망갈 놈이면 편하게 해 줘도 도망간다.’

송진우가 당직을 선다는 연락을 받지 못했다. 교수 두 명이 필요한 일도 아니라서 입장이 애매모호했지만 갑자기 달라진 상황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송진우 선생, 나 퇴근해도 될까?”

“그럼요. 피곤하실 텐데 빨리 퇴근하십시오.”

“고맙다. 이번 수술만 보고 갈게.”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수술하셨는데 일 년 차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하십니까?”

“처음이잖아.”

결국 김지훈 참관하에 송진우가 집도하고, 일 년 차가 퍼스트를 서게 됐다. 싱글 포트로 수술하는 이상 수술 중에는 거의 할 일이 없지만 준비와 마무리는 달랐다. 하루라도 빨리 능력을 가늠해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올라갑시다. 아! 정선호 선생.”

“예.”

“우리 병원은 인력이 부족해서 인턴 선생들도 곧 수처와 타이를 해야 할 거야. 대부분 간단한 열상이겠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술기니까 연습 많이 해.”

정선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떤 사람이든 퇴근 시간이 지나면 쉬고 싶기 마련이었다. 특히 격무에 시달린 날은 더욱 간절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김지훈은 인턴에게 신경을 쓸 정도로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어머니가 수술받은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일복의 화신이라고 하지만 누구보다 일이 많은 이유가 환자를 가장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과를 막론하고 학교 선배들 입에 전설처럼 오르내리는 이유가 있었다. 가장 빠른 나이에 부원장이 된 까닭 역시 알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한 선생님을 만났어. 이번 파견이 끝나면 다시 올 기회가 없다. 많이 배우고 가자. 수처와 타이라면 선배들 말대로 삼겹살을 사야 하나?’

예전에는 삼겹살을 사다 수처와 타이 연습을 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다. 더구나 단 한 번의 경험도 없으면서 사람을 대상으로 연습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정적으로 김지훈의 표정을 보는 순간 진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루 꼬박 근무하고 하루 오프를 받지만, 결코 쉴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얼마 후, 수술이 끝났다.

송진우가 말없이 휴게실로 향했다.

김지훈도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둘 다 벌게지겠네.’

이제 할 일 다 했고, 퇴근하는 일만 남았다. 갑작스러운 횡재에 휘파람을 불며 병원을 나서려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응급실이 소란스러웠다.

들리는 소리만으로도 급박했다.

발길을 돌렸다.

응급실로 들어선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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