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55세 여자 환자. 정순옥.
침착하고, 온화한 성품을 가진 환자였다.
코 줄을 낀 상태에서도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뺀 후에는 운동에 전념하며, 회진을 돌 때마다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곤 했다.
‘성품이 참 선한 분이네.’
남편이나 자식과 관계도 좋아 보였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들까지 각자 일이 있을 텐데 홀로 병실을 지킨 적이 없었다.
조직 검사 결과 양성 위궤양으로 나왔다. 한숨 돌린 덕에 더욱 순조로운 회복을 보여 수술한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 퇴원이 결정됐다.
“내일 퇴원하시면 되겠습니다. 허리가 많이 아프시더라도 당분간 진통제는 조심해 주시고, 식사 시간이나 위에 부담을 주는 음식 역시 주의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한 주 역시 일이 많았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지나갔다. 사람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 결코 나쁜 소리 아니었다. 이 추세를 쭉 이어 나가야 한다는 각오하에 김지훈이 심기일전 당직에 임했다.
따르르르릉!
(한수영입니다.)
“내려간다.”
깔끔하게 수술 하나 끝냈다.
응급실이 잠잠해 마음을 놓는 순간 퇴근할 겨를도 주지 않고 환자가 통증을 호소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간 이식을 한 후 일반 병실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비상이다.
김지훈이 급히 병동으로 올라갔다.
먼저 진찰을 한 나종진이 단순 복통으로 판단된다는 보고를 하며 다소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당직이라지만 부원장이나 되는 의사에게 연락할 일이 아니었다는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차피 병원에 있었는데 노티 잘했어. 간 이식 환자는 아무리 사소한 증상을 호소해도 떨리잖아.”
내친김이었다.
김지훈이 직접 환자를 찾아 다시 진찰하고, 한동안 보호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집도를 한 의사의 말에 불안했던 얼굴이 펴졌다.
신뢰도의 차이였다.
직급이 아니라 주치의에 대한 믿음이었다. 만약 나종진이 수술한 환자를 김지훈이 먼저 보았다고 해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환자와의 라뽀는 원장님이 오셔도 주치의보다 강할 수 없는 법이지.’
그때 간호사가 달려왔다. 나종진을 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정순옥 환자가 복통을 호소해요.”
다 들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다행히 간 이식 환자는 별문제 없었지만 퇴원을 하루 앞둔 환자의 복통 역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병실을 찾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던 아들이 상당히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오늘은 아드님이 함께 있으시네요. 환자분, 배가 아프다고요? 어디가 어떻게 아프십니까?”
수술받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된 환자였다.
신중하게 진찰 결과 수술과 관계없는 단순 장염으로 보였다. 설사를 동반해 다소 걱정이 됐지만 통상적 치료로 충분해 보였다.
“필요한 조치를 하겠습니다. 큰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내일 오전까지 증상이 호전되지 않는다면 하루 이틀 정도 더 계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차피 당직이라 병원에 있었습니다. 혹시 더 불편해지시면 언제든 간호 선생에게 연락해 달라고 말씀하세요.”
환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들은 놀란 표정까지 지었다.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당직인 김에 진찰한 것뿐인데 왜들 이러시지? 다른 환자나 보호자와 반응이 달라도 너무 달라 내가 미안할 지경이네.’
어색한 순간도 잠시, 잠잠했던 응급실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어차피 어느 병원이든 감당해야 할 환자라지만 아무도 바라지 않던 사태였다.
심지어 김지훈까지 말이다.
‘하루 정도는 남들과 비슷하게라도 지나가면 안 될까? 온 동네 눈치 보며 당직 서는 것도 힘들다.’
띠띠띠띠띠!
바이탈까지 흔들린 환자를 수술했다.
중환자실에서 치료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수술 방에서 나온 김지훈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병동으로 향했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더욱 창백해 보이는 환자의 안색.
안절부절 불안하기만 한 보호자.
간호사의 손길이 분주했다.
“바이탈 어때요?”
“안정적입니다.”
‘드레인도 괜찮고, 별문제 없네.’
보호자에게 다시 한번 주의 사항을 설명하고 병실을 나오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정순옥 환자가 아들과 함께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환자분,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세요?”
“아직도 병원에 계시네요?”
“오늘 당직인데 환자가 좀 있어서요.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왜 나와 계세요?”
“배는 한결 나아졌는데 갑갑해서요.”
“찬 공기 좋지 않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환자와 아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벌써 새벽 세 시가 넘었다.
천하의 강철 체력도 세월을 따라 녹이 슬었는지 김지훈의 얼굴이 피로로 가득했다. 사정을 모르면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부원장님인데 당직을 매주 서세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 전주 당직하는 날에 수술받으셨죠? 일이 좀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하하하!”
환자와 나눌 말이 아니었다.
공연히 쑥스러워진 김지훈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미 집에 갈 상황이 아니기에 부원장실로 가 몸을 누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수술 딱 세 개 했다.
전주에 비해 절반에 불과했다. 하지만 살벌한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도긴개긴 밤을 새긴 마찬가지였고, 힘들기는 오십 보 백 보였다.
‘다음 주도 이러면 정말 눈빛에 찔려 죽겠네. 어후! 그게 문제가 아니네. 피곤하다. 피곤해.’
부원장이 돼서도 조각 잠을 자야 했다. 당직을 선 다음 날이 외래 진료 날이라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사실 밤을 샐 것이라는 계산하에 당직 날을 바꾸긴 했다.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건 몰라도 한결같긴 했다.
똑! 똑! 똑!
김지훈이 부르르 어깨를 떨었다.
잠깐 졸다 노크 소리에 깜짝 놀랐다.
당직 여파인지 일상적인 업무는 변함이 없는데 지난 며칠 시간만 나면 고개가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외래, 수술, 행정적인 업무가 많았지만 피로가 쌓인 탓이었다.
‘어후! 빨리 주말이 와야 하는데.’
“들어오세요.”
서도진과 민정호였다.
“많이 피곤하신 모양인데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인턴 선생들이 인사하러 왔었습니다. 수술 중이셔서 선생님께 인사 못 드렸습니다.”
“그래? 우리 병원 첫 인턴 선생들이라 보고 싶었는데 미안하네. 어땠어?”
“파릇파릇합니다. 군기도 바짝 들었고요.”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유난한 피로에 다 이유가 있었다. 어느새 이십 대 중반이 파릇파릇하게 보일 나이가 된 지 오래건만 자각하지 못할 뿐이었다.
“우리는 안 그랬나? 교육은?”
“고경철 선생 책임하에 파견 올 전공의들이 맡기로 했습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인턴과 전공의가 교대로 근무하니까 별문제 없을 겁니다.”
“고경철 선생이 또 파견 온다고?”
서도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처남 일도 모르실 정도로 바쁘시긴 했지.’
“고경철 선생은 파견이 아니라 붙박이로 근무한다고 합니다. 이혁민 선생님께서 사정이 있다고 하긴 하셨는데 아무래도 고경철 선생이 자원을 한 것 같습니다. 내년에 종합 병원 완공되면 전문의 시험에 대비할 수도 있고요.”
“배워야 할 파트가 한두 개가 아닌데, 이 자식이 그런 문제는 상의를 해야지. 어휴! 확실한 거야?”
“예. 근무 확정됐습니다.”
병원에 따라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었다.
보다 넓은 경험이 필요한 시기라 아쉬운 한편 다른 병원에 비해 훨씬 힘든 전문 병원 근무를 자청했다는 사실에 고맙기도 했다. 의욕과 열정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고경철이었다.
“알았어. 인턴 선생들과는 정식으로 근무 시작할 때 인사하면 되겠지. 그리고 이런 일은 굳이 얘기 안 해도 되니까 수련 부장이 알아서 해.”
“안 그래도 내일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민 부원장님도 할 말이 있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민정호가 조용히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인턴, 레지던트 증원에 따른 예산이었다.
확실히 세상이 변하긴 했다.
“생각보다 많네요. 파견비는 또 뭐죠?”
“인원이 적어 다른 병원에 비해 근무 여건이 상당히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만족스러울 수 없겠지만 이 정도 대우는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언제나 빠듯한 예산에 골머리를 썩으면서도 모든 직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려 애쓰는 민정호였다. 더구나 이제 막 의사가 된 인턴들의 최대 관심은 월급이 아닐 텐데 신경을 써 줘 고맙기만 했다.
“우리 월급은 안 올려 주나요?”
“깎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입니다.”
“그 정도는 아닐 텐데요.”
“상황이 그렇다는 겁니다. 서명해 주시죠.”
후배들 돈 더 준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기분 좋게 서명을 한 김지훈이 숙소 환경 등 당부의 말을 하려는 순간 민정호가 탁 가로막았다.
“남은 문제는 수련 부장님과 상의해 진행하겠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일찍 퇴근하시죠.”
뭔가 빠졌다.
당장이라도 나갈 것 같았던 서도진과 민정호가 무언의 재촉을 하고 있었다.
“같이 나가자고?”
“뭐 하세요? 병원에 있어야 일만 늘어납니다. 누가 일벌레 아니랄까 봐.”
“뭐? 지금 벌레라고 한 거야?”
“그 말이 아니잖아요? 우리도 퇴근해야 하니까 빨리 옷 갈아입으세요.”
김지훈이 서도진의 타박 속에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부원장실을 나섰다. 상당히 이른 퇴근에 어색할 지경이었지만 자신을 챙겨 주는 마음이 고맙기만 했다.
집에 가는 길에 생각났다.
‘그럼 이만!’이란 소리가 빠졌다.
민정호는 아직도 일에 파묻혀 있을 것이다.
‘오늘 도진이가 당직이었나?’
간만에 예전처럼 서도진에게 타박을 받은 탓인지 선생이라는 말도 빠졌다. 문득 우연히 청평에서 마주쳐 벼르고 별렀던 고경아와의 거사가 무산됐었던 때, 음성에서 함께 죽도록 고생했던 때가 떠올랐다.
‘정말 좋은 후배야.’
즐거운 추억이었다.
***
마음먹고 주말 내내 늘어지게 쉬었다.
가벼운 산책이 활동의 다였다.
희연이와 뒹굴뒹굴 먹고 자며 재충전했다. 덩달아 고경아도 만사 귀찮다며 주말 내내 배달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고, 나름 맛있게 먹었다.
피로가 쌓이긴 쌓인 모양이었다.
월요일 아침까지 내처 잤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때였다.
한껏 기지개를 편 후 힘차게 출근길을 서둘렀다. 가는 내내 오늘부터 근무를 시작하게 되는 인턴과 레지던트의 면면이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느낌도 오늘뿐이겠지? 내년부터 해마다 들어오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덤덤해질 텐데 절대 관심만은 잊지 말자.’
병원에 들어섰다.
종합 병원 공사장 가림막이 무척 높았다.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는 이상 곧 인력과 장비 등 내부를 채울 모든 요소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할 일이 태산이네.’
응급실에 들렀다.
“좋은 아침!”
“지금까지는 그렇죠.”
“한가해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당직이시잖아요.”
할 말이 궁했다.
“흐음! 인턴 선생들이 오는데 편해지지 않을까요?”
“초반에 어떤지 잘 아시잖아요. 방해가 안 되면 다행이게요? 오늘은 정말 환자 부르시면 안 돼요. 아니면 당분간 전공의 선생님들과 함께 근무하게 하든지요.”
계속 헛발질이었다.
미숙한 의사는 숙련된 간호사를 절대 앞설 수 없었다. 배우고 익힌 것과 실전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학교 성적 좋다고 환자를 척척 보는 것도 아니었다.
“준비 충분히 했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근데 인턴 선생들이 안 보이네.”
“아홉 시부터 근무 시작이에요. 하루 근무하고 하루 쉰다는데 일찍 오고 싶겠어요?”
두 명이나 세 명이 함께 근무하는 다른 병원에 비해 격무가 분명했다. 더구나 전공의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각자 업무가 있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초반이니까 많이 도와줘요. 전공의 선생들과 연락이 안 되면 수련 부장님이나 내게 연락해도 됩니다.”
단단히 당부하고 병동으로 향했다.
얼핏 낯익으면서도 낯선 얼굴을 본 것 같았지만 그런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차트를 정리한 채 회진을 기다리고 있는 전공의 두 명을 보는 순간 싹 잊었다.
인턴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근무야?”
“예.”
일 년 차 목소리에 긴장이 가득했다.
환자 명단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래! 이거야. 이게 바로 회진이지. 이왕 이렇게 된 이상 경철이 너도 후회하지 않게 해 주마.’
김지훈의 입이 쭉 찢어졌다.
근 이 년 만에 느끼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