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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80화 (1,280/1,329)

6화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전공의, 수련의 근무 인원이 전문 병원의 요구대로 확실하게 결정됐다. 한 명이었을 때는 별문제가 안 돼도 여섯 명이나 되는 이상 제대로 된 숙소가 필요했다.

한동안 별관이 꽤 복작거렸다.

생각과 달리 공간 여유가 많지 않아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했고, 필요한 가구와 집기를 들이는 일 역시 사람 손이 많이 필요한 탓이었다.

김지훈이 서도진과 함께 수련의 숙소를 찾았다.

‘우리 때는 침대하고 옷장이 다였는데 없는 게 없네. 힘들게 일하는데 이 정도는 챙겨 줘야지.’

“어때?”

“꽤 깔끔하네요. 우리 때 생각하면 모든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했는데 관리해야 할 일이 많을까요?”

“후배들 앞에서 우리 때, 그런 말 하지 마라. 가치관이나 기준이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 줘야 욕 안 먹는다. 어쨌든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근무 인원이 엄청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수련 부장으로서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요구 사항이 많으면 곤란한데요.”

“젊은 세대하고 소통하고 좋지 뭘 그래? 난 여기서 끝이다. 앞으로 수련의, 전공의와 관계된 일은 알아서 하세요. 예산이 필요하면 민 부원장 찾아가고.”

서도진이 콧등을 찡그렸다.

“민 부원장! 생각만 해도 왠지 빡빡합니다. 돈 얘기는 적성에 맞지도 않고요.”

“어라? 난 적성에 맞는 것처럼 보여?”

종합 병원 진료가 시작되는 순간 환자 치료는 물론 행정적인 일까지 폭주할 것이다. 한 명 한 명 모두들 의료와 관련된 행정 업무를 맡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 부담스럽더라도 자신의 몫을 충실히 이행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신입 펠로우 선발이 완료됐다.

전문 병원의 위상이 상당해졌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 해에 배출되는 일반외과 전문의 숫자가 상당히 줄었음에도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간담췌, 간 이식, 복강경 등 자신이 가고자 하는 분야를 확고하게 결정한 상태로 지원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삼 년을 추가로 투자하는 일인 이상 수많은 고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온 사실만으로도 해당 분야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지표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갈수록 펠로우 지원 선생들의 수준이 높아지네. 솔직히 이번은 누구를 선발해야 할지 정말 힘들었어. 마음 같아서는 다 뽑고 싶네.”

“형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이에요?”

“김 부원장은 안 그래? 라파로 쪽 최신 경향까지 꿰뚫고 있어서 면접 내내 땀이 다 났어. 김 부원장이 가장 잘 알겠지만 이준영 선생님도 정말 흐뭇해하셨잖아?”

왜 아닐까?

제대로 된 선배라면 능력 있고, 잘난 후배를 반기며 적극적으로 끌어 주어야 마땅했다. 물론 자만이라는 놈이 스며 있는지 잘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바람이 이뤄졌다.

간 이식 파트 이혁원.

복강경 파트 나종진.

간 질환 및 공여자 파트 오만석.

세 명 모두 정식으로 교수가 됐다.

김지훈이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과 함께 커 온 후배들이 군대까지 무려 십이 년에 걸친 힘든 과정을 훌륭하게 마치고 마침내 같은 자리에 섰다. 감개무량할 뿐이었다.

‘야! 이거 말로 표현하기도 힘드네. 내가 교수가 됐을 때 스승님의 마음이 이랬을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대학 병원에 근무하려면 전문의만 돼도 충분한 시절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제야 일반외과 의사로서 본격적인 길에 들어섰는지도 몰랐다. 전임 강사 신분이기에 정년이 보장되지 않지만 임상 교수로서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다면 부교수, 정교수까지 쭉쭉 내달리게 될 것이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교수실은 배정받았어?”

“방이 모자라서 올해는 우리 모두 방 하나를 같이 써야 합니다. 진료 시간과 수술하는 날은 과장님과 상의해 결정했습니다.”

“잘했네. 다들 알겠지만 어떤 일이든 초반이 가장 중요해. 너무 들떴다가 자칫 환자 치료에 문제가 생기면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어. 즐길 건 즐겨야 하겠지만 절대 긴장 풀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일일이 악수를 하며 축하하던 김지훈이 돌연 눈을 빛냈다. 제각각 분야가 모두 다르다 해도 같은 신분인 만큼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경쟁이 필요했다.

“종합 병원 완공 후 안정되면 우리도 슬슬 유학 프로그램을 가동할 거야. 한 번에 다 갈 수는 없고, 아마 가장 적합한 사람을 먼저 보내겠지?”

의료 선진국을 상당 부분 따라잡았지만 의료 전반에 걸쳐 부족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히 수준이 비슷하기만 해도 배울 것이 있는 법이었다. 더불어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배우는 일이야말로 개인의 발전을 위한 지름길일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세 명의 신임 교수들의 눈이 번쩍거렸다.

‘유학이라!’

손일석과 이경석이 먼저 가야 하겠지만 자신이 속한 파트의 자부심이 걸린 일이기도 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자만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노력하는 것뿐이었다.

“자, 그럼! 열심히 해 보자.”

“예.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도 많은 일이 남았지만 이로써 당장 해결해야 할 굵직한 일을 모두 끝냈다. 사람 뽑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으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새로운 펠로우들의 근무 시작이 이 주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에 맞춰 파견 나온 인턴과 전공의도 근무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전문 병원에 은근한 기대가 감돌았다.

새 얼굴, 특히 전문 병원의 운영 체계상 귀하기만 한 후배들의 등장이 주는 설렘이었다. 변함없는 일상에 상당한 변화를 불어넣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 막 의사가 된 까마득한 후배들이고, 해마다 경험했던 일이건만 묘한 흥분까지 느껴졌다. 당분간이라 해도 어깨에 걸린 짐이 한결 가벼워진 덕분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휴가 갔다 온 여파가 지금까지 있다니 계산이 잘못된 거 아니야? 후우! 아니구나. 내가 일 때문에 당직을 자주 바꾼 탓이구나.’

이 주마다 한 번씩 섰던 당직인데 앞으로 삼 주 동안 매주 한 번씩 당직을 서야 했다. 무슨 일이든 편하다 보면 자연히 꾀가 나는 법이고, 당직 역시 갑자기 많아졌다는 느낌이 들면 더 힘들기 마련이었다.

따르르르릉!

김지훈이 화들짝 놀랐다.

이제 막 오후 회진을 돌았는데 어김없었다.

오늘은 제발 살살 가기를 바라며 응급실로 향했다. 간호사들의 긴장된 눈초리, 마치 밤을 새기 전에 미리 몸이라도 푸는 것처럼 이혁원과 모찬우가 어깨를 돌리고 있었다.

“경철이는?”

“오프입니다.”

“환자는?”

“증상이나 병력으로는 분명 복막염이 의심이 되는데 원인 질환이 없고, 방사선 소견상 프리 에어(Free Air)가 보이지 않아 위장관 천공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프리 에어(Free Air)!

주로 위궤양이나 사고로 인해 위가 파열된 경우 내부 공기가 새어 나와 비정상적인 위치에서 관찰되는 공기 음영을 말한다.

전공의 때는 무척 흔했지만 위궤양 치료가 보편화되면서 이로 인한 복막염은 상당히 드물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배제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었다.

“사진부터 본 후 환자 보자.”

55세 여자 환자였다.

만성 요통으로 오랜 기간 진통제를 복용한 것 이외에는 특이 사항이 없었다. 김지훈의 눈에도 프리 에어가 보이지 않았지만 진찰을 하면 할수록 복막염이 강하게 의심됐다.

‘진통제 때문에 위궤양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천공이 아니라면 뭐가 있을까?’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복통이 너무 심해 환자와는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라 남편으로 보이는 보호자에게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하게 묻고, 들었다.

“허리가 아픈 것 이외에는 건강했던 분이었네요. 복통은 분명 점심때 갑자기 시작됐고요?”

“예. 평소 속이 쓰리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이렇게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인데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겁니까?”

“일단 복막염이 강력하게 의심됩니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만일 위장관 어딘가 터졌다면 수술 이외에 치료 방법이 없기 때문에 조금 더 검사를 해 봐야겠습니다.”

보호자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수술까지 거론하면서 애매모호한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심지어 부원장이라는 의사마저 난감한 표정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언제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무척 불안한 상태에서도 침착하게 의료진의 말을 따랐다.

“간염이 심해 갑자기 복수가 차면 비슷한 증상을 보일 수 있어. 간수치나 간염 검사는 괜찮아?”

“깨끗합니다.”

“CT에서도 별게 안 보이고, 설사나 구토조차 없는 장염이 이렇게 심한 증상을 유발할 수는 없는데 도대체 뭐지?”

“내원 후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는데 진단적 라파로는 어떨까요?”

“전신 마취만으로도 보호자와 환자는 겁을 먹어.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야 가능해. 일단 무엇이 원인으로 추정되는지 말을 할 수 있어야 돼.”

답이 안 보였다.

혹시 변화가 있을지 몰라 방사선 촬영을 재차 시행했지만 첫 검사와 동일한 소견이었다. 반면 환자의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나무처럼 딱딱한 배에 심한 반사통,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극심한 복통은 분명 복막염을 말하고 있는데 뭐지? 대동맥 박리나 장 동맥 폐쇄보다 더 희귀한 질환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질환이 없었다.

그때 문득 예전 경험이 떠올랐다.

교과서적인 진단 방법이 아니었다. 게다가 진단 기기가 발전하고, 경험이 쌓이면서 아예 머릿속에서 지웠다. 무엇보다 복막염 자체가 드물어졌고, 진단과 치료가 어려운 일도 아니기에 쓸모를 잃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공기가 충분히 새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작은 천공이라면 시간을 끌어도 진단을 할 수가 없다. 지금은 위경련으로 막힌 것과 비슷한 상태일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 된다.’

새것이라고 무조건 좋을 리 없는 것처럼 때론 옛날 방식이 유용한 때가 있다.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시도해 볼 가치가 있었다. 고통스러운 처치 중 하나인 코 줄도 이미 끼고 있는 상황이었다.

“보호자분, 복막염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데도 불구하고 원인 질환을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검사만 더 해 보겠습니다.”

“어떤 검사입니까?”

“여러 요인을 모두 고려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원인은 위 천공입니다. 코 줄을 통해 위로 대략 3~400cc 정도 공기를 주입할 겁니다. 문제가 없다면 검사상 변화가 없겠지만, 터진 부분이 있다면 보다 쉽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저렇게 아파하는데 위에 공기를 넣는다고요? 그러다 멀쩡한 위가 터지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평소 먹는 양을 생각할 때 검사 중 위가 손상될 위험은 조금도 없습니다. 일부러 주입한 공기는 다시 빼면 되고요.”

시대를 생각하면 무식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환자에게 무엇인가 처치를 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호자가 반대할 수도 있지만 통상적인 진단 방법이 아니기에 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보호자가 잠시 고민했다.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김지훈이 나직한 숨을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순순히 동의하다니, 보호자분을 봐서라도 빨리 진단을 내려야 한다.’

검사만 자꾸 해 대며 어떤 치료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상당한 시간까지 흘렀다. 짜증 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보호자가 고마울 뿐이었다.

“모찬우 선생, 에어 넣어.”

50cc 주사기를 코 줄에 연결했다.

모두 여덟 번에 걸쳐 공기를 주입했다.

가뜩이나 아픈 배에 압박까지 받은 환자가 더욱 심한 고통을 호소했다.

“환자분, 힘드신 거 잘 압니다. 잠시만 참아 주세요. 절대 트림하시면 안 됩니다.”

김지훈이 직접 방사선실로 갔다.

자세를 바꿔 가며 단순 촬영을 시행한 후 미세한 유출까지 잡아내기 위해 CT 촬영을 막 준비할 때 트림 소리가 들렸다.

‘어후! 더 이상은 의미 없네.’

“환자분, 잘 참으셨습니다.”

“죄… 죄송해요.”

“이렇게 아프신데 진단도 제대로 못 내려 저희가 죄송합니다. 일단 응급실로 다시 모시겠습니다.”

사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불과 오 분도 안 되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사진이 나왔다.

김지훈, 이혁원, 모찬우의 눈길이 일제히 한 부분에 집중됐다. 위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좌측 횡격막 하부에 초승달처럼 고이는 소견을 찾아야 했다.

“안 보이네. 다음 사진.”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과 진단을 못 내릴 경우 환자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난감함만이 뇌리를 스쳤다.

마지막 사진이 남았다.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모찬우가 소리쳤다.

“떴습니다.”

내내 의심했던 위 천공이 확실했다.

장기간 진통제 복용으로 인해 발생한 위궤양이 터졌을 것이다. 무척 드문 경우인 데다 천공 부위 크기가 작아 미처 공기가 새어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수술을 피할 수 없는 환자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의사에겐 천만다행이었다. 아니, 환자 역시 운이 좋았다. 어느 병원에서도 진단이 어려웠을 테고, 수술이 늦었다면 목숨을 위협하고도 남을 질환이기 때문이었다.

“수술 준비합시다.”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

환자가 내원한 지 세 시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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