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소아 외과 문제가 아니었다.
(바쁘신데 전화까지 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내일 저녁에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일인데?”
(와이프가 선생님을 뵈려고 반차를 냈습니다.)
“오하석 선생이?”
딱 감이 왔다.
서울 병원에서 근무하는 오하석이 특별한 일 없이 전문 병원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유방이나 갑상샘 파트가 아예 없는 데다 이미 여기저기에 의사 모집 공고 계획을 알린 마당이었다.
김지훈이 즉답을 하지 못했다.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서울 병원, 특히 이혁민 교수의 얼굴이 아른거려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사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속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았어. 시간 비워 놓을게.”
기대 반, 난감함 반이었다.
사실 어떤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가 와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실권을 가진 과장급 정도의 의사들 대부분 한 다리 걸치면 다 아는 사이인 데다 선후배로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좋게 말하면 일반외과 자리를 늘리는 거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인재를 빼 온다는 면도 무시할 수가 없네. 이혁민 선생님께 허락을 받았을까? 흐음! 어쨌든 당사자 생각이 가장 중요하겠지.’
새록새록 오하석과 관련된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일반외과를 전공한 여의사가 흔하지 않은 상황인데 상당히 오래전에 지원을 했다. 모두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체력 강한 사람조차 버티기 어려운 전공의 수련을 당차게 마쳤다.
그 시절 압권은 역시 찰랑이는 단발머리였다.
격무에 시달려 목욕은커녕 머리도 못 감아 떡진 머리가 예사였는데 언제 감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만큼 시간을 빼앗겼을 테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어렵고 불편했을 텐데 참 열심히 했어.’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특혜나 배려도 받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자기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인정받았다. 결국 이혁민 교수의 총애 속에 유방 및 갑상샘 파트를 세부 전공으로 택했다.
유일한 특혜는 군대 삼 년이었다.
전문의가 되자마자 바로 펠로우 근무를 했고, 송진우와 같은 해에 마치게 된다. 사람에겐 운때라는 것이 있는데 종합 병원 완공과 시기까지 딱 맞았다.
게다가 유방은 당연한 일이고, 갑상샘 질환 역시 대부분 여성 환자였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 여의사가 주도하는 편이 훨씬 유리한 면이 많았다.
하기에 함께하고 싶은 인재였다.
손일석은 전적으로 환영했다.
“이혁민 선생님은 물론 오하석 선생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잖아? 이미 다 얘기 된 거 아니겠어?”
“우리 의향만 확인해 보려고 할 수도 있지.”
“아니야. 걱정 붙들어 매. 유방하고 갑상샘 파트를 분리하려고 펠로우 인원을 늘린 지 오래됐어. 물론 오하석 선생이 아깝긴 하시겠지만 본인이 병원을 옮기겠다는데 뭘 어쩌시겠어? 어쩌면 아끼는 선생이 파트 하나 온전히 맡을 수 있다고 도리어 환영하실 것 같지 않아?”
“그럴까?”
“게다가 현수가 있잖아. 제자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며 이사장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욕심을 더 부리시면 안 되지. 우리 스승님이나 송재덕 선생님을 생각해 봐. 다 큰 자식 출가시키는 게 당연한 일 아니야?”
그럴 법했다.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내심 이혁민 교수에게 상황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섣부른 판단이라면 자칫 오해만 부를 수 있었다. 꾹꾹 눌러 참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요즘처럼 시간 빨리 가는 때도 없었다.
수술하고, 진료하고, 민정호 만난 후 회의 자리 한두 개 참석했을 뿐인데 어느새 약속 시간이 됐다.
오하석은 역시 관심을 집중시키고도 남을 의사였다. 비공식적이지만 첫 번째 지원자란 사실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손일석과 이경석이 함께했다.
“경석이 형,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 만나는 게 좋지 않겠어요?”
“별일 아니면 얼굴만 보고 갈게. 별일이면 끝까지 오하석 선생 생각을 들어 봐야지.”
똑똑똑!
무척 반가운 얼굴이건만 찰랑이는 단발머리와 너무 익숙해진 발간 얼굴부터 눈에 확 들어왔다. 여러 면에서 상반된 성격을 가졌지만 묘하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안녕하세요.”
“잘 왔어. 앉아. 하나도 안 변했다.”
“저도 나이 먹었어요. 그런데 먼저 기다리고 계시다니 오늘은 수술 없으셨어요?”
“진료 날이야. 당직도 아니고.”
김지훈이 직접 커피를 타 내오자 오하석의 눈이 반짝였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부원장의 태도가 아니었다. 전문 병원 설립 이후 제대로 본 적이 없었지만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은 사람은 김지훈이었다.
송진우 말로는 평소에도 정말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서로 없는 시간을 내야 해서 다소 걱정했는데 공포의 일복을 피한 것이 다행이었다.
‘예전보다 깔끔해지긴 하셨네.’
오래간만에 후배 만나면 으레 옛날 얘기 나오기 마련이었다. 덩달아 송진우 전공의 시절까지 소환돼 잠시 환담이 오고 갔다.
김지훈이 곧 방문 이유를 물었다.
“옛날 기억 나 즐겁긴 한데 시간이 없네. 빨리 얘기하자. 오늘 우리를 만나고자 한 이유가 뭐야?”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유방 파트에 정식으로 지원해도 되는지 미리 여쭤보러 왔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지원할 수 있지. 솔직히 그렇게 해 준다면 우리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야. 단, 파트마다 교수를 여러 명 뽑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쟁은 피할 수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요? 선생님들에게 배웠다는 인연 하나로 들어왔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요. 실력으로만 평가받겠습니다.”
딱 부러지는 성격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유방 파트만?”
“갑상샘 파트와 분리되는 게 요즘 추세잖아요. 사실 갑상샘 쪽도 기구를 이용한 수술이 많아져 병행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환자가 대부분 여성이라는 공통점도 거의 의미가 없고요.”
“유방 파트에만 전념한다는 소리지?”
“예.”
두 개의 분야를 묶어 한 파트에서 두 명의 교수를 뽑는 것에 비해 수술을 분리해 각각 선발하는 경우가 어쩌면 경쟁이 더 치열해질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혹시 이혁민 선생님은 알고 계셔?”
“병원 옮긴다는 말을 하기가 정말 힘들긴 했지만 미리 말씀드렸어요. 제 의사를 충분히 존중해 주셨고, 따끔한 말씀까지 들었어요.”
“무슨 말?”
“실력 부족해서 떨어지면 선생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거니까 남은 기간 바짝 정신 차려서 일하라고요. 만일 전문 병원에서 일하게 되면 서울 병원 이상의 유방 파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고요.”
‘자기 역할 못하는 의사를 보고 계실 분이 아니지. 아끼면 아낄수록 더 무섭게 몰아붙일 텐데 얼마 안 가 기미 생기겠네.’
엄하기만 한 이혁민 교수가 아니었다.
비록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일신의 편안함보다 제자의 앞날을 더 걱정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김지훈이 한시름 놓았다.
‘나중에 전화 한 통 드려야겠네.’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때가 되면 무수하게 반복해야 할 말이었다.
“다 좋은데 무엇보다 우리 병원 교수로 지원하게 된 동기나 각오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어? 이미 기반이 잡힌 서울 병원이 훨씬 나을 수도 있는데 왜 오려는 거야?”
오하석이 힐끔 송진우를 보았다.
어디에 있으나 의사로서의 목표가 달라질 수는 없었다. 교수라는 이름 하나에 만족하는 사람이면 제자리에 안주할 테지만, 그 이상의 목표를 가졌다면 주어진 기회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송진우를 보며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애초 전문 병원 펠로우를 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넘어서고 싶은 써전인 김지훈에게 배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관심 분야까지 같아 간 이식 파트를 전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뜻밖에도 소아 외과를 선택했다.
자신의 선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는 시선과 애정이 남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김지훈이 기회를 준 덕이 컸다. 절대 나 몰라라 할 김지훈이 아니었다. 전문 병원 역시 송진우를 최고의 소아 외과 의사로 만들기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때문인지 의사로서의 목표가 더욱 확고해졌다.
감히 말할 수 있었다.
“유방 파트에 관한 한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도 이혁민 선생님께 배워야 할 것이 많지만 전문 병원이야말로 제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최적의 병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병원이?”
“결코 저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목표라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길을 열어 주는 선생님들이 계셔야 하기 때문이에요. 이혁민 선생님도 그래서 제게 기회를 주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색한 헛기침이 터졌다.
과분한 말이었다.
한편으로 스승들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간다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경석이 가장 절실하게 느낄지도 몰랐다.
손일석이 재빨리 분위기를 수습했다.
“기분은 좋은데 이혁민 선생님 따라갈 써전이 없다. 우리도 배우는 중이니까 열심히 배워야 돼. 그리고 우리 중에 유방 파트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한 거지?”
“당연히 알죠.”
“문제가 생기면 누구하고 상의할래?”
“제가 전공의 때 선생님들께서 모든 수술의 기본은 다 똑같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다뤄야 하는 장기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모든 파트가 정비된 과와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과의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상의하고 도와야겠지만 해당 파트 교수의 최종적인 권한이자 책임이기도 한 부분이었다. 겸사겸사 교수로 임용될 경우 파트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까지 물었다.
본의 아니게 면접 아닌 면접이 진행됐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아쉬울 때가 바로 자리를 끝낼 시간이었다. 송진우와 오하석 모두 교수로 임용되면 이사 오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끝냈다.
이경석이 흐뭇하게 웃었다.
“느낌이 좋네. 오하석 선생은 어느 병원이나 붙잡고 싶을 선생일 텐데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지원할 것 같아.”
“저도 감이 좋네요.”
“오하석 선생하고 얘기하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우리보다 선배인 분들이 오시면 면접하기 꽤 난처할 것 같아. 다 진충기 선생님 같지는 않을 거 아니야?”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엉뚱한 문제로 면접하는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정도면 애초 지원할 자격이나 이유가 없겠죠. 솔직히 경석이 형이 현 과장인데 선배 되는 분들이 오시겠어요? 꼭 모셔야 할 분이 있다면 초빙을 해야죠. 난 그런 문제보다 우리를 바짝 긴장시킬 수 있는 선생님이 없을까 봐 그게 더 걱정입니다.”
손일석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잘못 먹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툭하면 전쟁 통인데 여기서 어떻게 더 긴장을 해? 그러다 의사, 간호사 할 거 없이 다 잡아먹는다. 욕심이야.”
“일 늘어나라는 게 아니라 실력 뛰어난 선생님들이 오기를 바란다는 말이잖아?”
이경석의 눈매까지 가늘어졌다.
“앞으로 펠로우부터 전공의, 수련의까지 확 늘어 가뜩이나 민 부원장에게 압박을 받을 판인데 액면 그대로 해석해도 되겠지? 순수하게 해석해서 동조를 한다면 이참에 스승님들을 모두 모셔 오는 건 어때?”
“서울 병원 무너집니다.”
“우리 때문에 허리가 약해지긴 했지. 어쨌든 몸 말고 머리로만 긴장하자.”
김지훈이 아무 말도 못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상당히 강해야 하는 써전이지만 어느 직종이든 평균이라는 것이 있다. 탄성 좋은 대나무도 과도하게 꺾으면 부러지듯 적당한 긴장과 부담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하긴 젊은 날의 우리가 아니긴 하지.’
욕심일 수도 있었다.
반면 김지훈의 바람이기도 했다.
어느 조직이든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정체되기 마련이었다. 모두가 안주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는 곧 퇴보의 다른 말이었다. 무한 경쟁이 결코 바람직할 수 없지만 경쟁 자체가 주는 장점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학 병원은 여타 종합 병원이나 전문 병원과 많은 면에서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환자들이 찾는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에 항상 최고의 수준을 유지해야 했다.
넉넉한 재원, 최신 설비와 장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구성원들의 수준이 높아야 담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수혈돼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야 한 단계 더 발전할 토대가 될 것이다.
손일석이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우리 김 부원장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 말만 앞세우며 행동하지 않는 사람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를 믿고 맡기면 돼.”
“손 교수 말이 맞아. 지금까지 자격 안 되는 사람 잘 걸러 왔고, 능력과 열정을 갖춘 사람은 모두 함께하고 있잖아. 우리 모두 잘해 낼 거야.”
김지훈이 웃었다.
“맞네요. 내가 너무 초조했던 모양이에요.”
“에휴! 충전하라고 휴가까지 보냈는데 어째 변한 게 없어. 그러니까 구미까지 가서 수술이나 하고 있지.”
“헉! 알고 있었어요?”
“우리가 바보야?”
손일석에게도 구미 병원과 여행에 대해 대충 둘러댔는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모양이었다. 누구 한 명 입 하나 벙긋하지 않아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동료의 힘이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