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생각을 정리한 김지훈이 입을 열었다.
“우리 병원 규모상 자체 배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테고, 파견 형식이지?”
“이미 일하기 힘든 병원으로 소문났어. 일 년 내내 근무하라고 하면 도망가는 인턴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당연하지. 전공의도 안심하기 힘들어.”
김지훈도 십분 인정했다.
힘든 직장 좋아하는 사람 없는 법이었다. 전공을 선택하기 전에 각 과의 특성과 업무를 배워야 할 인턴의 경우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요구하면 도리어 깎인다.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칠 수도 없지. 무엇보다 우리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해. 인력으로 보지 말고 가르쳐야 할 후배로만 봐야 한다.’
결론을 내렸다.
“내 생각에는 인턴은 네 명, 내과와 외과에 전공의 두 명, 마취과에 한 명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
“인턴을 네 명이나?”
“인원이 부족하다고 원칙 없이 배치해서 부려 먹을 생각 없다. 응급실, 중환자실, 내과, 외과 이렇게 돌아야 알차게 배우지 않겠어? 총인원이 너무 적으면 오히려 일할 의욕까지 잃을 수 있잖아.”
힘든 곳일수록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네 명이어도 서로 얼굴 보기 힘들 판에 그 이하면 혼자 근무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웬만한 사람은 일찌감치 도망가고도 남았다.
경험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손일석이 난색을 표했다.
“김 부원장, 네 명이 아니라 열 명이어도 그렇게 돌면 인턴들 다 죽어.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을 혼자 어떻게 감당해? 근무하는 파트를 줄여야 하지 않겠어? 우리 과와 내과는 빼고 두 명씩 돌게 하자.”
“나도 같은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렇게 되면 정말 일만 하다 끝날지 몰라.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근무 내내 옆에서 가르쳐야 할 사람이 없잖아? 휴식 문제는 두 명이 근무하는 것처럼 정확하게 오프 주면 돼.”
“없는 날은 없는 대로 끌고 나간다?”
“어떤 식으로 오프를 줘도 힘들겠지만 전공의들과 번갈아 가면 되지 않겠어. 우리 역시 지금하고 똑같이 일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야.”
“흐음! 전공의들과 묶으면 충분히 돌아갈 것 같기도 하네. 경석이 형, 어떻게 생각해요?”
“운용의 묘라는 말이 있잖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대처하면 될 거야. 근데 우리 이사장님 표정이 썩 밝지 않네.”
정확하게 보았다.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을 요구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즐거움이 넘쳐야 할 날에, 그것도 하필이면 김지훈 앞에서 말을 꺼낸 것이 죄라면 죄였다.
“김 부원장, 도합 아홉 명이야. 지금은 달랑 경철이 한 명인데 너무 많이 요구하는 거 아니야? 전문 병원은 티오 자체가 없다는 현실을 고려해야 돼.”
“모든 후배가 경철이와 똑같은 생각으로 근무할까? 어설프게 오면 서로 곤란해져. 우리 과 전공의가 줄어든 이후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잘 알고 있잖아?”
보이는 현상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워야 하는 사람이나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인원이 너무 적으면 아예 배우지도 못하는 파트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교수들 역시 심도 있게 가르치지 못해 필요한 인재를 키워 내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었다.
이런 악순환을 자초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봐. 경석이 형 말대로 운용의 묘라는 게 있잖아?”
“운용의 묘라는 것이 결국 우리 기준이잖아?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후배들이 제대로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내가 언급한 네 개 파트는 어떤 병원에서도 필수 중의 필수야.”
손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이탈 하나는 확실하게 가르칠 수 있겠네. 이건 필수 정도가 아니라 의사의 기본이기도 하고 말이야. 신 이사장, 결국 수련의 목표는 훌륭한 인재를 길러 내는 거 아니야? 우리 병원 능력을 믿어 봐.”
“달리 말하면 다른 병원 역시 같은 목표를 갖고 있고, 가능하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아.”
“에헤! 집중에 차이가 있지. 인턴 때 빡세게 근무한 선생들이 전공의 때도 훨훨 난다는 사실 잘 알면서 왜 이래? 나하고 김 부원장이 산증인이야. 우리 정말 힘들게 돌았다.”
모든 인턴의 일 년 일정이 같을 수 없었다.
아무리 공평하게 조정해도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힘든 과를 많이 돌아야 하고, 누군가는 오프가 충만한 과를 연속으로 돌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의학은 기본적으로 경험 학문이었다. 때문에 경험이 많고, 적음에 따라 신입 전공의 간의 능력 차이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가라 불리는 의사들의 연배가 상당히 높은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전문 병원은 어떤 병원보다 많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다양한 분야를 접하지 못하고, 엄청나게 힘들다는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이경석도 십분 동의했다.
“삼 개월 단위로 파견을 해야 할 테니까 무리한 일정이 아니야. 어차피 다른 병원에서도 그렇게 돌아야 하는 인턴들이 있잖아. 어쨌든 오는 후배들마다 확실한 의사 만들어 보낼 테니까 힘 좀 써. 응급실이나 중환자실 근무에 숙련된다면 다른 병원에도 결코 손해가 아닐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인턴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중요해지잖아. 진충기 선생님,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수련 중후반이 되면 기본적인 처치를 맡겨야 하는데, 그때까지 미숙한 인턴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신현수가 안경을 또 고쳐 썼다.
여러 어려움을 토로하며 합의점을 찾으려 했지만 모두들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후우! 그럼 인턴 네 명에 내과, 외과, 마취과 모두 포함해 전공의 다섯 명이면 된다는 소리지?”
“아쉽기는 하지만 현재 우리 병원 상황과 규모, 능력을 고려할 때 가장 적정한 인원이야. 신 이사장, 부탁할게. 어려워도 다른 병원 선생님들을 잘 설득해 줘.”
“쉽지 않아. 자칫 욕먹을 수도 있어.”
“우리도 잘 알지.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 아니야. 이왕 파견할 거면 우리 병원 규모와 능력에 맞게 보내는 게 좋지 않겠어?”
“후우! 곤란하네.”
신현수의 어깨가 처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이를 악물고 자신을 유지했던 신현수였다.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다니, 젊은 나이에 이사장직을 맡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사인방으로 불릴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그렇다고 양보하기도 힘든 문제였다.
김지훈은 눈가만 찡그렸다.
‘괜히 미안해지네.’
손일석과 이경석은 먼 산만 바라보았고, 전문 병원 편을 들 수밖에 없는 진충기 교수 역시 연신 어색한 기침을 터트렸다.
깊은 한숨이 한 번 더 터졌다.
신현수가 이를 악물었다.
“알았어. 이 정도 인원을 요구할지 몰랐지만 내가 먼저 뱉은 말이니까 책임질게. 단, 원하는 대로 안 돼도 원망하지 마.”
“어후! 고마워. 우리도 상황에 맞춰 확실하게 끌어갈 테니까 최선만 다해 줘.”
“그 전에 전문 병원이 감수해야 할 일이 있어. 민 부원장님,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인턴과 레지던트 월급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홉 명이나 되는 이상 예산 편성 때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김지훈 시절 월급을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전문 병원의 규모가 커져 전체 예산 중 일부분이라고 해도 일 년에 몇억 이상 소요될 것이다. 어쩌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다.
민정호에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분기마다 재단으로 보내야 하는 돈은 변함이 없는 겁니까? 전출금 규모가 작지 않습니다.”
“그 돈 모두 종합 병원 건립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고요. 어렵더라도 자체 예산을 쪼개야 합니다.”
민정호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난감할 것이다.
김지훈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만일 여기서 문제 제기라도 한다면 증원은 물 건너갈 것이다. 뜻하지 않게 잡은 기회라지만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전문 병원의 위상과도 관련이 있었다. 수련 병원과 비수련 병원의 차이는 의사만이 아니라 환자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이경석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민 부원장, 과장 입장에서 펠로우만이 아니라 인턴과 레지던트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많이 느끼고 있어. 어렵겠지만 예산을 확보해 줬으면 해.”
“매출 중 몇억이 아니라 순수익 몇억이 필요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소아 외과 수술이 점점 더 활성화될 테고, 인원이 늘면 그만큼 수술도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겠어? 돈으로 따지기 힘들지만 한 명 한 명 모두 그만한 값어치를 할 거야.”
“과장님 말씀이 맞아요. 의사가 된 이상 모두 다 고급 인력 아닙니까? 까짓것 내가 혈관 수술 더 하지, 뭐. 후배들 모셔 오는 일인데 뭘 못하겠어? 김 부원장, 진충기 선생님, 안 그래요?”
“그… 그렇지.”
김지훈의 얼굴이 떨떠름했다.
여기서 얼마나 더 일해야 할까?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손일석까지 민정호를 설득했다. 이미 분위기는 정해졌고, 예산 관리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아는 김지훈 역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죽진 않을 것이다.
결국 민정호도 동의했다.
“종합 병원 완공 때까지 앞으로 일 년이면 되는 일이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신 선생님들 말씀 결코 잊지 않습니다.”
“민 부원장, 걱정하지 마. 신 이사장, 민 부원장까지 동의했으니까 이제 남은 문제는 없는 거지?”
이경석이 무척 적극적이었다.
이로써 모든 난관이 해결됐다.
재단과 각 병원 책임자들의 승인만 떨어지면 아홉 명의 수련의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전문 병원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힘이 될 것이다.
그때 들리지 않는 한숨이 터졌다.
안도의 기운이 역력했다.
‘후우! 재단 예산이 빠듯해 민 부원장이 최대 걸림돌이었는데 잘 해결됐네. 그럼 슬슬 마무리 지어 볼까?’
여전히 얼굴이 굳은 신현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지훈과 민정호에게 신신당부하며 또 한 번 자신의 어려움을 강조했다.
“알았어. 예산은 걱정하지 말고 인원 확보에만 신경 써 줘. 다 같이 잘되자고 추진하는 일이잖아.”
“그래서 더 힘들다.”
“고마워. 부탁할게.”
마지막까지 서로의 입장을 말하며 자리를 끝냈다. 가장 어려운 일을 남겨 둔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쓰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의미심장했다.
상당히 편안해 보여 이미 인턴과 레지던트 파견을 결정하고 온 사람처럼 보였다. 어쩌면 김지훈보다 더 빡빡한 민정호와 예산 문제를 손 안 대고 해결했을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지훈 가족과 한 차에 탄 손일석이 이마를 긁적이며 눈가를 좁혔다.
“김 부원장, 느낌이 왜 이렇게 안 좋지?”
“무슨 소리야?”
“분명 우리와 현수 모두 각각 원하는 것을 얻은 상황인데 한 방 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뻐근해. 왠지 모르게 당한 느낌이야.”
“가장 냉철한 사람인 민 부원장까지 순순히 동의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우리 사이에 당할 일이 뭐가 있어?”
“아니야. 이사장 된 지 꽤 됐잖아. 내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단수가 됐을지도 몰라.”
뒤늦은 찜찜함이었다.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웃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냥 넘어가자. 다른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해결했잖아. 어차피 다 우리 병원을 위한 일인데 서로 곤란하게 만들며, 밀고 당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좋다.”
그 시간.
민정호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 마음 놓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해도 될 텐데 입꼬리를 마는 정도가 최선인 모양이었다.
‘이사장님도 이제 입장 난처한 일을 잘 처리하시네. 지금쯤 부원장님과 손 교수님도 알아챘을 텐데 뭐라고 하실까? 알고도 넘어가자고 하시겠지.’
좋은 사람이 참 많았다.
통보만 해도 될 권한을 가진 신현수는 절대 이사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다. 차갑고 예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동료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동료들은 어떨까?
직장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사람 많지 않다. 환자라는 특수한 매개가 있긴 해도 병원 역시 월급 받는 직장이 분명했고, 강요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달랐다.
개인적인 가치관과 생각이 모두 다를 텐데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하고 행동했다.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않기에 존경받고도 남았다.
‘각자 개성이 뚜렷해 저렇게 잘 어울리기도 힘든데 참 희한하네. 함께한 세월의 무게일까? 진충기 선생님은 또 뭐지?’
민정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병원 일에 관심을 가진 직원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이었다. 직종, 직위를 따지지 않고 한 식구처럼 대하기 때문이었다.
부우우웅!
자동차 배기음이 힘차게 울렸다.
평생 일할 만한 직장이었다.
한 주 한 주 빠르게 흘렀다.
김지훈은 거의 매일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숱한 안건들을 처리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인사 관련 업무에 집중했다. 중요하지 않은 시설이 없지만 사람이 확보되지 않으면 병원 자체가 굴러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후우! 이 정도면 일정에 맞춰 선발할 수 있겠지? 어떤 선생들이 지원하려나?’
따르르릉!
고장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자주 울리는 전화기였다. 당연히 업무 때문일 것이라 생각하며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진우가 뜻밖의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