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77화 (1,277/1,329)

3화

일반외과 새싹인 전공의를 거쳐 전문의가 된 이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인정받은 써전이 됐고, 시나브로 스승들의 뒤를 이어 일반외과 주력이 됐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스승의 그늘이 필요하기에 한편으로 서운하고 안타까웠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으로 어딘지 모르게 목이 말랐다.

바로 이준영 교수 눈에 비치는 자신과 같은 존재였다. 부원장에 이어 원장으로 내정된 데다 은연중 최고의 써전이란 말을 듣고 있는 탓일지도 몰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만큼 나이 먹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다음 세대의 주역은 누굴까? 대가만이 나의 목적일까? 스승님은 언제부터 날 가르치고, 키워야겠다고 마음먹으셨을까?’

누군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불행히도 주변에는 그런 후배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의미 없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들이 많지만 어디까지나 함께 가야 할 동료이자 동반자였다. 한때 고경철이 가장 유력했지만 개인적 인연 때문인지 실상 다르지 않은 관계였다.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전에 없이 약해지고, 흐릿해지는 현 세태 속에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고자 하는 후배가 있을까? 거창하게 스승과 제자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마음이 중요할 것이다.

존중과 신뢰의 마음 말이다.

결국 이 또한 선배의 의무였다.

종합 병원이 완공돼 수련의와 전공의를 선발하게 된다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싶은 후배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정말 스승님 같은 의사가 됐나? 아직은 먼 일이겠지. 김칫국 마시다 체한다.’

불현듯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던 응급실에서 리포트를 내줬던 이혁민 교수, 음성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던 스승, 천안 병원에서 신현수와 자신에게 수술을 주며 동료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던 송재덕 교수, 차가운 표정 속에 뜨거움을 숨기고 있는 신기동 교수가 차례로 떠올랐다.

한 사람의 써전을 키우기 위해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이들의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설혹 마음속으로나마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 간다고 해도 동료들과 함께 가야 할 길이었다.

‘일석이나 경석이 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진충기 선생님은 또 어떨까?’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세상과 사람들의 인식, 연배, 능력,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까지 여러 이유로 말하지 못할 뿐 김지훈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

시간 참 빠르게 흘렀다.

종합 병원을 구성할 건물들이 모습을 갖춰 갔다. 다소 빠르다 싶었지만 안전 대책과 부실 공사 예방을 위해 이중 삼중으로 대책을 세워 놔 일정 부분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었다.

건물이 완성됐다고 병원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려면 그 속에 채워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재단 및 본원과 함께 추진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리적 여건상 제약이 많았다. 사전에 말이 오간 대로 김지훈과 민정호가 전문 병원 대표로서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모든 부분의 규모가 워낙 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에 미리미리 준비해야 했다.

“행정 부서에서 담당해야 할 일반 장비부터 소모품 조달 입찰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정대로 진행될 겁니다. 리베이트를 제시하는 업체는 철저하게 배제할 생각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이 문제와 더불어 행정 직원 선발은 민 부원장님이 책임지고 맡아야 합니다. 원장님과 난 의료진 선발과 인력 충원의 총괄 관리를 맡아 준비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합니다. 의료 장비 구매에도 신경 써야 하고요.”

논의 내내 김지훈이 정신 바짝 차렸다.

전문 병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산 규모가 컸기 때문이었다. 숫자 하나만 틀려도 이만저만한 실수가 아닐 것이다.

‘야! 이렇게 복잡한 걸 정리해 내는 민 부원장이나 진 대리님 능력도 대단하네.’

자리가 끝날 무렵 민정호가 다소 뜻밖의 질문을 했다. 차가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이유가 있었다.

“일반외과에 근무하실 분들로 어떤 선생님이 좋을지 생각하고 계십니까?”

김지훈이 웃었다.

월권이 아니었다.

전문 병원 시작부터 함께한 민정호였다. 그동안 접촉한 의사들 역시 일반외과 의사가 대부분이라 유독 애착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함께 근무했으면 하는 선생님들이 몇몇 있는데 재단 산하 병원 근무 중이라 함부로 얘기를 못하겠네요.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지만 지원할 경우 눈여겨보긴 할 겁니다.”

“간호과도 문제없겠죠?”

“간호 부장님과 과장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죠. 일일이 관여할 일도 아니고요. 명단 확정되면 우리야 그냥 도장 찍는 게 일 아니겠어요?”

“그러네요. 인원 선발이 제일 어렵고, 잡음이 많은 일인데 모든 분들이 다 책임감이 강해 정말 다행입니다.”

‘책임감 하면 민 부원장님이죠.’

상의할 문제가 많았다.

없는 시간을 쪼개 거의 매일 민정호를 만났다. 더구나 병원 구조상 부원장이 주로 실무를 맡아야 해 다른 분야 책임자들과 수시로 만나 상의해야 했다.

최종 승인을 받는 것도 일이었다.

“원장님, 결재 받으러 왔습니다.”

“고생이 많네.”

“항상 신경 써 주셔서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도리어 매번 늦게 찾아봬 죄송합니다.”

김진호 원장이 입술을 모았다.

마취에서 손을 떼지 않는 이상 김지훈의 수술이 얼마나 많고, 힘든지 모를 수 없었다. 본연의 업무만으로도 벅찰 텐데 항상 웃는 얼굴로 찾아와 고맙기만 했다.

‘능력이 너무 좋아도 문제네.’

도와줄 방법은 단 하나였다.

무작정 믿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두 번 걸음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세심하게 서류를 확인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도장을 찍었다.

“각 과 교수들 초빙 공고 내려면 아직 멀었지?”

“병원 완공 삼사 개월 전에 정식 공고를 낼 예정이지만 미리 선발 기준을 알릴 생각입니다. 펠로우를 마쳐야 한다는 사실까지 알음알음 퍼져야 좋은 선생님들이 조금 더 고민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나 역시 다른 병원 마취과 선생들에게 언질을 주고 있어. 경쟁을 피할 수 없겠지만 우리 병원 펠로우 중에도 괜찮은 선생들이 많아서 다행이야.”

어느새 한 잔의 커피가 바닥을 보였다.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끝나 무척 감사한 일이었다.

김진호 원장으로 끝이 아니었다.

보고할 사람이 또 있었다.

“스승님, 오늘 결정한 내용입니다.”

“내게 알릴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럼 퇴근을 일찍 하셨어야죠.’

“우리 병원에서 어떤 위치에 계신지 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최소 종합 병원에 관련된 일은 모조리 아셔야 합니다.”

“최소? 서류만 놓고 가.”

“커피 한 잔도 안 주시고요?”

“늦었다. 퇴근해.”

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영 교수가 서류에 고개를 박았다. 자신과 함께 시간 보내지 말고 빨리 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스승님도 참! 지금도 저 쌩쌩합니다.’

스승의 눈에는 언제나 안쓰러운 제자였다.

제자의 눈에는 모든 일을 상의하며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스승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빡빡한 분위기에도 웃을 수 있었다. 평생 사제지간인 이준영 교수와 허경발 교수님도 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바쁜 시간 속에 기쁜 날을 맞이했다.

이혁원과 강은미가 드디어 화촉을 밝혔다.

기쁜 일은 빠져도 되지만 슬픈 일은 절대 빠지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정반대의 일이라고 해도 평소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려 준다는 면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객이 어마어마했다.

손일석이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야! 무뚝뚝함의 대명사인 이준영 선생님 인기가 어떻게 이렇게 많을 수가 있지? 병원 식구야 그렇다 쳐도 저분들은 다 뭘까?”

“신부 측도 만만치 않아.”

“결혼이란 게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기도 한데 혁원이 저 자식 정말 장가 잘 가네. 혁원이 입 찢어진 거 봐. 아주 좋아 죽네. 죽어. 누가 왔는지 기억도 못하겠다.”

그럴 법도 했다.

병원 식구만 해도 세기 힘들 정도였다.

스승들은 물론 선배와 후배까지 시간 되는 사람은 다 온 것 같았다. 이준영 교수의 힘도 있겠지만 그만큼 성실하게 잘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여러모로 난놈이야.’

딴따다다! 딴따다다!

결혼식이 시작됐다.

강은미가 정말 아름다웠다.

평소 화장기가 거의 없는 얼굴만 보다 곱게 꾸민 신부를 본 덕분도 있겠지만, 내면이 외면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일종의 진리였다.

행복한 사람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혁원의 입이 찢어질 만했다.

‘우리 마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나 만나 고생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송재덕 교수가 주례를 섰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이런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우리 이혁원 선생과 강은미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봐 온 결과 이만한 신랑, 신부가 없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살 겁니다. 중략…….”

약간은 형식을 벗어난 주례가 이어졌다.

간간이 섞인 송재덕 교수 특유의 농담이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고, 다행히 무한 반복이라는 초식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식사 빠지면 섭섭하다.

축의금 넉넉히 낸 김지훈 가족이 자리 잡고 맛있는 식사를 즐겼다. 으레 술 한 잔 오고 가야 하는데, 폐백을 끝낸 이혁원과 강은미가 인사를 와서도 김지훈은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손일석, 이경석, 진충기 교수도 음료수로 대신하고 있었다.

남편 혹은 아빠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사람 거의 없다. 함께 온 가족들 모두 좋아하고 있었다.

“희연아, 아빠 술 안 마시니까 좋지?”

“정훈이도 좋다고 방긋방긋 웃네.”

손일석이 투덜거렸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 술잔을 기울이는 스승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준영 교수의 얼굴은 이미 불콰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방팔방 일복 뿌리는 놈하고 함께 오는 게 아니었어. 패착이야. 패착.”

“이게 왜 내 탓이야? 현수 탓이지.”

“과연 그럴까? 네가 없는데 현수가 일거리를 들고 왔을까? 덕분에 기억에 남는 결혼식이 될 것 같긴 하다. 나 결혼할 때는 어떻게 넘어갔는지 모르겠네. 혹시 안 왔나?”

“처제 결혼식이었는데 어떻게 빠져? 사진 봐.”

김지훈이 신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오늘이어야 했어?”

“술 못 먹는다고 죽지 않아.”

“삶의 즐거움이라는 게 있잖아?”

“맨정신에 즐길 수 있는 거 많다.”

“제길!”

투덜투덜!

자주 볼 수 없는 처지라지만 예의를 아는 신현수가 후배 결혼식장에까지 일거리를 들고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입으로 내는 불평과 불만으로 끝이었다.

결혼식이 끝났다.

일요일 오후를 마냥 소비할 수 없었다.

가족들 간의 친목을 다질 겸 아내들끼리 다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이미 다들 안면이 있는 데다 커피 한 잔으로 몇 시간을 거뜬히 버텨 내는 공력을 가졌기에 무리한 일이 아니었다.

곧바로 머리를 맞댔다.

오직 축하의 마음만 전하기 위해 참석했던 민정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지훈의 눈길이 아직도 곱지 못했다.

‘상의할 일이 있다고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한 놈은 현수인데 왜 내가 비난의 눈길을 받아야 하지?’

“무슨 일이야?”

“내년에 전문 병원에 파견할 수련의와 전공의 문제를 상의해야 돼. 빨리 결정해야 각 병원 인원을 조절하고, 전체 회의를 통과할 수 있어.”

눈이 동그래질 일이었다.

“인턴까지 보낸다고?”

“전문 병원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인원을 늘려야 한다는 사실에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어. 인턴으로서 배울 수 있는 부분도 많을 거야. 게다가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수련 체계를 더 확실하게 잡아야 하잖아.”

“각 병원 모두 인력이 부족할 텐데 의외네.”

신현수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부적으로 공감보다 반론이 많았을 것이다. 원하는 인원을 모두 배정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작은 시작이라고 해도 전문 병원에 이어 이사장으로서 신설하는 종합 병원을 제대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했다.

“김 부원장, 이미 생각한 게 있을 텐데 말해 봐.”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일종의 협상이나 다름없었다.

신현수가 의도하는 범위를 정확히 예상해 적절하게 제시해야만 빠르게 합의할 수 있었다.

욕심은 금물이었다.

애초 티오가 없는 전문 병원의 수련의와 전공의 인원을 늘리는 일이었다. 다른 병원이 납득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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