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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76화 (1,276/1,329)

2화

일상으로 복귀했다.

휴가 후유증이 무시무시했다.

분명 재충전이 된 것 같은데 같은 일을 해도 훨씬 힘들게 느껴졌다. 부러운 눈초리로 뭘 하고 놀았는지 물을 때마다 오히려 더 쉬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일도 밀렸다.

일정을 조정했던 수술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행정적인 문제는 왜 그리 많은지 불과 사흘 사이에 확인해야 할 서류까지 수북이 쌓였다.

‘후우! 꾀가 나는 건지, 나이 먹어서 더 힘들게 느껴지는 건지 몰라도 이건 확실히 합병증이야.’

한 주가 거의 다 끝날 무렵에야 정상적인 리듬을 탔다. 그제야 구미 병원에서 들었던 오영수의 말이 생각났다. 스치듯 지나쳤지만 선배로서 결코 지나치지 못할 말이었다.

상의할 필요가 있었다.

“과장님, 구미 갔다가 갑자기 환자가 생겨 수술을 들어갔었는데…….”

“잘 놀고 왔다더니 수술을 했어?”

민망한 일이었다.

“하! 하! 하! 그게… 그러니까…….”

“에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응급실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한 말을 그새 까먹은 거야? 어쩐지 처형 얼굴이 마냥 밝지만은 않더라. 희연이까지 있는데 속도 모르고 얼씨구나 하고 들어갔겠네. 저놈의 일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오영수라고 전공의 삼 년 차가 파견을 나왔는데 장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장래?”

손일석이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일반외과 상황이 암담한 것은 학생들도 알고 있다. 한편으로 전문의가 되면 펠로우를 하든지, 개업을 하든지 갈 길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대부분 일반외과 본연의 수술을 포기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말이다.

더불어 다들 수련을 마친 지 오래였다.

최근 들어 전공의라고는 고경철을 접한 것이 다였다. 요즘 전공의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경석과 진충기 교수도 상당히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우리 때하고 크게 다르지 않더라. 제대로 수술하며 살고 싶은 후배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 펠로우 자리는 한정돼 있고, 크게 개업을 해도 마이너 수술만 간신히 할 수 있는 상황이잖아. 취직한다고 뭐가 다른가? 규모가 큰 병원이 아니면 큰 차이가 없고 말이야.”

“다들 돈 못 버는 과라는 사실을 알고 지원했을 텐데 도리어 고민이 더 많을 수도 있겠네. 후배들 진로가 항상 신경이 쓰이긴 해. 하지만 우리가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기 어려운 일이잖아?”

“그럴까? 대학 병원급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인원을 주로 선발하니까 뚫기 어렵지만, 일반 종합 병원급은 오히려 필요 인원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들었어.”

“전문의 배출이 줄어드니까 별일이 다 생기네. 근데 왜 대우는 제자리야? 그건 둘째 치고 발전성이 다르잖아. 우수한 인력을 선발하려면 당장 손에 쥐는 돈만으로는 부족해.”

“맞는 말이야. 하지만 종합 병원급에서 근무를 해야 대학 병원도 바라볼 수 있지 않겠어? 메이저 수술을 하고 싶은 후배들에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잖아. 그래야 손이 녹슬지 않을 테고, 해당 병원도 안정적으로 인원을 확보할 수 있고 말이야.”

각자 원하는 바가 다른 이상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대우가 미흡할 수도 있고, 바라는 만큼 수술을 하고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후배의 길을 터 주는 일은 선배가 짊어져야 할 당연한 의무였다.

그간 병원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젠 외부로도 눈을 돌릴 때였다.

사실 이미 사회에 나와 자리 잡은 사람과 이제 막 발을 내딛는 사람은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탓인지 무관심한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무조건 챙겨야 할 부분은 아니지만 능력과 인성을 갖춘 후배라면 진로에 대한 조언을 넘어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했다. 하기에 모든 조직이 지향해야 할 일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진충기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힘들게 수련을 마쳤는데 막상 수술도 하지 못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요. 관건은 다른 병원과의 긴밀한 협조와 연대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예를 든다면 보훈 병원이나 보라매 병원이 좋은 대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씀대로 그런 병원과의 유대 관계가 중요하겠지요.”

이경석이 바짝 당겨 앉았다.

“결국 접촉을 해야 한단 말이네.”

“전화로 부탁할 일이 아니죠.”

“평소 안면도 충분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상대 병원에서 우리 병원 출신 전문의들을 인정해야 한다는 거겠지. 게다가 부탁한다고 무조건 뽑아 주겠어?”

돌연 손일석이 웃었다.

“후유증이 심하다고 하더니 그새 일거리를 또 만드네. 전공의 교육이야 그렇다 쳐. 현 시점에서 누구 부탁이 가장 강력하겠어? 우리도 다른 병원 과장님들과 안면이 있지만 병원장님이나 실권을 가진 선생님들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않아? 그런 분들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잖아.”

‘헉!’

“놀랄 거 없어. 혼자 해서 될 일이 아니니까 과장님 이하 우리 모두 발 벗고 나서야 할 거야. 일단 한 번 뚫어 놓으면 다음부터 한결 쉬워지겠지만 역시 처음이 문제 아니겠어? 사람 만나는 일은 차치하고 자격이 되는 후배들을 양성해야 하는 책임이 더 무거워지겠지.”

‘후우! 당연히 다 같이 해야지.’

“마음 놓지 마. 우리가 아무리 도와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단 한 명이야. 같은 값이면 인맥이나 학연을 무시하지 못하니까 부원장, 원장을 하는 동안 다른 병원 원장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 해.”

‘귀신 같은 놈! 근데 원장이라고?’

김지훈이 흠칫 놀라자 손일석이 손바닥을 턱 펼쳤다.

“원장 해야 한다는 소리 처음 들은 거 아니잖아? 말 안 해도 티 팍팍 내면서 요기 위에서만 노는데 모를 수가 없지. 내가 부처님이다.”

“내가 언제 티를 냈어?”

“현수 만나고 난 후부터 고민할 일이 뭐가 있을까? 민 부원장 말까지 종합하면 답이 딱 나와. 에이! 경석이 형, 진충기 선생님과 내가 먼저 가야 하는데 성질나네. 우리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아요?”

진충기 교수가 웃었다.

“당연한 말이긴 한데, 그래서 선점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일단 부원장을 해야 원장을 할 거 아니야? 이미 늦었어. 우리 김 부원장님이 빨리 원장님까지 하시고 물러나길 바라야지.”

“어후! 듣다 보니 무섭네. 경석이 형은 과장이고, 선생님은 센터장인데 난 뭐 하고 있는 거지? 언제 치고 올라가서 김 부원장에게 원장 오더를 내려 보나!”

삼천포다.

김지훈이 서둘러 본론을 이어 갔다.

“마침 곧 외과 학회가 열리니까 이번 기회에 후배들 자리 좀 만들어 보죠. 서울 병원과 천안 병원에 연락해서 사 년 차들에 대한 정보도 얻어야 하고요.”

“오케이! 종합 병원 완공되면 정식으로 전공의 배정을 받을 텐데 우리 병원 출신들 숨통이 트이겠어. 자체 펠로우와 타 병원 스텝이면 충분하겠지?”

“경석이 형, 솔직히 차고 넘치죠. 우리 병원이 잘나간다 해도 애들 입장은 다를 가능성이 높아요. 뼈를 갈아 넣어야 하는데 몇 명이나 지원하겠어요?”

“정말 차고 넘칠까? 전공의도 적지만 갈 수 있는 자리는 더 적잖아. 좋은 자리가 많아져야 전공의 지원도 덩달아 늘어날 테고.”

맞는 말이었다.

싹이 건강해야 실한 열매를 얻는 법이다. 일반외과 명맥을 굳건히 이어 가기 위해서라도 서로를 밀고 끌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야 할 때였다.

은근한 기대감까지 서렸다.

사실 병원에 남을 수 있는 후배들 이외에 다른 후배들의 진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처음이라 해도 무방했다.

솔직히 스승 세대는 후배들의 진로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면이 강했다.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일반외과가 잘나가던 때였기에 그만큼 진로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변했고, 어쩌면 늦었을지도 몰랐다.

이제라도 바짝 신경 써야 했다.

생각해 보면 일이 늘어난 것도 아니었다. 다른 병원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기억해 내면 되는 일이었다. 더구나 전문의가 된 모든 의사가 수술을 원하는 것도 아닌 상황인지라 절박한 병원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던 손일석이 손가락을 튕겼다.

“아 참! 경석이 형, 전공의와 수련의 월급 인상은 어떻게 됐어요? 당장은 상관없지만 우리도 대비해야 하지 않아요?”

“각 병원 과장 회의 결과 인상 폭을 크게 늘리자고 결의했어. 병원들도 발등의 불이기 때문에 거부하지 못할 거야. 아마 흉부외과가 가장 크게 오를 것 같고, 다음이 우리야.”

“야! 이삼십만 원 받고 인턴 생활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세상 많이 변했네. 당직비도 한 달에 삼만 원 받았잖아요? 후배들이 이제야 대우를 받는 건데 왜 이렇게 씁쓸하죠?”

돈도 돈 나름이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최소 인원조차 채우지 못해 택한 궁여지책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돈 때문에 사 년을 뼈 빠지게 일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모든 후배가 오직 돈에만 관심을 두고 전공할 과를 택할 리 없었다. 일반외과를 전공해 일반외과 의사로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원하는 답이었다.

말 길어져야 답답한 일이었다.

다들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할 때 마침 이혁원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얼굴이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이야?”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청첩장이 나왔습니다.”

다들 반색했다.

사랑받는 후배임이 틀림없었다.

“드디어 너도 가정을 꾸리는구나. 강은미 선생이 딱 부러지니까 이준영 선생님 마음이 한결 놓이시겠어. 어디 보자.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사이판으로 갑니다.”

제주로 신혼여행을 갔던 김지훈이 부러워 죽었다. 해외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더 큰 추억을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럽다!”

“미국 삼 년 갔다 온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풍경이 끝내준다는데 모히또에서 몰디브나 한잔하지.”

“모히또에서요?”

“에헤! 강은미 선생 같으면 벌써 배꼽을 잡았을 텐데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해. 김 부원장 말처럼 혁원이 널 볼 때마다 나도 불안했는데 장가 하나는 잘 가네.”

김지훈이 눈을 흘겼다.

‘그런 개그가 통할 때냐?’

이 시간의 주인공은 이혁원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이혁원이 간 후에도 각자 연애와 신혼의 추억에 잠겨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 과거의 기억에 즐거워하는 법이라는데 다들 그런 모양이었다.

물론 애 낳고 살아가는 동안 많은 것이 변하기 마련이었다. 부부는 피를 나눈 가족과 같아 부부 사이의 잠자리 자체가 천륜을 어기는 것이란 말이 공연히 떠돌지는 않을 것이다.

“좋을 때다.”

유부남들의 결론이었다.

“그나저나 축의금을 얼마나 해야 하지?”

“난 미리 했다.”

“동작 하나 빠르네. 어이쿠! 이준영 선생님 얼굴도 생각해야 하는데, 신랑 신부 쪽을 다 챙겨야 하잖아? 이거 출혈이 크겠어.”

누구도 서운해하지 않을 적정선이 어디일까? 이준영 교수야 당연히 몸만 오라고 하겠지만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이 다르기 마련이었다. 무엇보다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동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론 나지 않았다.

***

어느새 한 주의 마무리가 다가왔다.

화염방사기를 등에 멘 채 위협적인 눈빛만을 보내는 이준영 교수 대신 김지훈 연배가 주말 집담회의 주도권을 잡고 휘둘렀다.

삐질삐질!

중환자실의 환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고경철은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었다. 소아외과를 선택한 탓에 송진우와 한수영도 직격탄을 맞았다. 하지만 근사한 방패막이 덕분에 치명적인 일격을 면했다.

이혁원, 나종진, 오만석이었다.

교수 임용이 확정됐지만 아직은 펠로우 신분이었다. 마지막 담금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인방과 진충기 교수가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혼을 앞둔 의사!

복강경의 고수로 거듭나고 있는 의사!

무엇이든 막아 낼 거구의 의사!

다 필요 없었다.

인성이나 성격은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주말 집담회는 지식을 논하고, 얻는 자리였다. 교수로서 지금 필요한 자격은 오직 실력이었고, 아무리 사소한 미진함이라도 결코 용서받지 못했다.

“헉! 헉! 헉!”

리틀 이준영을 넘어 이젠 김지훈으로 우뚝 선 선배의 불길은 뜨거운 정도가 아니었다. 인간적인 면모가 가장 두드러지는 손일석은 혈관을 전공한 의사이자 신기동 교수의 제자답게 평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경석의 웃음 속에 송재덕 교수의 살벌한 너털웃음이 숨어 있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 살아왔던 진충기 교수도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였다.

그뿐인가?

후배 사인방 역시 만만치 않았다.

원래 매서운 성격을 가진 서도진을 필두로 서도훈, 안호석이 가세했다. 잠시 다른 병원에서 근무한 것이 일종의 행운으로 작용해 먼저 교수가 된 강병옥도 수련 순서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펠로우들이 짚단 쓰러지듯 우수수 쓰러졌다. 창백한 입술과 축축한 와이셔츠가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는지 여실하게 말해 주었다.

김지훈이 씨익 악마의 미소를 머금었다.

‘이렇게 배우고, 가르쳐야 어떤 후배든 어느 병원에 보내든 당당한 써전이 되겠지.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니까 서운해하지 마라.’

간만에 개운한 주말 집담회였다.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후배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해가 지날수록 더욱 단단한 일반외과가 될 것이다. 이준영 교수의 당연하면서도 담담해 보이는 눈빛이 이를 확신시키고도 남았다.

룰루랄라!

휘파람을 불며 퇴근하던 김지훈이 돌연 눈매를 좁혔다. 전공의들에게 생각이 미치는 순간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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