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75화 (1,275/1,329)

1화

후배인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최 과장, 고생이 많네.”

“갑자기 수술이 떠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김 선선생도 지금 수술 중입니다.”

“췌장 손상 환자까지 있다며? 급한 환자 많은 것 같은데 나 신경 쓰지 말고 환자 봐.”

“죄송합니다.”

다시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어디나 고생이네.’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감정이 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병원 소속이었다. 빨리 벗어나야 도리어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띠띠띠띠띠!

그때 급박한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써전의 본능 탓인지 김지훈이 선뜻 발을 떼지 못했고, 고경아도 차마 재촉하지 못했다. 방선호 과장까지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이내 결론이 났다.

췌장이 깨진 환자가 있는 상황에서 바이탈이 흔들리는 혈복강 환자까지 발생했다. 두 명 모두 최대한 빠른 수술이 필요한 상태였다.

구미 병원 교수 중 수술할 수 있는 의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지만 경중을 가릴 수 없는 환자들이었다. 둘 중 한 명을 이송한다고 해도 수술까지 몇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생기고도 남았다.

오영수에게 환자를 맡긴 일반외과 과장이 스테이션으로 달려왔다. 이런 상황을 꽤 겪었을 텐데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혈복강 환자부터 수술합시다.”

“췌장 손상을 받은 환자는요?”

“대구로 보내는 수밖에 없겠어요. 제길! 타이밍 놓치면 주변 조직을 녹일 텐데 제시간에 수술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또 한 명의 써전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힐끗 김지훈을 보긴 했지만 안타까움의 발로였다. 구미 병원 간호 과장의 눈빛에도 난감한 기색이 잔뜩 실렸다.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할 뿐 온몸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온 병원에 소문이 자자한 김지훈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김지훈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공의 때만이 아니라 전문의가 돼서 임시 과장으로 근무한 인연이 있는 병원이었다. 안면이나 친분 정도가 아니라 김지훈이 어떤 써전인지 잘 아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환자가 눈에 밟혔다.

고경아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훈 씨, 여기 선생님들이 괜찮다고 하면 도와주세요. 이러다 환자 한 명 큰일 나겠어요.”

“희연이하고 경아 씨는 어떻게 하고요?”

“오늘 일이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뭘 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잘됐네요. 연애할 때 가 봤던 금오산이나 갔다 올게요.”

가족이냐? 환자냐?

난감함과 난감함이 충돌했다.

고경아가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환자를 선택했다.

구미 병원 소속이 아닌 탓에 의료진과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지만 위급한 환자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다.

의료진 모두 한숨 돌렸다.

“샘! 고마워요.”

일반 외과 과장의 요청으로 췌장 손상 환자를 수술하게 됐다. 보호자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다행히 동의를 얻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 병원 부원장이라는 사실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간담췌 분야의 대가라는 낯 뜨거운 말까지 들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대가는 무슨, 부원장이라는 직함 때문이겠지. 이럴 땐 자리가 참 큰일을 하네. 후우! 일석이 말대로 응급실에 발도 대면 안 되는 거였어.’

여기저기 발 닿는 병원마다 일복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곧 일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한편으로 자신을 믿고 수술을 요청한 의료진과 수술을 허락한 보호자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띠띠띠띠띠!

수술이 시작됐다.

췌장 몸통만 제거하면 끝나는 수술이라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김지훈이 모든 걱정을 잊고 어떤 문제도 만들 수 없다는 듯 무섭게 집중했다.

빠르고 정확한 손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수술 사이사이 참관을 하던 구미 병원 일반외과 의국원들이 연거푸 감탄을 터트렸다. 최고의 써전이 가진 실력을 원 없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학회 발표 때 슬라이더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르네. 배울 게 너무 많아.’

모든 과정이 순조로웠다.

고경아와 희연이가 금오산 구경을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는 환자까지 깨어난 상태였다. 뜻하지 않게 한 명의 환자를 살렸지만 더 이상은 무리였다.

보호자를 만나 다시 한번 상황을 설명한 김지훈이 후다닥 주차장으로 달려가며 응급실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일복이란 폭탄 제대로 던졌다.

고경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 일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조차 한계를 모르는 일복을 실감한 날이었다. 하긴 공식 휴가 때마저 장인어른과 수술을 한 사람인데 드문 일도 아니었다.

희연이 역시 평생 오늘 일을 기억할 것이다.

경주로 놀러 가다 말고 난데없이 수술을 하는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구미 병원에 왜 들렀는지 관심을 가지기에 아직 어린 나이긴 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은 받고도 남았다.

다행히 싱글벙글을 들를 시간이 있었다.

특유의 새콤함이 여전했다.

항상 허기가 졌던 전공의 때 느꼈던 맛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변함없는 요리 방법 때문인지, 점심도 못 먹고 수술을 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긴 했다.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었다.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수술 하나로 벗어났으면 선방이네.’

“출발합시다.”

경주 보문 단지 내에 짐 풀었다.

자! 이제 진짜 휴가를 즐길 시간이었다.

평소 피곤에 지쳐 퇴근하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사람도 휴가 때는 눈이 말똥말똥해지기 마련이었다. 오랜 운전과 구미 병원의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점점 팔팔해졌다.

세 식구 모두 모여 희연이도 먹을 수 있는 안주 놓고 가볍게 술 한 잔 걸쳤다.

‘좋다!’

그렇게 목요일 밤이 저물었다.

다음 날 아침.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경주는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명소 중의 명소이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들렀을 지역이었다. 천마총,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등등 유명한 유적은 다 방문했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기억까지 새록새록 떠올랐다.

단점 아닌 단점을 꼽으라면 여행의 필수인 맛집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단체 관광객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의 맹점이라 할 수 있었다.

옥에 티처럼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경주에 아는 사람만 있었어도 맛있는 밥을 먹고도 남았을 텐데 정말 아쉽네.’

대신 눈이 호강했다는 사실을 위안 삼고 토요일 일정에 집중했다. 여러 지역을 사방팔방 헤집고 다녀야 수박 겉핥기에 불과했고, 피곤할 뿐이었다. 유명한 절을 찾아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괜찮은 휴가일 것이다.

“양산 통도사에 언양 불고기 좋다.”

토요일 오전 적당한 시간에 출발했다.

희연이가 있어 최대한 가깝게 주차를 하고, 통도사 경내로 걸어 올라갔다. 많은 절을 본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 구애받지 않는 처가 덕에 유명한 절 몇 곳 정도는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천년 고찰 혹은 본산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절과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절이 반반쯤이었다. 때론 바글바글한 사람 때문에, 때론 역사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건물 때문에 절 자체가 주는 감명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사람 많은 거야 어쩔 수 없고, 백담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통도사는 어떨까?’

김지훈이 입을 쩍 벌렸다.

통도사는 달랐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순간 딱 하나의 건물이 눈을 압도했다. 오백 년 가까이 된 대광명전을 접하는 순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장엄함?

웅장함?

고색창연한 목조 건물이 주는 특유의 감성에 세월의 무게가 한껏 녹아 있었다. 한때 화려했을 채색의 흔적까지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분명 감동이었다.

주관적인 관점이라 해도 좋았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사람에게 꼭 권유하고 싶은 절이었다. 거대한 크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주는 감흥을 느낄 수 있다면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다.

“우와! 대단하네.”

김지훈이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운까지 좋았다.

무슨 날인지 몰라도 방문객들에게 떡을 나눠 준다고 했다. 사찰 특유의 담백함과 정갈함에 맛까지 좋아 감동이 한층 배가 됐다.

“우리 언제 시간 되면 다시 와요.”

“성당 안 가고요?”

“성당도 가긴 가야 하는데 맨날 핑계만 대네요. 난 참 불량한 신도인가 봐요. 대신 엄마가 매일 기도하신다니까 봐주시지 않을까요?”

김지훈이 웃었다.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석해야만 독실한 신도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잘 모르지만 평소 어떻게 사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챙겨 주지 못해 미안해요. 무교인 내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난 고마워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은은히 밴 채 사라지지 않는 감동을 안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슬슬 배가 고파져 소문이 자자한 언양 불고기에 대한 기대가 더욱 강해졌다.

국물 자작한 불고기가 아니었다.

숯불 석쇠 불고기였다.

소고기를 다진 데다 단맛이 다소 강하게 느껴져 김지훈 입맛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고경아와 희연이는 맛있다며 마지막 한 점까지 싹싹 긁었다.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소문난 맛집 음식이 맛없다고 욕하지 말자. 다 자기 입맛대로 평가할 뿐이다.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면 아마 줄 서다 지쳐 쓰러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말 알찬 토요일이었다.

이제 하룻밤만 남았다.

여행의 의미로 지역 특유의 음식을 꼽는 김지훈과 볼거리에 의미를 두는 고경아가 격론 끝에 결정한 곳으로 향해야 할 시간이었다.

“의성이 어딘지도 잘 모르는데 숙소는 어떻게 예약했어요? 재주도 좋아.”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나 없으면 놀러나 갈 수 있겠어요?”

“혼자 갈 일이 아예 없는데 그런 걱정을 왜 해요? 우리 마님하고 평생 같이 다녀야죠. 그나저나 뭉티기라는 이름이 참 정감 있지 않아요?”

“육회하고 뭐가 다를까?”

어느새 어두워졌다.

대구 지역에도 같은 이름의 음식이 있는데 굳이 의성을 택한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의령, 봉화 등등 별 보기 좋은 동네로 유명한 지역이 근처에 있어 밤하늘을 제대로 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때가 맞아 그믐이었다.

날도 맑았다.

순식간에 깜깜해지는 밤하늘에 하나둘 별이 빛났다. 마침내 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혼탁한 하늘만 보던 도시 촌놈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와아!”

감탄이 절로 터졌다.

태어난 후 이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이 없는 희연이가 맑고, 어린 눈망울을 빛냈다. 부모의 눈에는 가장 소중한 별의 반짝임이었다.

‘희연이도, 경아 씨도, 하늘도 다 예쁘다. 어머니, 아버지, 우리 보고 계시죠? 저 정말 행복합니다.’

하루 종일 감동받는 날이었다.

이성급도 아닌 일성급 호텔, 다시 말해 모텔조차 오성급 호텔로 느껴졌다. 이제 뭉티기만 배신하지 않는다면 완벽한 3박 4일이 될 것이다.

뭉티기!

사투리인가 보다.

흔히 보는 양념하지 않은 채 뭉텅이로 썰어 낸 소고기 육회였다. 분위기 탓인지 몰라도 어딘지 모르게 다른 맛이었고, 양념장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날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고경아와 어린 희연이가 잘 먹었을 정도면 말 다 한 것이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때였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휴게소 들르며 천천히 올라가도 좋았다. 제네실수가 주는 안락함까지 있는 이상 크게 피로하지도 않을 것이다.

방심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시간만 잘못 걸리면 어김없이 밀리는 경부 고속도로는 결코 편안함을 선사하지 않았다.

밤늦게 집에 도착했다.

이미 잠에 빠진 희연이 눕히자 짐 정리할 힘도 나지 않았다. 더더욱 큰 문제는 이대로 며칠 더 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심각한 월요병에 시달릴 것이 빤했다.

며칠 동안 보지 못한 환자를 생각하며 빠른 시간 내에 일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아자아자!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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