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74화 (1,274/1,329)

20화

종합 병원 부원장, 원장이라는 소리가 고경아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잘 타 놓고 돌연 슴5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별 고민도 없이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김지훈도 격하게 동의했다.

운까지 좋았다.

구미로 떠나기 바로 전주에 출고가 가능했다. 제한 속도를 지키며 길들이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고, 행복한 여정이 될 것이다.

효율적인 업무 진행이 필요했다.

‘휴가를 챙겨 주는 것도 모자라 아주 세세한 자료까지 받아 오다니, 민 부원장도 참 진국이네. 그렇다면 적극적으로 일을 줄여야지.’

뜻밖의 휴가는 김지훈을 춤추게 했다.

스스로 제안해 맡은 일인 이상 얼굴 찡그릴 이유가 없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사전에 받은 자료를 철저하게 검토했다. 민정호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만반의 준비까지 갖췄다.

“이 정도면 예방 의학과 과장님과 구체적인 내용까지 상의하실 수 있겠습니다.”

“덕분에 수월하게 생겼네요. 고맙습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잘 쉬고 오라는 말을 참 어렵게 하네. 점점 적응이 되는지 아주 자연스럽게 들리긴 해.’

“걱정하지 말아요. 그럼 이만!”

김지훈이 남몰래 웃었다.

이겼다!

애들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인지.

곧장 퇴근할 줄 알았던 김지훈이 병동과 중환자실에 들러 세세하게 환자를 챙겼다.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아야 했다.

겸사겸사 응급실까지 챙겼다.

“나 없는 동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이 선생, 부원장님 가시니까 빨리 문 열어 드려. 어서 가세요. 어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쫓겨났다.

응급실 간호사들은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일복 떨어트리고 가는 순간 눈가에 기미 걸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인사 따위의 일로는 근처에 얼쩡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드디어 출장 당일 아침이 밝았다.

김지훈의 어깨에 흥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일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 즐거워도 되나?’

두근두근!

수술을 앞둔 것처럼 가슴이 설렜다.

전체적인 틀을 잡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자리기에 산업 의학과 문제는 반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다. 더구나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입장에서 구미 병원 업무에 지장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직 동이 다 트기도 전이었다.

잠에 취한 희연이를 태우고 구미로 출발했다.

‘길만 막히지 마라.’

몇몇 상습적 지체 구간에서 출근길 차량이 살짝살짝 진로를 막았지만 무난하게 달렸다. 한 차원 다른 승차감까지 겹쳐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천안 휴게소에서 아침을 때웠다.

휴게소 음식도 잘 찾으면 먹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다. 아이들이 먹기에 다소 맵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짬뽕 밥이 입에 척 달라붙었다.

‘내 입맛에 딱 맞네. 구미 일 끝낸 후 싱글벙글에서 복 매운탕까지 먹으면 오늘 식사는 아주 만족스럽겠어. 희연이가 잘 먹을까? 입에 안 맞으면 뭘 먹이지?’

마음이 너무 들떴다.

일하러 가는 건지 놀러 가는 건지 김지훈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머릿속에 차곡차곡 잘 정리된 자료들을 믿었다.

고경아는 약간 불안한 모양이었다.

“방선호 과장님은 어떤 분이세요?”

“민 부원장과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평판이 무척 좋네요. 인품도 훌륭하시고, 무엇보다 산업 의학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이 확실해요.”

“예방 의학 소속 간호과 선생님과 함께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 좋은 분이라는 느낌이 들긴 했어요.”

“사실 몇 번 통화를 했어요. 몇 년 선배시던데 말투와 목소리만 들어도 정말 점잖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가야 하는데 걱정이네요.”

맞는 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말투, 행동, 자세 등으로 살아온 세월을 말하곤 한다. 어쩌면 자신의 단점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 또한 인생의 한 단면일지도 몰랐다.

‘나는 무엇을 고쳐야 할까? 에휴! 한두 가지여야 탁 떠오를 텐데 너무 많네.’

왠지 고경아에게 미안했다.

손을 꼭 잡고 말았다.

손바닥에 땀이 찰 무렵 구미에 도착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전공의 때 보았던 기억 속 구미 시가지가 아니었다. 싱글벙글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여기저기 들어선 새 건물 때문인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선사했다.

구미 병원은 변함이 없었다.

군데군데 리모델링을 한 것으로 보였지만 새로 짓지 않는 한 전체적인 인상이 달라질 구조가 아니었다. 역시 대구라는 거대한 도시가 지근거리인 탓이 컸다.

‘각 병원 모두 규모에 맞춰 해야 할 일이 있는 이상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지.’

산업 의학과를 찾았다.

불과 며칠 전에 오후로 잡았던 일정을 오전으로 당겼는데 이미 방선호 과장이 간호 선생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나눴다.

“일반 외과 김지훈입니다.”

“예방 의학과를 맡고 있는 방선호입니다.”

조용한 말투, 침착한 행동, 반갑게 맞이하며 보인 편안한 미소까지 생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방선호 과장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부원장이라는 말을 할 법도 한데 언급도 안 하다니, 듣던 대로 무척 겸손한 선생님이시네.’

김지훈이 양해부터 구했다.

“사정이 있어 가족이 모두 왔습니다. 조용한 아이긴 하지만 실례가 될 수도 있는데, 논의하는 동안 같이 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집에서는 결코 조용하지 않은 희연이 손에 과자와 음료수에 책 하나 쥐여 주고 곧바로 업무를 봤다. 다행히 제법 의젓하게 엄마, 아빠를 기다렸다.

‘우리 딸 많이 컸네.’

산업 의학과의 특성, 구성 요건 및 필요 인력과 시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확실히 전화로 듣는 것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김지훈이 가장 중요한 문제를 언급했다.

“아시다시피 산하 병원 모두 산업 의학과에 관련된 인력이 많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과 개설에 맞춰 능력 있는 선생님들의 추천이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일단 책임자가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과장으로 내정한 선생님은 계십니까?”

“백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예방 의학과를 전공한 인원이 적기도 하지만 근무할 수 있는 병원은 더 적은 상황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맡겨 주신다면 제가 일 차 구성을 해도 될 까요?”

김지훈이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미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상태라 이 자리에서 답을 해도 구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단, 과장을 비롯해 모두가 생소한 사람들이었다.

특정 인물이나 지역을 중심으로 인사가 편중된다면 불필요한 잡음이 유발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구미에서 벗어나 수도권으로 올라오려는 개인적 욕심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

‘인맥이나 지연에 연연하지 않는 선생님이라고 하지만 공적인 일인 이상 확실한 게 좋겠지.’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로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다만 구미 병원 출신을 비롯해 어느 한 지역이나 동문으로 집중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능력과 열의를 기준으로 추천해 드릴 테니 그런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면접을 통과해야 하는 이상 최종 결정은 전문 병원의 몫이 아닙니까?”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뽑는 일이라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분 나쁘시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과장이 크게 웃었다.

소탈하게 들렸다.

“저 같았으면 더 깐깐하게 굴었을 겁니다. 앞으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아야 할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예방 의학과가 확대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네요.”

한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고경아와 간호과도 순조롭게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마음이 잘 맞는지 지루해지기 시작한 희연이를 옆에 앉히고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할 이야기는 다 했다.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때론 말 몇 마디로 상대의 성격이나 자신의 일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방선호 과장이 그런 사람이었다.

‘산업 의학과를 정말 잘 이끌어 가실 선생님인 것 같다. 우리 병원으로 오시면 좋지 않을까?’

“초면에 실례된 말씀이지만 우리 병원 산업 의학과 과장님 초빙에 지원하셨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 그런 자격이 있을까요?”

“어이쿠!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확답은 못 드리지만 의향이 있으시다면 일간 한 번 올라와 주십시오. 이사장님과의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방선호 과장의 표정이 묘해졌다.

뿌리를 내린 병원을 떠나는 일이 쉽지 않지만 구미 병원의 협소함 때문에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일종의 초빙 제의까지 받은 이상 깊게 고민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내게도 기회이긴 하지.’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고민해 보겠습니다. 구미 지역에 필요한 인력이 적지 않아서요. 서류나 말로 할 수 있는 문제는 다 상의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장비와 시설을 둘러보실까요?”

“좋습니다.”

방선호 과장을 따라 예방 의학과 사람들을 만나며 구석구석을 살폈다. 항상 곁에 두어야 할 희연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다들 웃음으로 반겨 주었다.

찰칵! 찰칵!

장비와 시설 사진까지 찍었다.

‘이것으로 끝인가?’

그때 방선호 과장이 생각지도 못한 곳을 가리켰다. 예방 의학과는 모두 별관에 위치하는데 본관으로 가자고 한 것이다.

“산업체 근무자들의 건강 검진을 본관에서 시행합니다. 일반 건강 검진과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확인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별생각 없이 따라나선 김지훈이 돌연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하필이면 방선호 과장이 가장 빠른 길이라며 응급실로 향하고 있었다.

순간 손일석의 말이 떠올랐다.

‘들러도 되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다른 병원에까지 일복을 터트릴 리 없었다. 별생각을 다 한다며 자연스럽게 응급실로 들어섰다. 그때 누군가 잠시 쳐다보다 말고 화들짝 놀라며 달려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일반 외과 전공의 3년 차 오영수입니다. 서울 병원 소속이고, 파견 내려왔습니다.”

“응? 우리 과 3년 차라고? 반갑다.”

“과장님들께서 인사하셔야 한다고 선생님을 기다리셨는데, 갑자기 환자가 와 두 분 모두 지금 수술 중이십니다.”

‘구미도 잘 돌아가나 보네.’

“인사는 무슨! 수술 중이라며 오영수 선생은 왜 안 들어갔어? 환자 있나?”

“예. 췌장 손상 환자가 있습니다.”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다른 손상도 많은데 하필이면 췌장 손상이라니 불길한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하지만 엄연히 책임자가 있는 병원이었다. 과장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한 관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걱정 정도는 무방할 것이다.

“빨리해야 되지 않아?”

“곧 수술 하나가 끝납니다.”

“다행이네. 그럼 나중에 또 보자.”

오래 머무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방선호 과장과 함께 서둘러 건강 검진실을 찾은 김지훈이 산업체에 필요한 특수한 검사 및 필요한 장비들을 둘러보았다.

하나하나가 다 돈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걱정이 앞섰다. 수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의료 구조상 재단을 설득해야 할 부분이 또 생겼기 때문이었다.

고경아도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하자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임상 간호사들과 비교할 때 기초 의학에 근무하는 간호사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간호 선생들 선발도 만만치 않겠어요.”

“임상도 아니고 기초 의학 분야의 새로운 과를 만드는 일인데 쉽고, 간단하게 끝날 리가 없죠. 그래도 구미 병원 선생님들 덕분에 몇 달은 아꼈을 거예요.”

한술 밥에 배부를 리 없었다.

당장 할 수 있는 부분과 앞으로 준비해야 할 부분을 확실하게 파악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이제 출장은 끝났다.

휴가만이 남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급실을 당당히 통과하고자 했다. 단,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배운 것이 없다면 바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매 순간 동안 김지훈은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뿔싸!

분명 몇몇 환자들만 누워 있었는데 그사이 단체 교통사고 환자가 들이닥쳤는지 응급실이 난리가 났다. 그 와중에 흐릿하지만 분명 낯익은 얼굴까지 보였다.

“샘! 김지훈 샘 맞죠?”

“어? 이 선생? 아직도 근무 중이네요.”

“쌤! 과장 된 거 안 보여요? 그리고 반갑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대낮에 단체 교통사고는 또 뭔지 모르겠네.”

전공의 때 보았던 간호사가 이젠 간호 과장을 하고 있었다. 무척 반가웠지만 간호 과장이 와야 할 만큼 응급실이 바쁘단 말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력이 부족하긴 마찬가지구나. 하긴 간호 선생들 처우가 크게 좋아지지 않았는데 당연한 일이겠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뭔가 감이 안 좋았다.

서둘러 응급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환자를 보던 일반 외과 과장까지 달려와 인사를 했다. 수술복을 입은 채였고, 가운은 아예 피투성이였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내려와 바이탈이 흔들린 환자의 급한 불을 끈 모양이었다.

왠지 등짝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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