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하루하루 빠르게 흘렀다.
봉규민 환자의 회복이 놀라웠다.
통상 메이저라 불리는 수술보다 몇 배나 더 큰 수술에도 불구하고 흔한 합병증 하나 발생하지 않았다. 중환자실에서 는 의지를 잃지 않았고, 일반 병실로 올라와서도 의료진의 지시를 철저하게 이행한 덕이었다.
‘저렇게 운동 열심히 하는 환자도 처음이네.’
비단 운동만이 아니라 스무 살이란 젊음이 주는 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모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과적으로 불과 삼 주도 안 돼 퇴원 날이 정해졌다.
“이번 주말에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환자분, 보호자분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번 주말에요?”
봉규민이 뛸 듯이 기뻐했다.
생사의 기로에 섰던 내내 굴하지 않고 싸워 드디어 삶의 길로 확실하게 들어선 것이다. 김지훈에게도 유난히 큰 의미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모든 병원이 고개를 저었어도 우리 병원의 힘으로 포기하지 않고 살려 낸 환자다. 이 정도면 최고의 수술 팀이라고 자부해도 되지 않을까?’
평생의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부모 모두 또 눈물을 보였다.
“감사합니다. 감사…….”
그토록 원했던 일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건만 엄마는 울기 직전이었다. 아버지 역시 눈시울을 붉힌 채 울먹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종양을 제거하지 못하면 죽음만을 기다려야 했던 자식이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온 병원에서 김지훈을 만나 무려 열다섯 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
중환자실은 부모에게도 공포였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후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지만 의료진의 경고는 사라지지 않았다. 부모 마음은 항상 불안하고, 초조했을 것이다.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직 퇴원해도 된다는 말만 기다렸고, 드디어 오늘 김지훈에게 간절히 원했던 말을 들었다. 이제야 단 하나뿐인 자식이 살았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북받치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오히려 봉규민이 부모를 달래며 조용히 자신의 문제를 이어 갔다. 수술 직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스무 살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침착했다.
“선생님, 항암 치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대개 부모가 먼저 물어보는 사안인데 환자가 먼저 물어보다니, 정말 여러모로 나를 놀라게 하네.’
“수술이 깨끗이 됐고, 조직 검사 결과도 나쁘지 않지만 눈에 안 보이는 세포까지 제거하는 게 좋겠죠? 다만 지금은 체력적으로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아 내과 진료 후 적정한 시간을 정해 시행하면 될 것 같아요.”
“예.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병실을 나서자 부모가 헐레벌떡 따라 나왔다. 아직도 벌게진 눈가를 지우지 못한 채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했다.
“선생님, 우리 아들 이제 괜찮은 거죠?”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은 거죠?”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 같아도 똑같이 행동했겠지.’
몇 번이고 부모를 안심시킨 김지훈이 공연한 불안을 주고 싶지 않아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때 봉규민의 아버지가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식사라도 하십시오. 그동안 경황이 없어 감사 인사도 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때 당연한 일이었고, 우리나라 특유의 정서라고도 불렀지만 지금은 의사 윤리에 반하는 일이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성의만 받겠습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를 살려 주셨는데…….”
“정 그러시다면 우리 간호 선생들이 가장 고생이 많습니다. 돈 대신 간단한 다과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와이셔츠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수 없다는 거 잘 아시죠? 역시 마음만 받겠습니다.”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오래간만에 본 봉투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손사래를 치며 정색을 했겠지만, 그 속에 있을 마음이 이상하게 고마웠다. 부모 이상으로 초조했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아드님에게 건강이란 선물을 드리고, 그 이상의 기쁨을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일이 즐거운 일을 또 불렀다.
신현수와 만났다.
정식으로 신규 교수 임용 인원과 다음 해 펠로우 선발 인원을 확정지었다. 모든 과가 원하는 인원을 보장받았다. 이혁원, 나종진, 오만석 역시 바라던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게 될 것이다.
“오케이! 우리 병원 출신 교수를 처음으로 배출하는 거라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을 써전들이니까 잘할 거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원하는 것은 뭐든 최선을 다해 이행할 테니까 지금처럼만 끌어가 줘. 모든 병원이 빨리 안정돼야 나도 본격적으로 복귀할 수 있을 텐데 부탁한다.”
써전의 목마름이 보였다.
‘이사장 자리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있구나. 이렇게 되면 라이벌 한 명이 사라지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일에 치여 수술을 안 할 현수가 아니잖아?’
“종합 병원 스텝들은 언제 뽑을 거야? 지금쯤이면 시작해야 하지 않나?”
“다른 과는 이미 진행하고 있어. 안 그래도 오늘 온 김에 우리 과 구성과 인원 선발을 부탁하려고 했어.”
김지훈이 펄쩍 뛰었다.
“우리 병원 교수들 말고 다른 파트 교수들까지 섭외하라고? 한두 명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해?”
간 이식, 간담췌, 복강경, 소아 외과 분야가 주력인 전문 병원이었다. 위장관, 대장, 혈관, 유방 및 갑상샘 등등의 파트까지 챙겨야 한다면 사람 만나느라 시간을 다 보내야 할 것이다.
“공고는 우리가 낼 테니까 면접만 봐. 물론 특별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섭외해야겠지?”
순간 오하석이 떠올랐지만 한 명 잡자고 덜컥 승낙했다가는 배보다 배꼽이 커질 판이었다.
“안 돼. 나머지 파트는 본원에서 해결하는 것이 맞아. 수술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제대로 평가나 할 수 있겠어? 솔직히 이준영 선생님 말고 사람 제대로 볼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잖아.”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누구나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 뽑아 입지를 단단히 할 기회로 삼았을 텐데, 지훈이 너도 참 안 변한다. 하긴 일석이나 경석이 형도 다르지 않긴 하네.’
김지훈 입장에서는 불길한 행동이었다.
“구미로 출장 간다며?”
말속에 담긴 비수에 뜨끔했다.
“산업 의학과야 상황이 특수하잖아. 우리 병원 공사 중에……. 그 뭐냐. 주변에 공장도 많고…….”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너도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학교 다닐 때도 배운 적이 없는 산업 의학과를 만들 수 있는데 가장 잘 아는 우리 과 교수는 선발하기 힘들다? 이게 말이 되나?”
“그… 그래서 출장을 가잖아.”
“사람 보는 눈이 없는데 혁원이, 종진이, 만석이 추천도 모자라 진우는 아예 예약을 해? 내가 지금 누구를 믿고 교수 임용을 약속한 건지 모르겠다.
“다 너도 아는 후배들이잖아. 그게…….”
김지훈이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연거푸 말을 더듬었다.
신현수가 한 번 더 안경을 고쳐 썼다.
섬뜩한 행동이었다.
“전문 병원의 독립성을 가장 강하게 주장하며 종합 병원 설립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너야. 게다가 다른 병원 모두 원장단이 의료진, 특히 교수와 간부진 선발을 직접 관리하는데 김 부원장이 방관해도 되는 이유가 있어? 있으면 하나라도 대 봐.”
“난 전문 병원만…….”
“하던 일 이어서 종합 병원 부원장을 맡아야 된다는 말 못 들었어? 민 부원장이 대놓고 말은 안 했다고 해도 신호는 계속 보냈을 텐데.”
김지훈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신현수는 논리로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사실 애써 외면했지만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아 왔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신현수를 비롯해 이사진의 뜻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행정적인 일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종합 병원 부원장을 맡게 되면?’
알아서 잘 굴러가는 상황이면 몰라도 신설 병원이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모든 시간을 뺏길 것이다.
‘안 돼. 내 길이 아니야. 행정 일은 지금으로도 충분해. 나 말고도 할 사람이 많아.’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현수야, 그 문제는 정말 신중하게 생각해야 돼. 그리고 너도 라인이라는 걸 만들면 안 될까? 나처럼 요구 사항만 많은 사람보다 마음이 착착 맞는 사람을 부원장으로 임명하면 훨씬 편하잖아.”
“라인이라! 맞는 말이야.”
“그치? 그렇게 하면 돼.”
“이미 그렇게 하고 있잖아?”
“뭐? 무슨 소리야?”
“너, 일석이, 경석이 형, 민 부원장이 내 라인이야. 진충기 선생님도 우리 라인에 반쯤 발을 걸쳤고. 이만하면 전문 병원은 물론 종합 병원까지 마음 맞는 사람과 만들어 가는 거 아니겠어?”
김지훈이 뻥끗거리려 하자 신현수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결코 친구 사이의 농담이 아니라 재단 이사장의 결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잔말 말고 종합병원 부원장은 물론 원장까지 맡아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여. 넌 평생 내 라인이야. 억울하면 네 라인에 날 넣으면 돼.”
‘헉! 지금 원장까지라고 한 거야?’
혹 떼려다 혹 붙였다.
너무 무거워 어깨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유일한 위안은 종합 병원 완공까지 시간이 남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사이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 혜성처럼 나타나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도 있었다.
‘혜성은 아니지만 일석이?’
바람일 뿐이었다.
결국 자칭 신현수의 라인 모두 일반 외과 구성 결정 및 그에 따른 교수 선발에 참가하는 것으로 잠정 결정했다. 서너 명이 나눠 할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뒷덜미를 뭔가가 잡아채고 있었다.
수렁이었다.
한 번 발을 담근 이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형국이었다. 이렇게 가다간 대가를 향한 꿈 대신 의료 행정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얻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알고 간다. 구미 출장 잘 다녀와. 일 빨리 끝내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 보내.”
“고맙다. 멀리 안 나간다.”
“이사장을 대하는 태도가 영 불량하네. 누구 라인인지 잘 생각하고 다음에는 예의 갖춰. 그럼 이만!”
난리 났다.
신현수가 농담을 던졌다.
민정호의 전매특허까지 도용했다.
오늘 먼 거리를 달려온 보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이행할 수밖에 없는 요구 사항을 들어주는 대신 원하는 바를 모두 이뤘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이 한숨만 내쉬었다.
의사라면 누구나 원하는 자리를 준다는데 왜 기쁘지 않은 걸까? 스승의 영향이 아니라 원래 비슷한 성향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별난 사람 많지 않은 법이었다.
“어머! 어머! 이사장님 너무 멋지시다. 역시 보는 눈이 대단하시네요. 우리 남편도 너무 멋져요. 원장님까지 되면 바랄 것이 없겠어요.”
‘마님까지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우리 과장님도 부장님 되셔야죠.”
“그래야 어울리겠죠? 이럴 때가 아니네. 인정받는 책임자가 되려면 당장 내일 수술과 모레 강의부터 철저히 준비해야겠죠? 호호호!”
고경아가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평범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스스로 특별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김지훈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부원장에 원장까지 하며 내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어후!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네.’
지금도 원장이란 명칭보다 대가라는 말을 더 듣고 싶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지도 몰랐다. 큰 스승님, 허경발 교수처럼 말이다.
힘차게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은 고민할 일이 아니었다.
일에 집중하는 순간만은 골치 아픈 일도 잊히기 마련이었다. 무척 기쁜 일이 연이어 벌어지면 아예 사라질 수도 있었다.
봉규민이 건강한 얼굴로 퇴원했다.
끝까지 좋아하는 색을 말하지 않았고, 단호한 어조로 선물은 절대 안 된다는 말까지 전했다. 그런데 부원장실 앞에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하얀 와이셔츠 두 벌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손 편지가 보였다.
의사가 된 이후 환자에게 처음 받는 편지였다. 또박또박 쓰인 글자 하나하나를 읽어 내려갈 때마다 감동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아! 정말 평생 못 잊을 환자네.’
그런 환자가 한둘일까?
흔하지만 결코 흔할 수 없는 와이셔츠를 보는 순간 오지랖 넓은 환자까지 생각났다. 덕분에 음성 생활이 정말 즐겁고 알찼었다.
‘음성은 정말 잊을 수가 없는 곳이네.’
가슴이 뿌듯해졌다.
의사는 환자의 건강과 마음을 먹고 사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야말로 아무리 힘든 경우라도 끝내 웃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라인은 개뿔. 신현수 이사장님, 이래서 환자만 보고 싶다는 겁니다. 에휴! 이걸 어떻게 말로 설명하나!’
투덜투덜 불평을 해 댔지만 마음은 가볍기 짝이 없었다. 다음 진료 때는 더욱 환한 얼굴로 봉규민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