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72화 (1,272/1,329)

18화

고경아의 표정이 묘했다.

“경아 씨, 민 부원장에게 얘기 들었죠?”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만 특혜를 받는 것 같아서 찜찜하네요. 지훈 씨는 그런 생각 안 들어요?”

김지훈이 짐짓 모른 척했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전문 병원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면 부부 모두 몇 손가락 안에 충분히 들고도 남았다. 더구나 원장과 과장의 특별한 허락까지 받은 마당이었다. 동료들 역시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민 부원장이 어떤 사람인데 자격도 없는 사람에게 출장을 핑계로 휴가를 제의하겠어요? 경아 씨나 나나 그동안 정말 힘들게 일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설마 간호 부장님이 허락 안 하신 건 아니죠?”

“일정 조정만 잘하라고 그러셨어요.”

“다른 선생들은요?”

“특별한 말은 없었어요.”

“오케이! 그럼 다 된 거네. 이거 확실히 휴가 아닌 휴가 맞죠?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일 깔끔하게 끝낸 후 간만에……. 흐흐흐! 즐길 수 있을 때 즐깁시다.”

김지훈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음탕하게 웃었다. 흠칫 놀라며 째려보던 고경아도 이내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부부의 입이 귀에 걸렸다.

“우리 일이 언제 끝날지에 달렸지만 미리 준비하면 설마 사흘이나 필요하겠어요? 난 단 하루만 시간이 나도 좋아요. 희연이도 좋지?”

“와! 신난다. 경주! 경주!”

희연이가 깡충깡충 뛰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희연아, 아빠가 미안해. 자주 나가자. 그런데 경주는 뭐지? 벌써 계획을 짰나? 이러다 구미에서 일이 많아지면 어쩌려고 그러지?’

엄마, 아빠와 함께 많은 것을 보고 함께해야 할 시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소홀했다. 자식을 위한 부모의 희생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실행한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자식 키우는 일이 훈장도 아니고,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인데 희생이 될 수는 없겠지. 희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자식에게 원하는 것만 많아질 것이다. 제때에 스스로 설 수 있으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있을까?’

잠시 심각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걱정은 그때 가 할 일이었다. 세 식구 모여 밥 먹기도 힘든데 여유롭게 저녁만 즐길 수 있어도 좋았다. 흐드러진 벚꽃 길이 아니더라도 한가함이 주는 즐거움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끔은 이런 일이 옛 물건을 버리고 새 물건을 장만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달랑 구미만 가는 일이면 기차가 편하겠지만 경주를 경유한다면 자가용이 편한 법이었다.

고경아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지훈 씨, 우리 차 바꿔야 할 때가 지나지 않았어요? 아니다. 나도 강의 때문에 차가 필요하니까 이번 기회에 한 대 더 마련해요.”

“새 차?”

많은 남자들에게 차는 로망이다.

김지훈도 다르지 않아 출퇴근길에 힐끗힐끗 새로 출시된 차를 보곤 했다. 딱히 절실하지 않은 데다 슴5에 너무 정이 들어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제네시스가 좋대요.”

“제네시스?”

‘아니, 이 아줌마가 경주에 제네시스까지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한 거야? 다른 사람 눈치 본 거 맞아?’

나이 들어 아저씨, 아줌마 소릴 들을 때가 되면 젊었을 때와 비교해 생각이 많이 달라진다. 때론 뻔뻔하게 보이는 일도 자연스러워질 때가 된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당연한 일이어도 괜찮았다.

어쨌든 생각만으로도 짜릿했다.

물론 더 크고 좋은 차가 있지만 외제 차를 선호하지 않는 한 최고의 선택이었다. 오죽하면 출시 이후 제네실수라는 말이 돌고 있을까?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진지하게 상의할 필요도 없이 주말에 대리점을 찾아 상담을 받기로 했다. 물론 평소에는 안전을 위해 고경아가 주로 몰겠지만 가족 여행 때만이라도 운전대를 잡으면 바랄 것이 없었다.

고경아가 중얼거렸다.

“민 부원장님은 갈수록 사람이 달라 보여요. 속도 깊고, 잔정도 꽤 있는 것 같죠?”

“처음 봤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되죠. 사람은 역시 겪어 봐야 아는 모양이에요.”

“평생 보아도 괜찮은 사람인 건 분명하네요.”

맞는 말이었지만 허구한 날 보는 민정호였다.

김지훈의 관심은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

‘새 차를 타고 출장과 휴가를 간다?’

카르페 디엠!

그 시간.

민정호가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었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예방 의학과 확대와 관련된 일인데 내가 발 벗고 나서야지요. 다음 주 내에 필요한 자료 모두 보내 드리겠습니다.)

“다른 인력과 시설까지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세요. 김 부원장님이 오셔서 할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한 달 후 목요일에 시간 비워 놓을 테니 약속만 잘 지켜 주면 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민정호가 어딘가를 보았다.

‘부원장님, 알면 알수록 절 놀라게 하시는군요. 다른 병원이 다 포기한 환자를 위해 열다섯 시간이 넘는 수술을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동안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쉴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조그만 성의지만 재충전할 기회가 됐으면 합니다.’

선대 이사장과 맺은 인연이 여기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살아생전 그의 기억 속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실로 소중한 인연이었다. 그 덕에 김지훈과 신현수를 알게 됐고, 돈이 아닌 명예와 자부심을 위한 일에 매진할 수 있었다.

만약 진상건을 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죽은 사람이 돈과 권력을 가진 산 사람보다 훨씬 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을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선대 이사장부터 박재순 회장까지 우리는 그런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거창한 기부나 숭고한 뜻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충분할 것이다. 어쩌면 당당한 태도와 정당한 방법으로 스스로의 앞날을 개척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몰랐다.

‘이사장님, 편안히 쉬십시오. 종합 병원이 완공되는 날,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현 이사장님과 김 부원장님을 도와 우리 병원을 굴지의 병원으로 만들겠습니다.’

민정호가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

일복의 화신!

당직 때마다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응급실, 덩달아 밤을 새워야 하는 직원들, 짧다고 해야 매번 서너 시간 이상 걸리는 수술까지 적당하면 모를까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던 김지훈은 사실 피하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런 김지훈이 더욱 눈치를 봤다.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결정이라지만 출장인 듯, 휴가인 듯 애매모호한 3박 4일의 일정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꼴이었다.

어느새 소문까지 퍼졌다.

이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업 의학과 때문에 구미 병원으로 출장 가신다면서요? 그게 정확히 언제예요?”

“한 달 후인데, 왜?”

손가락을 꼽으며 곰곰이 계산을 하던 이혁원이 갑자기 히죽 웃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아주 좋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한 달 후면……. 내 당직이 김지훈 선생님과 겹칠 때인데 이게 웬 횡재야? 나흘은 무조건 편하겠구나.’

“왜 웃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손일석이 피식 웃었다.

‘일 빨리 끝내고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 넌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출장이란 탈을 뒤집어쓴 휴가라! 부럽다.’

“그놈의 일복이 순순히 사라질까? 우리 병원은 몰라도 구미 병원이 대신 뒤집힐지 몰라. 김 부원장, 인사한답시고 응급실에 들르는 만행은 저지르지 마라.”

“거기까지 가서 응급실에는 왜 들러?”

“참새와 방앗간, 고양이 앞의 생선, 떡 본 김에 제사, 뭐 그런 주옥같은 말들이 쭈욱 떠오르지 않아?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예방 의학과에만 일 던져. 고 과장님 일 처리에 속도 맞추는 거 잊지 마. 참! 희연이도 데리고 갈 거야?”

“흠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처제한테 미안해서라도 데려가야지. 번갈아 보면 되지 않겠어?”

“그럼 난 정훈이하고 격렬한 시간을 보내 볼까? 자식이 힘이 얼마나 센지 한눈만 팔면 집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서 죽겠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다들 일하러 간다고 철석처럼 믿고 있었다.

물론 가 봐야 알겠지만 전체적인 개요가 중요해 몇 날 며칠에 걸쳐 상의할 시기가 아니었다. 더구나 민정호가 구미 예방 의학과에서 보내온 자료라며 서류까지 전해 준 마당이었다.

‘이렇게 되면 일이 더 주는데, 민 부원장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일석이까지 똑같은 생각을 하지? 은근히 더 미안해지네.’

손일석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차트에만 눈길을 주었다. 응당 뭔가 수상쩍은 구석을 예리하게 찔러 와야 마땅했다. 눈치를 보느라 평소와 다른 태도가 더 이상하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여하튼 입조심해야 할 때였다.

하나는 빼고.

“손 교수,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약속했던 소 사려고?”

“차 새로 사려고 하는데, 겸사겸사 저녁도 먹을 겸 같이 갔으면 해서.”

“새 차? 휴(가)……. 흐흠! 출장 가기엔 구미가 멀긴 하지. 슴5가 거의 똥차가 되어도 좋다고 몰더니 더 이상은 못 버티는구나. 잘 생각했어. 이참에 와이프 꼬셔서 나도 차를 갈아 봐?”

로망에 불붙었다.

마침 일과가 모두 끝나 오후 회진을 마친 교수부터 펠로우까지 우르르 몰려들었다. 독일 삼사부터 시작해 스포츠카까지 온갖 차가 다 입에 올랐다.

“차 몇 대를 굴려도 될 형편이 아닌 이상 이때 아니면 스포츠카는 때려 죽여도 못 몬다니까요. 희연이 어렸을 때 지르시죠.”

“트렁크가 너무 작아서 안 돼. 웬만큼 짐 실을 수 있고, 드라이빙의 재미와 퍼포먼스까지 동시에 즐기려면 역시 독 삼사야.”

“저기… 제네…….”

“쟤네가 뭐 어쨌다고? 하여간 차를 사려고 마음먹은 지금이 정말 중요해. 순간의 선택이 십 년을 좌우할 수도 있어. 월급도 꽤 되는데 확 질러. 그래야 나도 말을 꺼낼 수 있잖아.”

다들 국산 차 타면서 꿈은 컸다.

머리 아픈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모처럼 입에 오른 공통 관심에 퇴근 시간도 잊고 설전을 벌였다. 성격만큼 차를 보는 시각이 다양했다.

김지훈이 슬며시 손일석을 끌어냈다.

정작 차 산다는 사람이 사라지는데 다들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대세는 외제 차였지만 마음속으로 정한 차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했다.

“뭐? 제네시스? 차 잘 나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너무 물렁하고, 푹신푹신하대. 그런 차는 더 나이 먹어서 타도 되잖아.”

“에휴! 난 편하게 탈란다. 애 태우고 레이싱이라도 할래? 한때 무섭게 밟았던 홍재순 선생님도 이젠 정속 주행 한다잖아.”

“재순이 형 차는 제네시스보다 한 급 위인데 어디다 비벼? 그 정도 사이즈는 원래 그렇게 타는 거야. 너무 빨리 결정하지 말고 이 차, 저 차 다 둘러봐. 그래야 후회 안 한다.”

‘그래. 네가 차 박사다. 박사.’

말로는 뭘 못 살까?

재빨리 저녁 먹고 영업점을 찾았다.

당직 직원이 나와 친절하게 설명했고, 질문은 주로 손일석이 했다. 덕분에 편의 사양, 옵션부터 가격과 연비까지 꼼꼼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만한 차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금 계약하면 언제 나와요?”

“색상과 옵션만 맞으면 일이 주 안에도 가능합니다. 원하시는 차량이 없으면 한 달 이상 걸릴 수도 있고요.”

“차는 좋아 보이네.”

“그럼요. 솔직히 우리 회사에서 만든 기존 차량과 많이 다릅니다. 날짜 주시면 시승도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처형, 잘 들으셨죠? 몇천짜리 차를 사는 거니까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세상은 넓고, 볼 차는 많습니다.”

당직 직원이 정색했다.

“손님이 사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잠재적인 고객이죠.”

정작 차를 사야 할 김지훈은 뒷자리를 지켰지만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분간 슴5면 된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경아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경차 사러 갔다가 대형 세단 계약했다는 말이 있지만 자신의 형편에 맞춰 사야 어떤 차를 사도 기쁜 법이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흡족해하는 모습에 하마터면 바로 계약하자는 소리가 나올 뻔했다.

“잘 봤습니다. 갑시다.”

“벌써 아홉 시가 다 됐네. 밥을 너무 빨리 먹었나. 배가 너무 허전해. 아! 소! 소가 아니었구나. 아니지. 차 턱까지 겸하면 투 플러스로 갈 수 있네. 아들! 이모부가 맛있는 고기 사 주신단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쳤다.

피식 웃음을 머금던 김지훈이 가벼운 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이제 그 값을 하나둘 받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식구라는 사실이 고마웠다.

‘일석이 말마따나 다른 차도 볼까?’

그날 밤.

고경아와 진지한 상의를 거듭했다.

딱히 선호하는 차나 회사가 없는 데다 외제 차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았다. 마음이 거의 기울었고, 마지막으로 고경아의 결정만 남았다.

“정말 내가 결정해도 돼요?”

“돈 가진 사람이 왕이죠.”

“나중에 딴말하기 없어요.”

“우리의 애마만 잘 보냅시다.”

“중고로 팔면 얼마라고 했더라? 보험료에 세금도 만만치 않을 텐데 할부가 좋을까요?”

고경아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불과 이틀 만에 결정했다.

오랜 시간 발이 돼 주었던 차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과 신차 냄새 가득한 새 차를 산다는 잔잔한 흥분 속에 하루를 정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