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63화 (1,263/1,329)

9화

모든 발표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김지훈은 학회장으로서 내과, 마취과, 간호과, 행정 부분의 발표장에 적극 참석해 각 분야의 의견을 청취하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었다.

외과 논문 중 관심이 가는 부분을 빼놓지 않았고, 다양한 방식의 치료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한편으로 간 이식의 중추인 부산 병원과 H 병원의 발표에 많은 신경을 썼다. 향후 학회를 이끌어 가야 할 부학회장과 경기복 과장에게 힘을 실어 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두 병원 모두 만만치 않네. 경기복 과장님도 야심 이상으로 많은 준비를 했어. 저런 욕심이 오히려 학회를 크게 발전시킬지도 모르겠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고경아의 논문이었다.

발표 시간이 되자마자 맨 앞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행여 질문이 적어 분위기가 썰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간호사들만이 아니라 의사들의 질문이 의외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여러 이유로 전담 간호사 육성의 어려움이 적지 않은 현실 때문이었다.

“간 이식의 특성상 수술 도중에 손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교대가 가능한 다른 수술에 비해 몇 배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가 간호과 선생들의 잦은 이직 혹은 퇴직과 맞물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열정과 사명감에 호소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인력 확보와 처우 개선이 핵심입니다.”

의사와 병원의 관심을 촉구했다.

처우 개선이 단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님을 명확히 제시했다.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수직적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변화시키고, 자각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발표 내내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김지훈이 뿌듯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마님 대단하네. 역시 교수님을 하고도 남아. 간호 부장님도 긴장하셔야겠네.’

어느 조직이나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후배는 선배를 바짝 긴장시키기 마련이었다. 특히 연줄이나 인맥이 아닌 능력으로 말하는 후배가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객관적인 인사를 시행한다면 말이다.

어쨌든 능력 있는 아내는 남편의 자랑이었다. 은근슬쩍 주변을 바라보며 자랑할 곳을 찾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맨 뒤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경황 중에 인사한 후 행방이 묘연했던 고성문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아버님! 아까부터 선생님들께서 찾으셨는데 어디 계셨습니까? 큰 스승님도 궁금해하시는 눈치였습니다.”

“중간에 만나서 말씀드렸으니까 걱정하지 마. 들어야 할 발표가 한두 개여야 말이지. 우리 고 교수도 발표 잘했지? 조금 늦게 들어왔더니 벌써 끝났네.”

“그럼요. 깜짝 놀랄 정도로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원주에서 서울까지 달려왔는데 딸의 발표에 늦었을 리가 없었다. 짐짓 태연한 척했지만 으쓱거리는 어깨와 한껏 걸린 미소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없이 왜 웃어?”

“아닙니다. 시간을 못 맞추셨다니 서운하시겠어요. 곧 점심시간이니까 그때 고 교수를 보시면 되겠네요.”

“학회까지 와서 딸자식 챙기면 사람들이 눈치밖에 더 주겠어? 봐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원주가 촌구석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올라오기 힘든지 모르겠네.”

‘하긴 재야의 고수이신 데다 인맥 넓다고 소문난 분인데 이런 기회를 놓치실 리가 없지.’

고성문만의 일이 아니었다.

점심 식사 시간 내내 김지훈을 비롯해 몇몇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다음 일정 준비도 바빴지만 아직 인사조차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안녕하십니까? 감사합니다.”

두 마디 말이 입에 붙었다.

휴식도 없이 오후 일정을 이어 갔다.

각 병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만들어 낸 작품인 논문 발표가 하나둘 끝났다. 창립총회를 겸하는 이상 간단한 마무리로 끝나는 여느 학회와 달리 폐회식을 정식으로 치렀다.

“이상으로 간 이식 학회 창립총회를 마치겠습니다. 간소하나마 기념품을 준비했으니 빠짐없이 가져가시길 바랍니다.”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참석자들의 얼굴이 밝았다. 단지 하나의 행사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제각각 얻어 가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

와이셔츠가 축축했다.

바삐 움직인 탓도 있겠지만 생각 외로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이런 행사를 주관하고, 진행하는 일이 간단할 리 없었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도 다르지 않았다.

“후우! 어깨가 다 뻐근하네. 사회 보는 일까지 이렇게 힘들지 몰랐어. 이제 끝난 건가?”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끝내야 정말 끝나는 거지. 뒤풀이 때문에 선생님들과의 자리는 뒤로 미뤄야겠어.”

“스승님하고 술 한잔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다. 허경발 선생님에 장인어른까지 오셨는데 얼굴은 비쳐야 하지 않겠어?”

진충기 교수도 아쉬워했다.

“간만에 선생님들께 인사드릴 기회였는데 상황이 안 되네요. 허경발 선생님 말씀도 듣고 싶은데 많이 아쉽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공과 사를 구분해야 했다.

학회 일을 우선하는 것이 마땅했다.

“죄송하지만 간단한 인사로 끝내자. 부학회장님부터 많은 분들이 지방에서 올라오셨는데 예의가 아니지. 사무처 직원들도 챙겨야 하잖아.”

결국 다음 자리를 기약하고 인사로 끝냈다.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김지훈과 손일석을 보던 송재덕 교수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우리하고 가는 게 더 이상한 일이야. 더. 경우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당연히 학회 사람들과 술 한잔해야지. 멀리서 모신 분들이 많잖아. 괜찮다. 괜찮아. 혁원이 결혼식 때 보면 된다. 얼마 안 남았어. 얼마.”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큰 스승님과 함께…….”

“선생님들께 미리 양해 구했다. 다들 이해해 주셨으니까 다시 한번 말씀드려.”

“알겠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다.

연로한 스승을 보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자주 찾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게다가 당장 건강해 보여도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는 나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김지훈과 손일석이 허경발 교수님께 인사를 드렸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던 허경발 교수가 약간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충기 교수를 보며 뜻밖의 말을 했다.

“진충기 선생님이시죠?”

“예. 전문 병원에서 간 이식 파트를 맡고 있는 진충기입니다. 먼저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모두가 신뢰하는 선생님이라고 들었는데 오늘 직접 뵙게 돼 제가 영광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대가 중의 대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들었다.

진충기 교수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손 교수, 진충기 선생님과 실무 작업을 다 했다고요? 덕분에 눈과 귀가 너무 즐거웠습니다. 다음번 학회도 기대가 됩니다.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연이은 칭찬이었다.

손일석의 입이 쭉 찢어졌다.

허경발 교수가 김지훈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김지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하게 한마디만 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 동시에 웃었다.

허경발 교수에게 김지훈은 영원한 제자였다.

어마어마한 인연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인맥을 가진 김지훈이었다.

같은 병원 소속이라도 지연이나 학연 등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는 일이 적지 않은 의료계였다. 큰 행사를 치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분열로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도 많았다.

오늘은 확실히 달랐다.

허경발 교수부터 시작해 자신의 분야에서 대가로 불리는 스승들은 물론 쟁쟁한 동기들과 후배들 역시 협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뿐인가?

부산 병원 및 H 병원 소속 의사들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산재한 의료진과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개중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호의적이라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불타는 정의감을 가진 검사, 언론의 사명을 잃지 않은 언론인과의 관계도 돈독하기 짝이 없었다.

큰 힘이 되고도 남았다.

지금처럼 사심 없이 전체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면 말이다. 그것이 곧 김지훈 개인의 발전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뒤풀이 자리로 향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평생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스승의 등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의 빈자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새삼 달라진 위치와 입장이 떠올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승 옆에 서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은 물론 손일석까지 각자 책임져야 할 사람을 먼저 챙겨야 했다.

단지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학회장 혹은 임원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제대로 살아왔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고, 가족과 동료들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대우한 덕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달랐다.

‘후우! 당연한 일일 텐데 왜 이렇게 아쉽지?’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뒤풀이에 집중할 때였다.

단지 술 먹고 노는 자리라면 적당히 끝내도 되겠지만, 창립총회를 결산하고 정리하는 자리였다. 더구나 외과만이 아니라 각 분야의 대표들이 모두 참석했다.

고경아도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짝짝짝짝짝!

학회장을 환영하는 박수가 이어졌다.

즐거우면서도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가볍게 오고 가는 한 잔의 술이 서로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했다. 가장 껄끄러운 경기복 과장과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다음 학회에 대한 기대감이 폭발했다. 상대 병원의 논문을 접한 것이 상당한 자극으로 작용했는지 학술적인 내용까지 입에 올랐다.

원하던 바였다.

‘이것만으로도 대성공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지방으로 가야 할 사람들이 출발할 시간이 됐다. 오늘 같은 날, 가야 할 사람 가고 남은 사람은 먹고 놀자는 분위기로 흐르면 예의가 아니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다음 학회 때 뵙겠습니다.”

김지훈이 일일이 인사를 했다.

이로써 창립학회가 모두 끝났다.

후련하면서도 섭섭했다.

진짜 평가는 참석한 모든 이들이 내려 줄 테지만,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생각과 이 정도면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수시로 교차했다. 무엇보다 학회장을 대신해 모든 일을 준비하고, 추진한 손일석, 진충기 교수, 민정호에게 고마웠다.

“일간 술 한잔합시다. 손 교수, 선생님들 자리도 끝났다니까 우리하고 같이 가자.”

“어후! 피곤해. 빨리 가서 씻고 자자.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학회장님의 약속 잊지 맙시다.”

내일이면 얼굴 또 볼 텐데 다시 못 볼 사람처럼 악수를 나눴다. 어려운 일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가뜩이나 진했던 동료 의식이 더욱 강해지는 순간이었다.

부우우웅!

김지훈의 눈이 감겼다.

손일석은 코까지 골았다.

긴장이 풀리는 순간 한 잔 두 잔 받은 술이 제대로 치고 올라온 탓이었다.

‘마님, 운전 부탁해요.’

몰려오는 졸음으로 머릿속이 몽롱하기만 한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학회장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후우! 후우!”

‘정말 멋진 하루였어!’

어느 순간 차창 밖 풍경이 흐릿해졌다.

유일하게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은 고경아가 강의 나가며 갈고닦은 운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오랜 시간 발이 돼 준 슴5가 연식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잘 달렸다.

***

일상으로 돌아왔다.

업무는 여전히 많았고, 피로가 가실 날이 없었지만 김지훈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행정적인 일에서 벗어나 환자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주에는 간 이식 한 건, 소아 수술 한 건에 다른 수술까지 모두 여섯 건이네. 모두 만만치 않은 수술이지만 다른 일이 없어서 그런지 부담이 훨씬 덜해서 좋다.’

김지훈이 수술 팀을 정하고, 계획을 짜는 내내 즐거운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마이너라면 모르지만 모두 메이저 수술이었다. 수술 전후로 신경 써야 할 일이 무척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봤으면 미친놈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것이다.

이왕 하는 일 즐겁게 하자!

덕분에 첫 수술인 간 이식 수술을 무사히 끝냈다. 환자는 잘 회복됐고, 이준영 교수의 신뢰를 받고 있는 오만석이 수술한 공여자 역시 별문제 없었다.

다음 날, 외래 진료도 순조로웠다.

의사에게 여유가 주어지면 환자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자칫 짜증이 날 수도 있는 질문까지 세세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마지막 환자가 남았다.

차트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성인인데 기형종이 의심된다고? 이건 또 뭐지? 설마 혈관종이 같이 발생한 거야?’

동봉된 검사 자료를 보지도 못했다.

임시 진단명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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