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62화 (1,262/1,329)

8화

달이 지고 해가 뜨기를 반복했다.

어떤 일이든 초반에 제대로 기초를 세우지 않으면 굴러가기 힘든 법이었다. 송진우와 한수영이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을 때까지 이끌어 나가야 할 소아 외과 일로 무척 바빴다. 오히려 주력 분야이자 전문 병원의 핵심인 간 이식과 관련된 업무가 적을 지경이었다.

“우리 과 내부적인 협조가 가장 중요하겠지만 소아과와의 호흡도 중요해. 강은미 선생과 일하는 데 문제없겠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체계가 잡혀 가며 간 이식 분야의 부담을 덜은 것처럼 소아 외과 역시 똑같은 길을 밟아 갈 것이다. 물론 송진우가 교수로 임용된 이후의 일이지만 말이다.

부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여전했다.

김진호 교수가 상당 부분 신경을 써 주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이 소속된 과의 업무가 있는 데다 고유의 일이 적지 않아 한계가 있었다.

‘바쁘다! 바빠!’

게다가 결정적인 일이 남았다.

창립총회였다.

평생 동안 단 한 번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행사였다. 개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점검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사흘 남았다.

관련된 모든 인원이 모여 최종 점검을 했다. 아쉽고 부족한 부분이 여기저기에서 보였지만 세상에 완벽한 일은 없기 마련이었다.

어떤 사람이 준비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좋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일요일 아침 늦지 않게 도착해 미리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어느새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전화와 메일 등 가용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해 의사소통을 해 왔지만 거리와 지리적 제약을 극복하기 힘들었다.

핵심 인물들이 모여야 할 때였다.

토요일 일과가 끝나자마자 전문 병원 인원이 대거 서울로 향했다. 김지훈을 비롯해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 재정과 행정 분야를 맡은 민정호에 다른 과 의료진까지 몇몇으로 국한된 규모가 아니었다.

창립학회가 예정된 컨벤션 센터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 각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속속 모습을 보였다. 일일이 맞이하며 인사를 한 김지훈이 부산 병원의 부학회장과 함께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했다.

“축사를 하실 분들께 최종 연락은 됐습니까? 진행에 문제는 없겠습니까?”

“허경발 교수님, 대한 의사 협회 회장님과 외과 학회, 간담췌 학회 학회장님을 비롯해 모든 분들의 참가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손 교수님께서 사회를 맡으신 이상 진행에 무리가 없을 겁니다.”

“논문 발표 좌장은 모두 정해졌습니까?”

“A. B. C. D. 총 네 개 회의실에서 논문, 케이스 발표까지 총 육십 건의 발표가 예정돼 있습니다. 해당 분야 선생님들께서 좌장을 맡으실 겁니다.”

의료적인 측면만 준비하면 끝이 아니었다.

점심 식사부터 찬조를 한 제약 회사, 의료 기기 회사의 행사 협의까지 일일이 점검했다. 가장 많은 일을 한 민정호의 능력이 돋보였다.

“어떤 면에서 가장 번거로우면서도 복잡한 일을 잘 수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밤늦게 회의가 끝났다.

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많은 이들이 컨벤션 센터가 있는 호텔에 묵어야 했다. 가장 먼저 행사를 준비해야 할 전문 병원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피곤에 지쳐 일찍 잠을 청했다.

김지훈이 조용히 발코니로 나왔다.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큰 행사를 앞둔 사람이 갖는 부담과 동시에 표현하기 힘든 벅찬 기분이 뒤섞였다.

흐린 하늘 어딘가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

서울 하늘에서 별 보기 쉽지 않은 지 오래였지만 어려서부터 부모를 대하듯 보았던 별을 찾았다.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밝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저 학회장 돼 내일 큰 행사를 개최합니다. 경아 씨도 잘 있고, 교수로서 중요한 역할까지 하네요. 희연이도 건강하게 잘 크고요.’

자신도 모르게 과거를 되짚었다.

부모님을 잃은 날.

의대에 진학한 날.

의사가 돼 인턴을 시작한 날.

갖은 어려움 속에 이준영 교수라는 큰 버팀목을 만나 전공의 수련을 마친 날.

전문의가 된 날.

교수로서 유학을 다녀온 날.

동료들과 함께 전문 병원을 만들고, 간 이식 분야의 선두로 나선 날.

마치 어제 일처럼 눈에 선했다.

무엇보다 고경아를 만나 평생을 약속하고, 희연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날은 생생하다 못해 눈앞의 일처럼 다가왔다.

성공한 인생일까?

‘어머니,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기준이 무엇인지 몰라도 성공한 삶 맞죠?’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삶이었다.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 부단한 노력이나 열정보다 가족과 동료들이 보내 준 사랑, 이해, 용서 덕분이었다. 내가 포함된 우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불행은 소리 없이 다가올 것이다.

경계하고 저어할 일이었다.

한동안 어둡지만 환하게 보이는 하늘을 보며 상념에 잠겼던 김지훈이 잠자리에 들었다. 때문인지 긴장과 부담 때문에 잠을 설칠 수도 있건만 푹 잤다.

띠리리리리리!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창립학회 아침이 시작됐다.

김지훈을 비롯해 각 분야 대표들이 말끔한 차림으로 귀빈과 참석자들을 맞이했다. 통상의 학회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오직 창립학회가 가진 특수함과 특별함이 주는 풍경이었다.

김지훈의 허리가 펴질 시간이 없었다.

인사와 덕담을 주고받기에도 벅찼다.

그 와중에 고개를 빼 들기 여념이 없었다.

‘왜 안 오시지?’

드디어 최고의 존경과 공경을 보내야 할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반외과의 선구자이자 일 세대를 대표하는 써전, 바로 허경발 교수였다.

김지훈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오셨습니까? 어려운 발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교수 일인데 내가 와야지.”

희끗한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 젊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느릿한 발걸음에도 불구하고 눈빛은 결코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회진을 도는 것처럼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전문 병원의 의료진에 송재덕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까지 뒤를 따랐다. 면면이 화려한 참석자들도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허경발 교수를 환영했다.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여전히 거인이었다.

일반외과를 대표하는 의사였다.

“선생님, 이리로 오시죠.”

김지훈이 직접 자리로 안내했다.

귀빈 자리에 첫 번째로 앉았다.

함께 축사를 할 귀빈들도 허경발 교수에게만은 존경의 눈빛을 보낼 것이다. 한 분야의 최고봉에 이른 의사는 모든 의사들이 이루고 싶은 꿈이 분명했다.

속속 자리가 찼다.

김지훈이 훅훅 숨을 내쉬었다.

가장 넓은 A룸이 행사장임에도 상당히 비좁아 복도마저 사람이 붐빌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참석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후우! 어깨가 더 무거워지네.’

사회자석으로 향하는 손일석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고, 서로 인사를 하느라 다소 소란스러운 장내를 진정시키는 일마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주목해 주십시오. 지금부터 간 이식 학회 창립총회 겸 학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일반외과 의사만이 아니라 관련된 과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두 함께했다. 같은 뜻과 생각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깊었다.

“학회장님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김지훈이 연단에 올랐다.

더 큰 박수가 터졌다.

허경발 교수, 이준영 교수, 송재덕 교수를 포함해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교수들의 얼굴이 보였다. 외과 원로이자 존경받는 교수들까지 자신에게 집중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순간 준비했던 원고를 모두 잊었다.

각종 행사 때마다 으레 듣는 형식에 불과한 말을 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짧고 굵게 이 자리가 갖는 의미를 강조하면 충분했다.

“먼저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학회 행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규정했던 울타리를 뛰어넘어 간 이식에 관련된 모든 분들과 함께 첫발을 내딛는 뜻 깊은 자리입니다. 중략…….”

짧고 굵은 말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다행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지 않았고, 참석자 모두 지루하지 않은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 스스로 다짐합니다. 공여자와 가족들이 행복한 웃음을 지을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간 이식을 하는 유일한 이유일 것입니다. 의료진에게 쏟아지는 명예와 찬사는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하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물심양면으로 창립 학회를 준비하고,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곧바로 축사가 이어졌다.

의사 협회 회장, 외과 학회 회장을 포함해 굵직한 직함을 가진 이들의 말도 의미 깊었지만 백미는 역시 허경발 교수였다.

“의사가 가야 할 길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처음 의학의 길에 들어섰을 때 가졌던 마음일 겁니다. 분야가 다른 분들께도 부탁드립니다. 내 직분이 무엇인지를 따지기 전에 모두 환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 의학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대가이자 원로의 말이었다.

또한 부탁이었다.

의사가 아니어도 병원에 근무하는 한 허경발이란 이름을 한 번쯤은 들었기에 모두 가슴 깊이 새겼다. 첫발을 내디뎠을 때 어떤 마음을 지녔는지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도 남았다.

이제 가장 중요한 행사가 남았다.

논문과 케이스 발표였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좌장을 맡아 발표를 진행시켰다. 일정표를 손에 쥔 참석자들은 자신의 관심 분야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가장 큰 반응을 보인 부분은 역시 간 이식 논문 발표였다. 특히 김지훈이 직접 좌장을 맡고, 이혁원이 발표한 논문에 초미의 관심이 쏠렸다.

“소아에 있어서 이식할 간의 적정한 무게는 어떻게 결정하십니까?”

“알코올성 간 질환으로 이식을 받은 환자의 최대 문제는 다시 술을 먹는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한 대비책은 어떤 식으로 세우고 있습니까?”

“수술 후 합병증에 대한 대처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특히 출혈이 발생했을 경우 재수술로 간을 살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혈관 기형이 동반된 경우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굴곡이 심할 때 어느 정도까지 제거하고 연결해 주는 것이 안전합니까?”

온갖 문제에 대해 빗발치듯 질문이 쏟아졌다.

간 이식을 해 오며 느낀 불안과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방증하고 있었다. 수술 건수가 적어 경험이 많지 않은 병원 입장에서는 심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이혁원 홀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김지훈이 적극적으로 답변했다.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성심성의껏 해결책을 제시했다. 간 이식 삼대 병원인 부산 병원과 H 병원 의사에게까지 거의 대부분 동의를 얻었다.

허경발 교수, 이준영 교수와 함께 조용히 지켜보던 송재덕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다 못해 너털웃음까지 터트렸다.

“스승님, 딱 부러지게 잘 대답하죠? 지훈이가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대장 하자는 말도 못할 지경입니다.”

“잘 가르친 덕분이겠지.”

“우리가 한 게 뭐 있겠습니까? 현수, 경석이, 일석이 다 아시죠? 아까 보셨잖아요. 이름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나이 먹었지만 다들 보통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나아요. 훨씬 낫습니다. 이 교수, 그래? 안 그래?”

이준영 교수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신기동 교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선생님, 애써 키운 혈관 전문의 채 가셨는데 일석이 제대로 가르치셔야 합니다. 김 교수 뛰어넘을 정도로 확실하게 말입니다.”

“다음 발표 봐.”

“기대하고 있습니다.”

“현수 입장이 애매모호해 큰일입니다. 이사장 일까지 많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김 교수도 부원장 맡아 힘들긴 마찬가지야. 각자 자기의 길을 갈 것이라고 믿어.”

영원한 라이벌이자 선후배로서 각자 자신의 제자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제자가 이사장과 부원장이라면 남들 모두 부러워할 일이건만 보는 눈이 다르긴 했다.

“에이! 지들 걱정하는지도 모르고 애들은 다 어디 있는 거야? 예전에는 옆에 딱 붙어 우리만 바라봤는데 이제 다 컸다 이거지? 신 교수, 그래? 안 그래? 서운하다. 서운해. 너도 그렇지? 그치?”

“일석이는 발표 준비 중입니다.”

“이사장인데 인사할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그런가? 그럼 경석이만 날 버린 건가? 그런 거야?”

결국 웃음이 터졌다.

허경발 교수가 마치 나이 먹은 아들을 대하는 것처럼 송재덕 교수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마음을 왜 모를까?

노쇠해진 자신을 보며 기억하기도 힘든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참된 스승과 진실한 제자는 그런 관계일지도 몰랐다.

짝짝짝짝짝!

“손 교수 발표합니다. 모두 집중해 주세요.”

신기동 교수의 눈과 귀가 활짝 열렸다.

이준영 교수가 돌연 고개를 뺐다.

‘경아 발표가 오후였지? 고성문 선생님이 안 오실 분이 아닌데 어디 계시지?’

간 이식 창립학회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동료들로 이어진 모든 인연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