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김지훈이 히죽히죽 웃었다.
스승과 함께한 수술을 생각하면 할수록 즐겁기 짝이 없었다. 대가라 불리는 써전과 호흡을 맞춰 완벽하게 수술을 끝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만 했다.
‘평생 배워야 한다는 말이 공연한 게 아니었어. 스승님, 다음에 꼭 기회를 만들 테니 집도하는 제 손도 봐주십시오. 문제가 있다면 꾸짖어 주시고, 달게 받겠습니다.’
감탄사까지 연발했다.
나름 써전으로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했다고 여겼건만 여전히 상당한 실력 차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같은 과정이라도 처리하는 손이 달랐다.
‘뭘까?’
이내 이유를 찾았다.
원숙함이었다.
경험의 학문이라 불리는 의학 중에서 외과 쪽은 특히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연륜을 따라 축적된 경험이 써전 개개인의 자질이나 태도와 맞물리면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된다.
실제 동년배들 중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이혁원과 나종진의 수술을 볼 때마다 어딘지 모를 미흡함을 느꼈다. 김지훈 자신만의 생각이 절대 아니었다.
같은 이치였다.
이준영 교수에 비한다면 모든 면에서 부족한 것투성이였다. 물론 모자란 부분은 채우면 되는 일이고, 경험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마음, 수술에 임하는 자세 역시 기본이다. 기본이 흔들리면 결국 제자리에서 맴돌게 된다.’
스승은 물론 김지훈 자신도 숱하게 강조했던 말이었다. 이송한 환자 한 명을 두고 그토록 신경이 쓰였던 이유가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기본을 등한시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몸에 밴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답은 하나였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과 자만을 확실하게 구별하고, 손에 익은 것처럼 익숙한 일이라 해도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새삼 많은 것을 느꼈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 덕분이었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치켜들던 김지훈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혼자 잘 노네.”
“헉! 깜짝이야. 언제 왔어?”
“노크를 하면 반응을 하세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만세라도 부를 기세다.”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두 손을 슬그머니 내린 김지훈이 어색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손일석 한 명이면 민망하지도 않았을 텐데 진충기 교수와 민정호까지 보였다.
“허험! 무슨 일이야?”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오늘 창립 학회 준비 확실하게 마무리 짓기로 했잖아. 낑낑대며 들고 온 이 무지막지한 서류 안 보여?”
텅!
서류가 한 뭉텅이였다.
민망할 때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최신 레이더에 버금가는 손일석의 촉에 걸리면 별말이 다 나올 것이다.
“아! 그랬지? 시작하자.”
준비 상황을 검토했다.
주로 손일석이 설명하고 답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진행되는 창립총회 및 학회 일정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초빙 인사와 축사, 각 분야의 논문 발표를 비롯해 점심 식사 준비까지 추가로 손을 댈 일이 없었다.
‘이 많은 일을 둘이서 다 했단 말이지?’
미안하기만 했다.
“손 교수, 진충기 선생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학회장이라면서 제가 맡아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애초 우리가 원했고,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부원장님은 더 큰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뭘…….”
손일석이 웃었다.
“삼백억 기부 아무나 유치하는 게 아니지. 병원 내부 일이냐, 외부 일이냐의 차이밖에 없어. 진충기 선생님 말씀대로 각자 주어진 일이 있었을 뿐이야. 우리 김 부원장을 포함해 이 중에 안 힘들었던 사람 있겠어?”
“그런데 민 부원장님은?”
“무슨 일을 했냐고? 모든 행사가 돈이야. 조달부터 집행까지 어수룩한 사람이 만지면 구멍 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어? 민 부원장 덕에 알뜰하게 집행했으니까, 그 점 확실하게 알아 두셔.”
“민 부원장님,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행정 부분까지 학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신 이상 제 일입니다. 이번 학회를 기회로 우리 병원을 간 이식 분야의 최고 병원으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내과, 마취과, 간호과까지 모두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소아 외과 일까지 떠안은 고경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사적인 감정이 분명해 내색하진 않았다.
“이제 창립총회 날만 오면 되네요.”
“초빙에 응해 주신 분들께 연락해 감사 인사를 미리 하는 게 좋겠지. 부학회장님과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경기복 과장님께도 전화 한 통 드려. 그게 예의잖아.”
“오케이!”
“특별한 문제 없으면 이걸로 끝내자. 우리는 당일 아침 여섯 시에 출발해 준비해야 하니까 시간 잊지 마.”
김지훈이 손일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학회장이 아님에도 모든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결정하는 마지막 회의를 주도했다. 어설픈 부분을 찾기 힘들 정도로 잘 준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선배인 진충기 교수, 상대하기 까다로운 민정호와 함께 일하며 잡음 하나 내지 않았다.
손일석의 능력이 돋보였다.
‘학회장은 내가 아니라 네가 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때부터 시작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믿고 의지한다는 말이 맞을 거야.’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었다.
내가 편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있을 때 잘해야 했다.
요즘 들어 카페에서 커피 마시는 것이 대세가 되고 있지만 김지훈을 비롯해 모두들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간단하게나마 고생한 사람들에게 맥주 한 잔 사는 것이 예의였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오늘은 내가 술 한 잔 사죠. 옛날처럼 부어라 마셔라 할 나이가 아니니까 맥주로 하겠습니다.”
“오케이! 이 말 안 나왔으면 서운할 뻔했어.”
다들 좋다고 웃었다.
고개를 끄덕여 합류 의사를 밝힌 민정호가 무표정한 얼굴로 무척 중요한 점을 하나 상기시켰다.
“부원장님, 다음 주 금요일이 당직 아니십니까?”
“이 주마다 돌아오니까 그날이 되겠죠.”
“기부 약정식 때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곤란합니다. 미리미리 바꾸시든지, 미루시든지 조치를 취하세요. 설마 일복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죠?”
하마터면 치명적인 민폐를 끼칠 뻔했다.
당직 날에 가까워 부탁하면 서로가 곤란할 것이다. 온갖 계획이 있을 주말을 바로 앞둔 날이기에 더더욱 서둘러야 했다.
아뿔싸!
간 이식 학회와 관련이 없는 교수가 몇 없었다. 이경석은 과장이기 때문에 참석할 필요가 있었고, 유일하게 남은 교수가 하필이면 창립총회가 열리는 주말에 당직을 서야 하는 안호석이었다.
‘삼 일 내리 당직을 서야 하네.’
김지훈이 끙끙댔다.
“김 교수,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금요일에 일이라도 잡으면 더 곤란해지니까 빨리 전화해서 당직 바꿔.”
결국 전화했다.
거절하기 힘든 선배의 부탁에 약간은 망설이며 말꼬리를 흐릴 줄 알았건만 흔쾌히 승낙했다.
(안 그래도 당직이신 걸 보고 걱정했었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창립총회 잘 치르십시오.)
“고마워. 꼭 신세 갚을게.”
(술 한 잔 사시면 됩니다.)
“그래? 혹시 시간 되면 오늘 어때? 손 교수, 진충기 선생님하고 맥주 한잔하기로 했어.”
(마침 시간이 있네요. 이따 뵙겠습니다.)
손일석이 돌연 고개를 흔들었다.
“야! 김 부원장 일복 대단하네.”
“무슨 소리야?”
“당직 하루를 던졌는데 받는 사람은 내리 삼 일이잖아. 웬만한 공력으로는 자기 일복까지 몽땅 넘겨줄 수가 없지. 에구! 무서워라. 오늘 술만 얻어먹고 가까이하면 안 되겠다. 훠이! 훠이!”
하하하!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무서운 일복임이 틀림없었다. 누구도 원치 않은 일을 강제로 떠넘긴 이상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거대 결장으로 수술한 아이까지 회진을 돌고, 마님에게 허락을 얻었다. 게다가 떨리는 마음으로 이송한 환자 상태를 문의한 결과 회복의 조짐을 보인다는 말까지 들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즐겁게 호프집으로 향했다.
“안호석 선생은?”
“금방 올 거야. 아주머니! 여기 500 네 개 주시고, 안주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몽땅 주세요.”
“야! 무슨 안주를 그렇게 시켜? 빈속이라고 해도 사람이 다섯 명인데 이걸 다 먹을 수나 있어?”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내가 무모한 사람은 아니잖아? 다 이유가 있어요. 곧 알게 됩니다. 촉이 있다면 주변만 딱 봐도 알겠지만 김 교수에겐 무리지?”
테이블이 넓다는 것 빼고는 특이한 점이 없었다. 가장 현실적인 민정호가 어떤 말도 하지 않아 이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섯 명이 먹기에 안주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결국 손일석과 치열한 실랑이를 벌였다.
그 순간!
안호석이 나타났다.
왠지 미안해하고 있었다.
“왜 그래? 빨리 앉아. 안호석 선생, 내 말 좀 들어 봐. 안주를 이렇게 시킨다는 게…….”
김지훈이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 어?’
“선생님, 술 사신다는 소문 듣고 왔습니다.”
“부원장이 사는 술은 얼마나 맛있을까?”
이경석, 서도진, 서도훈, 오만석을 비롯해 이혁원을 필두로 한 펠로우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당직인 강병옥과 모찬우만 빠졌을 뿐이었다.
‘경철이 너도?’
“유일한 전공의라고 너무 부려 먹었어. 게다가 김 부원장 때문에 킵을 하루 이틀 한 게 아니잖아? 오늘 하루 푹 쉬라고 내가 데려왔어. 괜찮지?”
과장 결정에 누가 토를 달 수 있을까?
뿐만이 아니었다.
이준영 교수까지 얼굴을 보였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나도 한잔하자.”
백번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외과 전체 회식이나 다름없었다. 인원이 많아 거의 호프집 절반 정도를 차지할 정도였다.
김지훈이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건배!”
“과장님, 우리 김 부원장님 인기가 하늘을 찌르네요. 내가 산다고 했으면 반도 안 왔겠죠?”
“반이면 다행이지. 내가 산다고 했으면 삼분의 일 본다. 야! 이 정도 인기면 지갑을 털려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아.”
그동안 일이 많아 회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다들 허리띠 풀었다. 무뚝뚝함의 대명사였던 이준영 교수까지 펠로우들과 환담을 나누었다.
왁자지껄!
예전처럼 소주로 달리지 않아 속도가 늦어졌지만 술은 술이었다. 슬슬 취기가 오르며 속을 터놓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일이 너무 커지네.’
김지훈이 포기했다.
이왕 먹는 술 즐겁게 먹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이었다. 정말 간만에 이준영 교수에게 한 잔 받아 더 이상 몸을 뺄 수도 없었다. 살살 조절하며 부지런히 의국원들과 잔을 부딪쳤다.
손일석은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김지훈도 확실하게 분위기 탔다.
안주가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아주머니 입이 귀에 걸렸다.
적절한 때 이준영 교수가 일어나 내일도 일이 있음을 경고하지 않았다면 자칫 이 차, 삼 차까지 외칠 뻔했다.
“이 정도에서 끝내자. 일 없는 사람은 내일 지장이 없는 선에서 더 먹고.”
그런 사람이 있을까?
“들어가십시오.”
결산이다.
김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술이 확 깼다.
가벼웠던 몸과 마음 이상으로 지갑이 가벼워지게 생겼다. 명색이 부원장인 데다 먼저 술을 사겠다고 했는데 내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 당분간 굶지, 뭐.’
과감하게 카드 긁었다.
“다들 잘 먹었지? 다음에 또 살게.”
큰소리까지 쳤지만 다가올 후폭풍에 창백해진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담대한 고경아도 한 소리 할 금액인 데다 여차하면 희연이 과자도 못 사 줄 판이었다.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이경석이 백기사를 자청했다.
“당직 빼고 다 모였는데 과장으로서 모른 척할 수는 없지. 의국비에서 일부 지원할게.”
“학회 준비 연장선으로 시작된 자리인 이상 부원장님 활동비 명목으로 저도 일부 지원하겠습니다.”
아! 의리의 사나이들!
통장에 돈이 확실하게 꽂혀야 알겠지만 한시름 놓았다. 부원장 체면이고 뭐고 괜찮다거나 필요 없다는 말은 절대 할 수 없었다.
카르페 디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