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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58화 (1,258/1,329)

4화

시간이 없다고 해도 해야 할 일이 많을수록 충전이 필요한 법이었다. 콧바람을 쐴 겸 간만에 가족과 함께 근교로 나들이를 갔다.

바닷바람을 벗 삼아 해물 철판구이에 커피 즐기고, 해변을 거닐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서해와 연결된 도로가 으레 그렇듯 오고 가는 길이 밀렸지만 단 일 분도 지루하지 않았다. 아내와 딸과 나누는 대화가 주는 묘한 만족감과 즐거움 때문일 것이다.

간간이 불안하긴 했다.

중환자실에 누운 두 명의 환자가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토바이 사고로 수술을 한 젊은 환자 상태가 걱정됐다.

‘후우! 아침 일찍 보호자도 만날 겸 환자를 본 후 출발할 걸 그랬나?’

김지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성하게 활동하는 써전이라면 공통적으로 부딪치는 일이었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중환자실에 환자가 있는 상황에서 발 뻗고 자는 것이 더 이상할지도 몰랐다. 반면 사람인 이상 항상 긴장 속에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화가 필요했다.

적절한 휴식을 취한 날이 바로 오늘이었고, 다른 주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다는 법도 없었다. 더구나 누구보다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다.

‘오만석 선생과 한수영 선생이 당직이었지? 믿고 맡겨도 되는데 이것도 병이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김지훈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걱정과 즐거움도 공존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일곱 시도 안 됐는데 너무 빨리 왔네. 느긋하게 저녁 먹고 천천히 올 걸 그랬나 봐요.”

“아쉽긴 하네요.”

집안일은 끝이 없었다.

한나절 놀았다고 할 일이 밀렸다.

고경아가 희연이를 챙기는 동안 김지훈은 부지런히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했다. 이럴 때마다 항상 아내이자 엄마인 고경아의 힘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이구! 허리야. 도대체 경아 씨 어디에서 이런 체력이 나오지? 빨리 소아 외과가 안정돼야 일이 좀 줄어들 텐데 걱정이네.’

꽃다발과 나들이에 아무리 마음을 담아도 한마디 말보다 못할 수 있었다. 김지훈이 이제야 한시름 놓은 고경아의 손을 꼭 잡았다.

“고마워요.”

“어제부터 왜 그래요?”

“그냥 다 고마워서 그래요.”

주말 동안 푹 자고, 잘 놀았다.

분위기 확 잡아도 될 상황이었다.

이제 곧 열 시였다.

이제나저제나 희연이가 자기만을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가를 찡그렸다.

띠리리리리!

이 시간에 전화 걸 사람이 없었다.

느낌이 안 좋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

아니나 다를까. 병원이었다.

“여보세요?”

(한수영입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수술한 환자 상태가 좋지 않아 연락드렸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뜩이나 안 좋았던 환자가 더 나빠졌다면 어떤 상태인지 듣지 않아도 빤했다. 어쩌면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최악의 상황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었다.

“이 밤에 어디 가요?”

“병원 갑니다. 환자가 안 좋대요.”

고경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도 안타깝지만 주말마저 편히 쉬지 못하는 남편을 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혼 전부터 숱하게 본 모습이지만 적응될 일도 아니었다.

‘저런 모습에 반했지만 이제는 건강에 신경 쓸 나이가 됐는데 당직 선생님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을까? 마음이 편하지 않네.’

김지훈도 속이 복잡했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운이 무척 좋았다.

내과와 더불어 사망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과였지만 정규 수술에 비해 응급 수술이 적은 탓인지 용케 사망 사고를 피해 왔다. 하지만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병원은 없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건설 현장 붕괴 사고 이후로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언젠가 터질 일이 터졌는지도 몰랐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젊은 환자인데 내게 연락을 해야 할 정도로 나빠질 이유가 뭐지?’

폐 손상을 받았다.

흉부 도관을 박아 해결했고, 토요일 오후까지 출혈 징후도 없었다. 자발 호흡이 약해 인공호흡기를 떼지 못했지만 젊은 나이를 믿었다.

비장을 제거했다.

소장과 대장이 터져 일 차 봉합을 했다.

다발성 손상인 탓에 발생할 수 있는 합병증은 많았지만 수술한 지 이제 이틀도 지나지 않았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정형외과 문제 때문일까?’

어떤 식으로 사고가 난지 몰라도 천운처럼 심각한 골절이 동반되지 않았다. 대퇴부 골절이 있었다면 골수 내 지방 유출로 인한 폐 혈전이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완전히 배제해도 좋았다.

하나하나를 생각하면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인 손상은 없었다. 하지만 다발성 손상은 단순한 더하기가 아니었다.

일 더하기 일이 삼이나 사가 될 수도 있었다.

병원에 도착했다.

보호자들이 초조한 얼굴로 중환자실 앞에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설명을 들었는지 김지훈을 보자마자 달려와 발을 동동 굴렀다.

“선생님,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 환자부터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느낌이 더욱 안 좋아졌다.

김지훈이 나오기로 한 이상 섣불리 보호자를 만나 설명할 한수영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직일 뿐이기에 최소 수술 팀 중 한 명을 기다렸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설명을 했다는 것은 환자 상태가 심각하다 못해 급박하다는 말이었다.

반은 맞는 생각이었다.

오만석이 나와 있었다.

직접 수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당직 의사로서 함께 환자를 보았기에 보호자를 만났을 것이다. 때문에 가슴까지 섬뜩해졌다.

‘만석이까지 같은 판단을 내린 거야?’

“환자 상태 어때?”

“수술 부위에서 출혈이 발생해 바이탈이 심하게 흔들린 상태입니다. 흉부 도관을 통해 나오는 출혈량도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혈액 검사까지 종합해 볼 때 범발성 혈액 응고 장애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범발성 혈액 응고 장애?”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환자부터 살폈다.

드레인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흉부 도관을 따라 피가 줄줄 흘렀다.

피를 짜 넣다시피 수혈을 하고 있었지만 혈압이 낮았고, 소변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흐렸던 의식이 더욱 나빠졌다.

응급 수술을 해야 할까?

배를 열어 봐야 출혈 원인을 정확하게 알겠지만 수술 부위 타이가 풀리는 등 출혈 부위를 특정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수단이었다.

반면 범발성 혈액 응고 장애가 맞는다면 외과적 치료는 무의미했다. 간 절제 후 가끔 경험하는 일종의 우징(Oozing) 같은 출혈이기에 상태만 더 악화시킬 것이다.

확실한지 확인해야 했다.

당직 팀은 이미 대응하고 있었다.

“혈소판 농축액과 혈장 추가 수혈합니다.”

‘추가로 투여한다고?’

대량 수혈에도 불구하고 혈소판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기타 혈액 응고 인자 역시 정상을 밑돌 가능성이 높았다. 그도 모자라 충분히 지혈이 됐던 복부 절개창에서도 피가 묻어났다.

광범위한 출혈이 발생한 것이다.

김지훈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거의 세미코마 상태에 자발 호흡은 여전히 불규칙하고, 혈압까지 낮다. 혈액 응고 장애가 아니더라도 재수술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원인이 무엇일까?’

저혈량성 쇼크로 인해 수술 전 대량 수혈을 시행했다. 간은 손상받지 않았지만 다발성 장기 손상을 입었다. 그에 따른 수술 부위 역시 광범위했다.

모든 장기가 건강할 젊은 나이가 아니었으면 예측 가능한 합병증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현재 의학 수준으로는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을지도 몰랐다.

문득 예전 경험이 떠올랐다.

어떤 검사를 해도 이상 소견이 보이지 않았지만 피가 멈추지 않아 수백 파인트(Pint)에 달하는 수혈을 받았던 환자가 있었다. 기적적으로 회복됐기에 망정이지 목숨을 잃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때도 결국 원인을 찾지 못했다. 암 환자란 차이만 있을 뿐 똑같은 경우일까?’

부정하고 싶었다.

“오만석 선생, 다시 열어야 할까?”

“이 상태로는 수술 중 사망할 겁니다. 배를 열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고요. 혈액 응고 장애가 확실해 보이는 이상 보존 치료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겠지. 살 수 있을까?”

대답이 없었다.

얼마 전에 갈아 준 거즈가 시뻘겋게 물든 것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었다. 수혈되는 양보다 출혈량이 더 많다는 증거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인간의 생명력은 종종 놀라운 결과를 보여 주지만 역으로 몸을 갉아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범발성 혈액 응고 장애의 기전 때문이었다.

다발성 손상으로 광범위한 출혈이 발생하면 우리 몸은 모세혈관을 꽉꽉 막아 버린다. 즉, 혈소판이 응집된 혈전을 만들어 출혈을 방지하는 것이다.

당연히 혈소판이 비정상적으로 소모된다.

수치가 한도 이상으로 낮아지게 되면 오히려 필요한 응고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 성긴 그물처럼 변한 혈관 체계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올 수밖에 없다.

같은 과정이 반복되기 마련이었다.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이다.

일단 발생하면 외부에서 혈소판만이 아니라 혈액 응고 인자가 풍부한 혈장을 대량 투여해도 효과는 미지수였다. 엉뚱한 부위에서 소모될 수도 있었다.

결국 사망에 이른다.

김지훈이 생각을 정리했다.

필요한 조치는 모두 시행하고 있었다.

서서히 진행됐다면 대처할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겠지만 급격하게 발생한 경우 예후가 더욱 나빴다. 더구나 환자 상태는 호전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하기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김지훈이 지금 이 순간, 중환자실만 바라보며 애가 탈 보호자에게 설명할 의무가 있음을 떠올렸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치료 이외의 문제로 원치 않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었다.

보호자를 만났다.

오만석과 한수영이 함께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혈액 응고 장애로 인해 피가 멈추지 않습니다. 환자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수술 전 온갖 가능성을 모두 말했고, 수술 후 역시 합병증에 대한 경고를 충분히 설명했지만 희망을 품었을 가족들이었다.

부모가 주저앉았다.

형제들의 손이 덜덜 떨렸다.

범발성 혈액 응고 장애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설명하는 내내 멍한 표정이었다.

멀쩡하게 걸어 나간 가족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후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보존 치료를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수술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까?”

세상이 알아주는 의사가 수술했다고 해도 너무 급격하게 나빠졌다. 가족이 아니더라도 품을 수 있는 당연한 의심이었다. 피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유일한 대처였다.

“복부만이 아니라 충분히 지혈된 것으로 판단했던 폐에서도 다시 출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답답한 침묵이 이어졌다.

의사가 해야 할 일은 설득이나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보는 것뿐이었다. 김지훈을 비롯해 모두들 다시 중환자실로 향했다.

한동안 묵묵히 환자만 살폈다.

천만다행 출혈이 줄어들며 바이탈이 잡혔지만 언제 또 흔들릴지 몰랐다.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급속하게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다.

의사가 많다고 좋아질 상황도 아니었다.

한수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아침부터 수술이 있는데 들어가시죠.”

오랜 시간을 요하는 간 이식 수술을 하려면 적절한 수면과 휴식이 필요했다. 중요하지 않은 환자가 없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환자와 보호자를 생각하는 순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만석도 같은 처지였다.

‘지켜보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이상 다음 환자까지 나쁜 컨디션에서 수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갑자기 문제가 생긴다면…….’

김지훈이 현실과 타협했다.

당직실에서 잠을 청했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띠띠띠띠띠띠!

희미하게 들리는 급박한 박동 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한수영과 고경철이 바짝 붙어 대처하겠지만 이미 의사의 영역을 벗어났을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불편했지만 마음 이상은 아니었다.

아침까지 환자가 버텼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장이 뛰고, 숨이 붙어 있다고 해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혈소판 농축액과 혈장을 대량 투여한 덕에 말 그대로 버텼을 뿐이었다.

김지훈이 보호자를 만났다.

환자 상태를 솔직하게 설명하자 불안과 절망의 눈빛 속에 불신이 감돌았다. 환자를 살리지 못한 의사는 불가항력이라 해도 할 말이 없는 법이었다.

불신이 결국 현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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