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57화 (1,257/1,329)

3화

잠을 쫓느라 잠시 시간을 보낸 김지훈이 부리나케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사이 손일석이 제 방인 양 커피 내오며 편안하게 자리 잡았다.

신현수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네 명에게 포위된 형국이었다.

무슨 요구를 할지, 어디까지 확약을 해야 할지 가늠하며 곧이어 이어질 전문 병원 의료진의 거센 공세에 단단히 대비했다. 백이면 백, 병원을 위한 일이기에 할 말이 궁하긴 했다.

물론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긴 했다. 하지만 곧 종합 병원으로 확장될 전문 병원의 특수한 위치와 입장 때문에 이사장의 권위가 작동할 자리도 아니었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넘긴 김지훈이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신 이사장, 이런 자리를 만들기 쉽지 않으니까 빨리빨리 논의하고, 결정했으면 좋겠어. 산업 의학과 개설은 확정됐나?”

“이사회는 통과됐고, 필요 예산도 내년부터 반영하기로 했어. 시작은 의사 두 명에 관련 직원 네 명 정도면 적당할 것 같아. 단, 초기 인력 확보는 제안한 측에서 해결해야 돼.”

“직원은 자체적으로 선발하는 게 원칙이니까 이의 없는데, 의사까지 우리가 선발해도 되겠어?”

“재단의 승인이 필요하지만 전문 병원 의견을 적극 수용할 생각이야.”

하나 해결됐다.

다만 예방 의학에서 파생된 산업 의학을 전공한 의사 수가 워낙 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발품을 상당히 팔아야 할 것이다. 해당 분야가 활성화된 구미 병원과 지속적인 소통이 필요한 이유였다.

‘인력 확보가 쉽지 않겠지만 기초 의학 지원자가 부족한 것이 어디 한두 해 일인가? 우리 쪽이나 산업 의학이란 분야만의 문제가 아니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과만큼 상대적으로 돈 못 버는 과 역시 기피 과가 된 지 오래였다. 유행처럼 선호하는 과가 달라지긴 했지만 바닥은 언제나 바닥이었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다음 안건은 펠로우 및 교수 자원 추가 확보에 관한 일이야. 종합 병원이라면 당연히 소아 외과가 있어야 하지만 이번 기부로 상황이 많이 변했어.”

“원하는 인원이 몇 명이야?”

“추가로 소아 외과 펠로우 두 명, 마취과와 소아과 펠로우도 두 명씩 모두 여섯 명이야. 교수 추천권도 우리에게 주었으면 해. 간호사를 비롯해 관련 인력은 우리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테니까 그 부분만 해결해 줘.”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교수 임용 결정은 재단의 중요 권한이었다. 어떤 면에서 전문 병원의 요구는 월권이라 할 수 있었지만 추천권 정도는 허용할 수 있었다.

‘파벌을 만들 지훈이도 아니고, 어떤 선생보다 훌륭한 선생들을 추천할 테니 당분간 이런 방향을 유지하는 것도 좋겠지.’

외부적인 문제도 감안해야 했다.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인력이 필요할 것이다. 미리 선발하면 편하겠지만 교수 자원은 정부 부처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 데다 다른 계열 병원 인력 충원과도 관련이 있었다.

“추가 인원만 여섯이란 말이지?”

“최소로 잡은 인원이야. 그 정도 인력이 아니면 기부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어. 재단이 유형, 무형으로 보는 이득을 생각하면 무리한 요구 같지는 않아.”

“시간이 필요해.”

“무슨 시간?”

“다른 병원하고도 상의를 해야지. 마취과는 몰라도 우리 과는 물론이고 소아과까지 기피 일순위로 달려가고 있어. 전공의가 부족하니까 펠로우라도 늘려 달라고 난리가 아니야.”

목소리가 상당히 높아졌다.

정말 골치 아픈 모양이었다.

“한두 개 과의 문제면 괜찮지만 흉부외과하고 산부인과도 난리야. 전공의 월급이 우리 때하고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올라간 건 알지? 그래도 소용없어. 지원 자체를 안 해요. 오죽하면 수련 기간을 삼 년으로 단축하자는 말까지 나오겠어?”

김지훈이 일순 입을 열지 못했다.

전공의 선발을 할 규모가 아닌 탓에 신경 쓸 일이 없었지만 기피 과들이 총체적 난국에 빠진 지 오래였다. 가장 사정이 좋다는 서울 병원마저 고경철 한 명만 달랑 파견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손일석이 혀를 찼다.

“이놈의 문제는 해가 가도 해결될 기미가 안 보이네. 어떻게 더 심해질 수 있지? 이러다 외과 의사들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지금처럼 일이 많으면 월급을 더 준다고 해도 올 의사가 있을까? 게다가 웬만한 나라 출신 의사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야.”

“싸면 싼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다 문제긴 해. 우리야 몸은 힘들어도 먹고살 걱정이나 없지, 아픈 사람은 무슨 죄냐? 지금도 돈이 없어 제때 치료를 못 받은 사람이 부지기순데 언제 좋아지려나.”

불만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반면 전 국민 의료보험이라는 제도가 갖는 장점 또한 많았다.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사적 의료보험이 도입된다면 사회적 불만과 불평등이 폭발하고도 남을 것이다. 적어도 의료 부분만큼은 평등의 가치가 유지되는 것이 바람직했다.

잠시 삼천포로 빠졌다.

펠로우 추가 선발 문제로 돌아가려는 순간 진충기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사장님, 여러 면에서 문제가 많지만 다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전체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말이죠. 정부 부처도 예산이 들지 않는다면 전체 펠로우 선발 인원을 늘려 달라는 요구를 수용할 겁니다.”

“대학 병원 의사는 정부에서 관리하는 교원의 신분까지 갖고 있기 때문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손일석이 가자미눈을 떴다.

“그래서 이사가 있고, 이사장님이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백날 외쳐 봐야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불과하지만, 산하 병원만 네 개인 재단의 대표인 이사장님 말씀은 다르지 않겠어요?”

당연히 영향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입맛을 다시던 신현수가 물었다.

“펠로우든 교수든 충원이 된다고 치자. 다른 부분 인력은 충족되는 거야? 솔직히 의사만큼 숙련된 인력이 요구되는 간호과가 제일 문제 아니야?”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간호 부장은 물론 고경아에게도 확정적인 답을 듣지 못했다. 땜질식으로 대처하다간 소아 외과의 능력과 질만 떨어질 수도 있었다.

‘걱정이네.’

손일석이 돌연 웃었다.

무슨 이유인지 김지훈의 눈치를 보았다.

“손 교수, 왜 웃어?”

“사실 식사 자리에서 고 과장님과 몇 마디 나눴는데, 당장 급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것 같아.”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자신의 생각과 같은 듯 다르게 들렸다.

“무슨 소리야?”

“당분간 고 과장님이 직접 참가하는 것은 물론 소아 외과 간호사 육성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눈치야. 간호 부장님도 이미 동의하신 것 같아.”

금시초문이었다.

밉든 곱든 부부인데 아내의 결정을 제부인 손일석이 먼저 알았다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의 얼굴이 밝지만은 않았다.

눈치 없는 손일석이 아니었다.

“김 부원장님, 오로지 내 판단이고, 내 입이 싸서 그런 거니까 서운해하지 마세요. 물론 내 촉을 무시하고 힌트를 준 고 과장님 책임도 무시할 수는 없겠죠. 어쨌든 자기 일이 많아지면 우리 김 부원장님이 신경 써야 할 일이 더 많아진다는 사실 때문에 함구하신 거 아닐까요? 어찌 우리 같은 뱁새가 봉황의 뜻을 알겠습니까?”

그럴듯했다.

사실 집안일은 물론 희연이까지 미안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김지훈이었다. 전업주부라고 해도 힘들 판에 맞벌이도 모자라 격무에 시달린다면 남편의 마음이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추측이란 말이지?”

“내 추측은 결코 추측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 텐데. 조용히 고마워하면 돼. 일상의 기쁨, 꽃 잊지 마. 돈으로 꽃다발 만들면 더 좋겠지.”

“카드 쓰는 처지에 어떻게 다발을 만들어?”

김지훈까지 삼천포로 빠졌다.

신현수가 분위기를 다잡았다.

“개인적인 일은 나중에 얘기하고, 한 가지만 더 확인하자. 민 부원장님, 예산 문제는 없겠습니까? 현재 전문 병원 재정 상황이 지속된다면 전입금 확보가 쉽지 않아요.”

기부금에 취해 돈 문제를 간과했다.

더구나 아무리 막대한 액수라도 응당 병원이 책임져야 할 인력 충원 등 치료 이외의 일에 쓰인다면 애초 취지가 퇴색될 뿐이었다.

병원 예산으로 충당하는 것이 마땅했다.

순간 헉! 소리 터졌다.

전입금을 확보하려면 돈을 더 벌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죽도록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모두 민정호의 입만 보았다.

실적을 따지는 월례 회의가 서면으로 대체된 후 그나마 마음 편한 시절을 보냈다. 무표정한 얼굴로 조목조목 지적하는 민정호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민정호가 차례차례 시선을 주었다.

‘설마?’

한 방울의 땀이 또르르 흘렀다.

서서히 입이 열렸다.

“소아는 성인에 비해 가산점이 붙어 희귀 질환 치료만이 아니라 수술 자체 비용까지 높습니다. 기부로 인해 무료 수술에 대한 부담도 줄었고요. 부원장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수술이 시행된다면 전입금을 추가로 확보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들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문 병원이 궤도에 올랐다는 말이기도 했다. 또한 무조건 실적 확대를 외쳤던 지난날의 모습을 생각할 때 민정호 역시 무척 유연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반대일지도 몰랐다.

누구보다 정확한 계산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의사를 포함해 직원 모두 돈 버는 기계가 아닌 이상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다행이군요.”

“단, 현재 재단에 귀속되는 전출금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해 주셔야 합니다. 김 부원장님 역시 병원에 제시한 계획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요.”

신현수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기부로 인해 종합 병원을 보다 수준 높은 병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추가 예산까지 전문 병원이 자체적으로 해결해 준다면 이사장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전체적으로 무난하게 해결됐다.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이마를 닦았다.

세상 일 모두 몰려오는 것처럼 수술과 학회 일만으로도 벅찬데 또 다른 요구를 해 온다면 차라리 가운을 벗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반면 김지훈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모든 일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히 만족스러워야 하건만 민정호의 마지막 말은 바윗덩어리나 다름없었다.

‘후우! 소아 외과도 결국 내 책임이구나. 진우가 펠로우를 벗어날 때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는데 왜 땀이 나지?’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현수가 살짝 바위 하나를 더 얹었다. 이사장이 의사 출신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김 부원장, 종합 병원 완공 전까지 소아 외과만이 아니라 소아과도 신경 써야 돼. 강은미 선생이 아직 펠로우라는 사실을 잊지 마.”

“잘하고 있는데…….”

“정식으로 임명된 과장이 아니잖아? 우리 병원이 동네 병원도 아니고, 규모가 커지면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지는데 경험이나 경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소아과가 진용을 갖출 때까지 확실하게 책임져.”

‘후우! 이게 뭔 일이지? 왜 세상 사람 모두 기뻐할 기부가 산더미 같은 일로 변한 걸까?’

“자자! 술 한잔하기 전에 학회 일도 마무리합시다. 이 주밖에 안 남았습니다.”

김지훈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급 피곤해졌다.

이놈의 일복은 정말 끝이 없었다.

맥주 한 잔에 얼굴이 벌게진 김지훈이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한때 주당으로 불렸던 일이 무색하게도 취기가 몰려왔다.

잠 부족 때문일 것이다.

엄청난 일에 대한 부담이었다.

하지만 잊지 않았다.

꽃다발 하나 샀다.

아빠로서 당연히 희연이 과자를 챙겼다.

환한 웃음을 짓던 고경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희연이와 협상에 돌입했다. 밥을 제대로 먹을 때 과자 봉지를 뜯을 수 있다는 조건을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토요일 밤이 깊어 갔다.

좋은 일이 가득한 한 주였지만 부부 모두 피곤이 누적되는 나날이었다. 하루 날 잡아 잠 푹 잔다고 해결될 피로가 아니었다.

서로에게 안식처가 필요했다.

김지훈이 고경아의 등을 꼭 안은 채 깊은 잠에 빠졌다. 팔베개를 한 고경아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김지훈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사랑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팔다리, 허리가 유연해 몸이 허락할 때나 되는 일이지, 몸 뻣뻣해지면 안은 채 자고 싶어도 못 잔다. 나이 먹어 갈수록 앉은뱅이책상과 딱딱 방바닥이 점점 더 불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한 해 한 해가 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느꼈던 일들을 하나씩 놓치게 된다. 그 전에 하고 싶은 일 빼놓지 않고 꼭 해 보자.

김지훈이 잠결에 미소를 머금었다.

좋다! 행복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