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56화 (1,256/1,329)

2화

김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끝나기 전에 도착하긴 했다.

이상스레 힘들었다.

선배 써전들이 수두룩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었지만 이제 막 전문의를 딴 것도 아니었다. 나이 먹은 탓일지도 몰랐다.

타 병원과 원장단을 대표한 송재덕 교수가 막 축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 자리의 주인공인 박재순 회장의 기념사 직전이었다.

‘현수하고 원장님 축사는 이미 끝났구나.’

살금살금!

맨 뒷자리에 앉았다.

김지훈을 본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앞자리를 가리켰지만 늦게 온 놈이었다. 이유 여하를 떠나 행사를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의자에 엉덩이 붙이자마자 머리가 멍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복을 스스로 차 버린 박재순 환자의 자식들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쏙 빼 들었다.

‘그래도 부모 자식 간이고, 훌륭한 일을 하시는 아버지인데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켰으면 좋겠다.’

참석했다.

거의 모든 가족이 왔는지 낯선 얼굴까지 보였다. 누구 한 명 예외 없이 표정이 좋지 못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얼굴 도장이라도 찍어 남은 재산이라도 물려받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었다.

앞날은 누구도 모른다.

개과천선이란 말도 있다.

부디 돈으로 얽힌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으로 살기를 바랐다. 어쩌면 박재순 회장과 박현철 이사의 입가에 걸린 미소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해졌다.

그 탓일까?

딱딱한 의자가 상당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 옛날 생각 나네.’

“오늘 이 자리를 만들어 주신 박재순 회장님께 먼저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각박하고 돈이 최우선인 사회에서 한 줄기 희망…….”

아무리 의미가 깊어도 축사가 재미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송재덕 교수 특유의 입담이나 재치가 발휘될 자리도 아니었다.

더구나 꼬박 밤을 샜다.

두 명이나 중환자실에 입원시켜야 할 정도로 정신력과 체력을 극심하게 소모시키는 수술까지 했다.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기엔 너무 피곤한 당직 날이었다.

참을 수 없는 유혹이 다가왔다.

김지훈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머릿속이 텅 비는 순간 고개가 툭 떨어졌다.

세상모르고 꿈나라로 향했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에 한 번 눈을 떴다.

“박재순 회장님 말씀을 듣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자면 안 돼. 졸면 안 돼.’

눈 부릅떴다.

허벅지를 꼬집었다.

마음과 달리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수술실에서는 그렇게 잘 유지되던 긴장과 집중이 사라졌다. 기념사가 시작도 되기 전에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천근만근이었다.

짝짝짝짝짝!

요란한 소리마저 자장가로 변했다.

비몽사몽, 분명 박재순 회장의 목소리를 듣긴 들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척 익숙한 목소리에도 고개만 더 떨어졌다.

“이것으로 행사를 마치고 기념사진 찍겠습니다. 참석한 분들 모두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김지훈 부원장님 어디 계십니까? 김지훈 부원장님!”

잠결이라도 이름은 들리는 법인데 도통 반응이 없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완전히 엎드린 채 자고 있는 김지훈의 어깨를 흔들었다.

“부원장님, 일어나세요.”

‘혁원이? 진우? 만석이? 헉!’

“왜? 환자 또 왔어? 무슨 환자야?”

벌떡 일어나며 큰 소리를 낸 김지훈이 눈만 껌벅거렸다. 순간 자신이 어떤 자리에 참석하고 있는지 잊었다. 한참 지나서야 응급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재순 회장을 비롯해 귀빈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어제 당직이었는데 밤을 샌 것도 모자라 약정식이 열릴 때까지 수술을 한 탓입니다. 귀빈 여러분 모두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 병원 부원장님의 일복이 어디서 왔는지 항상 궁금했는데 자나 깨나 환자가 오기만을 바라는 덕인지 모르겠습니다. 김 부원장님, 그만 주무시고 앞으로 나와 주세요.”

사회를 본 손일석이 너스레를 떨었다.

박재순 회장이 웃었다.

“그래서 저도 이 병원, 아니 이제는 우리 병원인 이곳에서 수술을 받은 모양입니다. 덕분에 큰돈까지 빼앗겼지만 기분이 너무 좋네요. 김 박사님, 감사합니다.”

“우리 김 부원장도 나이 먹었구나. 먹었어. 전공의 때도 안 졸더니 부원장이 되어서 졸면 어떻게 하니? 어떻게? 빨리 와라. 같이 사진 찍자. 사진.”

김지훈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손일석이 말한 자리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급기야 송재덕 교수가 잡아끌다시피 박재순 회장 옆에 세웠다.

“아직도 졸린 거야? 조금만 참아. 조금만 더. 아니다. 얼굴이 이게 뭐니? 세수하고 올래? 세수? 회장님,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과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김 박사님, 직접 수술한 아이와 곧 수술해야 할 아이를 봐서라도 일 분만 참읍시다.”

김지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소장 폐쇄로 수술한 신생아 가족과 다음 주 수술이 예정된 가족이 이제야 보였다. 창피하다는 생각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송진우 선생이 또 있었네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결국 큰 웃음 터졌다.

하하하하!

“자! 찍습니다. 스마일! 김치!”

“김치! 부원장님, 눈 크게 뜨세요.”

찰칵! 찰칵!

차르르르르!

사진 몇 장을 찍는 동안 방송국 카메라가 열심히 돌아갔다. 촬영을 지켜보던 정훈철이 김지훈이 자는 모습이 찍힌 부분은 편집하라며 한껏 웃었다.

‘이것도 말썽이라면 말썽인가? 나이 먹어도 열정 하나는 변하질 않네.’

김지훈 덕분에 자칫 딱딱할 수도 있었던 약정식이 즐거운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구내식당에 마련된 조촐한 뷔페가 더욱 의미 깊어질 것이다.

가만, 밤새 몰려온 환자 덕인가?

민정호가 슬며시 물었다.

“회장님, 행복하시죠?”

“행복합니다. 자식들이 모두 와 줘 행복하고, 김 박사님이 얼마나 환자를 위하는지 똑똑히 볼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자식들을 보며 정말 환하게 웃었다.

피는 물보다 진한 모양이었다.

다소 때 이른 점심 식사가 시작됐다.

구내식당에서 마련한 뷔페였지만 음식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박재순 회장, 신현수 이사장, 송재덕 서울 병원 원장, 김진호 전문 병원 원장이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졸음을 쫓아낸 김지훈 역시 부지런히 움직였다.

미처 하지 못한 인사부터 했다.

“회장님,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내가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이젠 안 졸리니? 안 졸려? 앉자. 앉자. 회장님이 시작할 때부터 찾으셨다. 그런데 무슨 수술을 오전까지 한 거야?”

“대장 동맥 혈전으로 괴사가 발생한 환자였습니다. 진단이 애매모호해 직접 들어가야 했습니다.”

“대장을 잘랐구나. 대장을. 김 부원장, 아직도 늦지 않았다. 대장 하자. 대장.”

간만에 듣는 소리가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면면을 볼 때 기부의 계기를 제공했다고 해도 낄 자리가 아니었다. 양해를 구하고 챙겨야 할 사람들을 찾았다.

신생아 가족을 만나 근황을 묻고, 수술이 예정된 가족에겐 주의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이준영 교수, 송진우, 강은미와 서로의 얼굴을 익힐 기회도 마련했다.

“김 교수, 고생했다. 고맙다.”

스승의 묵직한 한마디에 모든 피로가 사라졌다.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캔 커피 하나를 건넬 때는 마음까지 충만해졌다.

‘캔 커피 하나가 뭐라고.’

‘음성 때문인가요? 어떤 커피보다 스승님이 주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습니다.’

“음식이 맛있다. 바쁘더라도 챙겨 먹어.”

김지훈의 입이 안 찢어질 수가 없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외면해선 안 될 사람들이 있었다. 박재순 회장이 가족으로 인정하는 이상 합당한 예의를 갖춰야 마땅했다.

박재순 회장의 자식들을 찾았다.

“가족분들의 동의가 없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흠흠!”

어색한 헛기침만 터졌다.

탓할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박현철 이사보다 김지훈이 더 싫을 수도 있었다. 노골적인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박재순 회장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의 본심을 숨겼다.

‘씁쓸하지만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부디 회장님과의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랍니다.’

정훈철도 반드시 챙겨야 할 사람이었다.

“형님, 오늘 행사도 크게 보도해 주실 거죠?”

“뉴스 시간 한정돼 있어.”

“힘 좀 써 주세요. 뉴스 볼 때마다 나쁜 일만 듣는 것도 지칩니다. 이제는 좋은 일, 훌륭한 일을 비중 있게 다뤄도 좋지 않겠어요?”

“세상 사람들 속이 다 똑같지 않아. 어쨌든 김 교수 덕분에 나도 기분 좋다.”

참 끈끈한 인연이었다.

“형수님은 잘 계시죠?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고 전해 주세요. 승희는요?”

“말도 마. 재수하면서 얼마나 날카로운지 말도 제대로 못 붙여. 의대 가는 게 보는 것보다 훨씬 어렵네.”

“커트라인이 너무 높아졌죠? 사실 상위 일 퍼센트에 들 정도로 머리 좋고 뛰어난 아이가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닌데, 사회가 그렇게 변한 탓인 거 같아요.”

“돈 잘 벌고, 은퇴 걱정이 한결 덜한 데다 결정적으로 안정적이잖아. 누구 탓을 하겠어?”

생각해 보면 현장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의사라는 직업이 무척 매력적이긴 했다. 하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직분을 다할 일이었다.

그때 고경아가 반갑게 다가왔다.

“제수씨, 요새 힘든 일 있어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혹시 김 교수가 속이라도 썩여요?”

“형부, 우리 남편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잖아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충분히 그럴 리 있었다.

하지만 어느 자리에서든 절대 남편 흉을 안 보는 고경아였다. 허물없는 사이인 정훈철 가족과 손일석 가족 앞에서도 그 점만은 반드시 지켰다.

든든하고, 고마우면서도 왠지 낯부끄러워진 김지훈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마침 신현수도 인사를 하느라 자리를 옮겨 다니던 참이었다.

“신 이사장!”

“김 부원장, 오늘 정말 기분 좋은 날이야. 기다릴 테니까 괜찮으면 우리끼리 술 한잔하자.”

“낮술 하자고?”

“예전의 김지훈 어디 갔나? 안 어울린다. 맥주 정도는 괜찮지 않아?”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할 얘기가 있는데 잘됐네. 경석이 형, 일석이, 진충기 선생님, 민 부원장하고 내 방에서 먼저 만나자.”

“할 얘기?”

신현수가 슬쩍 몸을 뺐다.

진지하게 나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대부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해 김지훈을 만날 때마다 산더미 같은 일을 짊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김지훈이 신현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차피 우리 병원과 재단을 위한 일이니까 가볍게 생각해. 내가 언제 무리한 요구라도 한 적 있어?”

“있지. 너만 모르지.”

“어허! 왜 이러시나? 손 교수가 부른다. 가자.”

때마침 입담의 달인 손일석이 손을 흔들었다.

이경석, 진충기 교수, 민정호와 함께였다.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휩쓸렸다.

모두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민정호마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보다 밝아진 전문 병원의 미래를 꿈꾸는 것 같았다. 삼백억이란 돈 자체의 가치도 어마어마했지만 기부로 인한 영향은 몇 배가 되고도 남았다.

사람들 눈길이 뜸해진 틈을 타 김지훈이 박재순 회장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행복합니다.”

평생 잊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게 공식 약정식이 끝났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눈이 감기기 마련이었다. 필사의 의지로 회진을 돌고, 중환자실 환자를 살폈다.

희비가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고령의 환자가 놀라운 회복을 보여 기관 내 삽관까지 제거했다. 반면 앞날이 창창할 젊은 청년은 인공호흡기를 뗄 수조차 없었다.

집중적인 치료가 요구됐다.

간 이식 환자를 비롯해 중증 환자들이 있을 때마다 킵을 해야 하는 고경철이었다. 펠로우들이 있다지만 유일한 전공의인 이상 킵의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주말인데 고생하자.”

“걱정하지 마십시오.”

‘겉보기에 부러울지 몰라도 이렇게 고생해서 한 명의 써전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까?’

모든 일과를 끝낸 김지훈이 부원장실 소파에 누워 부족한 잠을 청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주말인 만큼 두 시간 후에는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했다.

드르렁! 드르렁!

약속 시간이 됐다.

신현수, 손일석, 진충기 교수, 민정호가 제시간에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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