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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54화 (1,254/1,329)

20화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함께 있던 그 시간 내내 마치 공식 약정식을 잘 준비하라는 것처럼 어색할 정도로 응급실이 조용했다.

폭풍 전 고요일 수 있었다.

당직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마치 금기어라도 되는 것처럼 한 사람의 이름을 일체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일복 터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뼈저리게 느낀 지 오래였다.

누군가 실수했다.

“퇴근하셨나?”

왜애애애애앵!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평화는 사라졌다. 게다가 절대 한 대가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급하게 문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환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단체 TA(교통사고)입니다.”

어쩌다 발생하는 단체 교통사고가 어쩌다 당직을 서는 김지훈의 당직 날 일어났다. 모찬우와 고경철만으로는 대처가 불가능해 백 당직인 오만석이 가세했지만 결국 김지훈에게도 연락해야 했다.

빨리도 나타났다.

그 와중에 누군가 탄식을 내뱉었다.

‘에휴! 병원에 계셨구나.’

일복의 화신이 당직인데 머리 깨지고, 팔다리 부러진 환자만 있을 리 없었다. 응급조치를 끝내고 보낼 환자까지 다 보냈지만 복강 내 손상이 의심되는 환자가 남았다.

“선생님, 이 환자는 제가 수술하겠습니다. 소장 파열로 보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이제 들어가시죠.”

오만석이라면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한바탕 전쟁을 치른 응급실을 보며 슬슬 가운을 벗으려는 찰나 앰뷸런스 한 대가 또 도착했다. 수술 방으로 향하려던 고경철이 곧바로 달려갔다.

젊은 청년 둘이었다.

한눈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이유는 따로 없었다.

오토바이 사고였다.

오만석이 주춤거렸다.

가벼운 손상이 아닌 탓에 검사부터 처치까지 상당한 시간과 신경을 쏟아부어야 하는 환자였다. 부원장이나 되는 의사를 수련의나 전공의처럼 뛰어다니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오히려 수술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수술하시겠습니까?”

“왜?”

“이 환자들 처치가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보호자들에게 설명까지 다 해 놓고 별생각을 다 하네. 경철이하고 볼 테니까 수술이나 잘해.”

가장 고참인 의사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고경철과 함께 환자를 살피고 치료하느라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잠시 김지훈을 보던 오만석이 모찬우와 함께 수술 방으로 향하다 말고 피식 웃었다.

문득 예전에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나만큼만 하라고 하셨나?’

“왜 웃으세요?”

“부원장님을 보니까 그냥 웃음이 나네. 우리도 평생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자신이 없긴 합니다.”

“나도 그래.”

때론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김지훈이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끌고 갈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다. 솔선수범이라는 빤한 말 때문만이 아니었다.

‘최고의 수술 팀!’

다방면의 일로 눈코 뜰 새 없건만 김지훈은 여전히 하나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최고의 써전 이전에 최고의 동료가 없으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목표였다.

띠! 띠! 띠! 띠!

수술이 시작됐다.

오만석이 그 어느 때보다 열정을 쏟아부었다. 집도의의 강력한 눈빛에 압도된 모찬우 역시 단 한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예정대로 잘 끝났다.

수술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띠! 띠! 띠! 띠!

김지훈과 고경철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모찬우는 수술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흉부 도관까지 박은 상태로 수술대 위에 오른 환자에게 수술 팀 전원이 집중했다. 다량의 수혈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바이탈이 흔들렸다.

여기저기 많이도 다쳤다.

간 손상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쩌면 수술 팀의 실력과 함께 젊은 나이기에 버텼을지도 몰랐다. 오토바이가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끝에 두 번째 수술이 끝났다.

환자는 중환자실행을 면치 못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문득 공사 현장 붕괴 사고가 떠올랐다. 사고의 크기는 달라도 사람에게 미치는 손상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원인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 명은 중환자실, 한 명은 팔다리가 여러 곳 부러져 이송을 해야 하다니 얼마나 위험하게 탄 거야? 제발 안전 좀 생각하자.’

어느새 새벽 세 시가 넘었다.

환자가 흐릿한 의식으로나마 깨어난 것을 확인한 후 응급실로 내려간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오만석이 응급 수술 스케줄 표를 두 장이나 들고 있었다.

“무슨 환자야?”

“아뻬 두 명입니다.”

마이너 수술 두 개라니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모찬우와 고경철에게 복강경 수술로 주었으면 하는 오만석의 말까지 흔쾌히 받아들였다. 백 듀티(Back Duty)인 이상 그 정도 권한이 있었다.

퇴근해도 좋았지만 당직 의사라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하는 일은 당직의 의무기도 했다. 한편으로 최근 수술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던 고경철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도 궁금했다.

오만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몇 시간이라도 주무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내일 토요일이잖아. 괜찮아.”

“약정식 행사가 오전 열 시에 열린다고 들었는데 말끔한 모습으로 참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지훈이 오만석의 어깨를 툭 쳤다.

그도 그럴 법했지만 이미 마님에게 보고를 했고, 수술을 참관할 뿐이었다. 주요 과정만 확인하면 쉴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휴게실에서 쉬면 돼. 가자.”

아뻬 두 개가 이어졌다.

당직이라고 해서 당연히 밤을 새워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마취과 의사와 간호사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많이 힘들고, 출출할 텐데 날 밝는 대로 냉장고 채워 드립니다. 어후! 나도 힘드네. 오만석 선생, 내 눈 벌게진 것 같지 않아?”

있는 엄살, 없는 엄살 모두 부려 가며 아쉬운 대로 불만의 눈빛을 약간은 잠재웠다.

띠! 띠! 띠! 띠!

세 번째, 네 번째 수술이 잇달아 시작됐다.

고경철의 노력이 눈에 보였다.

수술 내내 전공의답지 않은 손을 보였다. 물론 수술이 끝난 후 휴게실행을 면치 못했고, 거구의 오만석에게 초죽음이 됐지만 김지훈에겐 흐뭇함 그 자체였다.

‘처남! 잘했다.’

모찬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마음이 놓인 김지훈이 아뻬를 제거하는 과정까지 참관한 후 휴게실 소파에 몸을 눕혔다. 마이너라고 해도 수술을 준비하고, 정리하는 시간은 메이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꼬박 세 시간을 잡아먹었다.

‘벌써 여섯 시가 넘었네. 옷 한 벌 병원에 놓고 다니길 잘했네. 퇴근하긴 늦었고, 한두 시간이라도 눈을 붙여야겠다. 어후! 뻐근해.’

잠깐 조는 사이 수술 방이 조용해졌고, 이내 나직한 숨소리만 들렸다.

얼마 가지 못했다.

응급실에 또 환자가 왔다.

정말 눈만 감았다 뜬 시간에 불과했다.

김지훈이 띵한 머리에 고개를 흔들며 응급실로 향했다. 눈이 벌게진 오만석이 내과 펠로우와 함께 심각한 얼굴로 복부 CT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환자야?”

“이 시간에 죄송합니다. 갑자기 발생한 복통으로 내원한 환자인데 내과 질환 같지 않습니다. 분명 배를 열어야 할 상태로 보이는데 진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오만석은 자타가 공인하는 써전이었다.

내과 전문의까지 나온 상황에서 진단을 내리기 힘들다면 일반적으로 보는 질환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증상과 빠른 진단이 어렵다는 사실에 언뜻 스치는 질환이 있었다.

대동맥 박리 혹은 부분 파열이었다.

“대동맥은 괜찮아?”

“대동맥류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이었다.

때문에 써전에게는 가장 힘든 환자 중 한 명이었다. 분명 수술을 요하는 상태로 보이는 환자의 질환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큰 문제가 없었다. 자칫 적정한 수술 시기를 놓칠 경우 치명적인 일이 발생하고도 남기 때문이었다.

모든 답은 결국 환자에게 있다.

내과 펠로우와 외과 당직 팀까지 이미 진찰을 한 의사만 네 명이었다. 필요하다는 검사까지 모두 한 상황에서 진단을 못 내리자 보호자가 몹시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환자에겐 불안 그 자체였다.

김지훈이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외과 김지훈입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진료한 결과 상당히 드문 경우로 보입니다. 내과 질환이라면 지켜볼 여지가 있지만 외과 질환이 원인이라면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네요. 불편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보호자들이 순순히 수긍했다.

아마도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의사들의 말보다 중견으로 보이는 김지훈의 말을 더 신뢰하는 것 같았다. 경험 많은 의사를 믿는다는 얘기겠지만 김지훈도 어느새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는 말이었다.

‘나쁘지만은 않네.’

신중하게 진찰을 시작했다.

증상 변화 및 병력을 청취하고, 단서가 될 만한 사항은 모두 질문했다. 여전히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진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당직 의사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댔다.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 김지훈이 마지막 결정을 해야 했다. 무작정 배를 열 수도 없었고, 일반 병실에서 보기에는 너무 불안했다.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중환자실에 입원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순간 환자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복통이 심해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급기야 바이탈까지 흔들렸다.

극히 짧은 시간이었다.

모찬우와 고경철이 바로 달려들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분명 배 속에 큰 문제가 생겼다. 이런 증상과 경과를 보일 질환이 뭘까? 혹시?’

또 하나의 병명이 뇌리를 스쳤다.

극도로 드문 질환이지만 경험이 있었다.

“오만석 선생, 고령에 갑작스러운 복통과 복막염 증세까지 보이지만 뚜렷한 유발 요인이 없어. 각종 검사에서도 명확한 병변이 보이지 않는다면 뭘까? 이토록 빠른 변화를 보인다면 무엇을 의심해야 하지?”

오만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례차례 의심되는 질환을 좁혀 나갔다.

마침내 한 가지 병을 생각해 냈다.

“설마? 장 동맥 혈전증이요?”

“가장 강력하게 의심돼. 예전에 이런 환자를 본 적이 있어. 대장 괴사가 진행되면 몇 시간 내에 사망할 수도 있으니까 바로 개복해서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혈전으로 인한 동맥 폐쇄!

어디에 발생하든 초기에는 뾰족한 진단 방법이 없지만 진행 속도가 무척 빠른 질환이었다. 검사로 진단이 가능해질 때쯤이면 발생 부위에 괴사가 상당 부분 진행돼 사망에 이를 정도로 무서운 경과를 보였다. 혈관 촬영이 거의 유일한 진단 방법이라 할 수 있었지만 시행이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환자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바로 보호자를 만났다.

“장으로 가는 동맥이 막힌 것 같다고요? 어떤 병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추측만으로 수술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아버님 연세가 칠순입니다.”

“보호자분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만 의사로서 내린 판단입니다. 이미 복막염 증세를 보이는 이상 개복해서 병변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확진을 위해 추가 검사를 하는 것조차 위험할 수 있습니다.”

김지훈은 단호했다.

명확한 증거 없이 개복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죽고 사는 문제라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더구나 몇 명의 전문의와 함께 진찰하고 내린 진단이었다.

병명이 맞는다면 이송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설득만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기에 최대한 빠르고도 상세하게 대장 혈전증에 대해 설명했다.

보호자들에겐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수술 결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우왕좌왕했다. 그때 아까부터 곁눈질을 하던 누군가 김지훈을 보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부원장님이십니까?”

“맞습니다.”

분위기가 변했다.

이미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린 전문 병원의 부원장이 직접 진찰을 했다. 알게 모르게 이름이 알려진 의사에 대한 신뢰가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마침내 보호자가 동의했다.

김지훈이 바로 움직였다.

이미 환자의 바이탈이 흔들리고 있었다. 원하는 결론이 난 이상 보호자들이 동의한 이유를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환자 올립시다.”

아침 일곱 시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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