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53화 (1,253/1,329)

19화

김지훈 발바닥에 불났다.

병동 건립에 관한 문제는 몰라도 소아 외과에 관한 일은 인력 조정 등 병원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었다. 기한이 촉박해도 약정식이 열리기 전에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쳐야 했다.

그것이 박재순 회장에 대한 예의였다.

쉽지 않았다.

소아 외과 전공 전문의 확충부터 난관이었다.

모찬우와 한수영이 찾아오긴 했다.

무척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성인과 소아 수술은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애초 생각과 다르다면 다를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일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선생님, 일주일만 더 주십시오.”

김지훈이 웃었다.

애초 무리한 요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진지한 대화 끝에 간 이식을 선택한 모찬우는 물론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한수영의 마음만으로도 고마웠다.

“한수영 선생, 전공을 바꿀 생각이 정말 있는 거야? 만일 내가 한 제안이라는 점 때문에 고민한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이 길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어.”

“부담이 있지만 선생님 때문이 아닙니다. 솔직히 소아 수술을 보며 관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일주일은 확실히 짧습니다.”

“상황을 핑계로 나도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방법은 어떨까?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수술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마침 다음 주에 수술이 하나 잡혔으니까 송진우 선생과 같이 준비해 봐. 아니다 싶으면 깨끗이 접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주일을 더 준다고 쉽게 결정할 수 있을까? 성급했어. 당분간 소아 수술을 진우와 나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자. 희귀 질환 수술은 한 건이 단순한 한 건이 아닌데 시간을 뺄 수 있을까?’

간 이식 파트 교수 지원을 앞둔 이혁원에게 과도한 부담을 줄 수도 없었다. 상황을 봐 가며 일정을 최대한 조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복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반드시 단계를 밟아야 진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부분이든 확실하게 준비가 되면 다른 부분까지 견인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간호 부장과 간호 과장을 만나야 했다. 이경석 말대로 전담 간호사의 필요성을 충분히 공감했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전담 간호사가 최소 두 명이 있어야 하고, 마취과 간호사까지 하면 적어도 세 명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 잘 아시죠? 단지 몇 명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평소 수술이 없다면 모르지만 그 인원을 당장 배정하기에는 굉장히 빡빡한 상황이에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기부가 아니더라도 희귀 질환을 앓는 아이들이 어떤 상황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안타깝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숙련된 간호 선생을 원하신다고요? 사람 한 명 키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시잖아요.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일이 아래로 쏠릴 수밖에 없어요. 업무 부담이 가중돼 누군가 그만두기라도 하면 수술 배정 자체가 어려울 수도 있어요.”

“반드시 신규 간호사를 채용하겠습니다.”

“교육도 문제지만 새로 들어온 선생들이 오랫동안 근무할지가 가장 큰 문제 아니겠어요?”

고질적인 문제였다.

전문 병원의 보수와 복지가 낫다고 해도 상대적일 뿐이었다. 더구나 병원 일 자체가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일인 탓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다. 특히 수술은 고도의 정신력과 강한 체력을 요구하는 업무였다.

일반 병실 근무 간호사도 퇴직이 빈번한데 수술 방, 응급실, 중환자실 간호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보수만으로 견뎌 낼 일이 아니기도 했다.

‘보상이 충분해도 각자 판단이 다를 텐데 사명감이라는 말 하나로 해결될 일이 아니지.’

“저도 공감합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부탁드리는 수밖에 없네요. 기부하신 분의 뜻을 최대한 이룰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장 무리가 가지 않는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고 과장과 잘 상의할 테니 부원장님은 인력 충원에만 신경 써 주세요.”

“감사합니다.”

“고 과장은 따로 할 말 없어?”

“부장님 말씀이 다 맞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부원장님도 우리 간호과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믿어요.”

고경아는 끝까지 공사를 구분했다.

김지훈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후우! 사람이 있을 때는 돈이 부족하더니 정작 돈이 생기니까 사람이 부족하네. 단 한 사람만 더 있어도 큰 힘이 될 텐데 그것조차 어렵네.’

발걸음이 약간은 무거워졌다.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나마 마취과, 소아과와는 말이 잘 통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의사라는 사실이 꽤 작용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가 없는 일은 없었다.

윤서연은 대화 내내 강한 눈빛으로 펠로우 선발 확대를 요구했고, 강은미 역시 똑 부러지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당당히 말했다.

“윤 교수, 나야 펠로우를 충분히 뽑고 싶은 마음이 굴뚝인데 결정권자가 따로 있잖아. 얼굴 매일 보는데 압력 좀 가해. 마침 약정식에 신 이사장이 오니까 나도 이번 기회에 미리 말해 놓을게.”

“김 부원장님,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별합시다. 우리 병원 인력 선발은 원장님과 부원장님 권한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요?”

친구가 존댓말 쓸 때는 조심해야 한다.

“그렇긴 한데, 최종 결정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사장님과 의논할 수는 없잖아? 난 지금 부원장과 얘기하고 있어. 약속한 내용을 철저하게 이행해 주길 바라. 소아과까지.”

김지훈이 고개 숙였다.

역시 배고프다고 뜸조차 들이지 않으면 설익기 마련이었다. 어마어마한 기부에 취해 너무 성급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반면 아이들은 절대 수술 날짜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더구나 완벽한 준비를 한답시고 미루다 보면 한없이 밀리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성급한 결정만은 아니야. 우리 병원의 역량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면 가능한 일이니까 최대한 상의해서 진행하는 것이 최선이다.’

역량과 효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행히 약정식 준비는 민정호 주관하에 원활하게 돌아갔다. 어느새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대회의실이 행사 준비로 분주해졌다.

“너무 요란하지도 않고 좋네요.”

“회장님이 상당히 소박하신 분이었습니다.”

“입원 중에 자식 말고는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은 이유가 있겠죠. 솔직히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자식들도 그 난리를 치지 못해 더 편했을 텐데 말이에요. 그건 그렇고, 축사하실 분은 정해졌나요?”

“회장님, 이사장님, 원장님과 외부 인사 중 한 분까지 네 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이번 기부에 가장 큰 공헌을 했는데 부원장님도 한 말씀 하셔야죠?”

김지훈의 눈이 쭉 찢어졌다.

“스승… 아니, 이준영 선생님도 안 하시는데 나보고 축사를 하라고요? 내가 낄 자리가 아니에요. 네 분이면 충분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슨 소리예요?”

“미래를 보시라는 말입니다. 내용만큼 중요한 것이 형식입니다. 원장 자리를 두고 하는 싸움도 정치판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고요. 이런 행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면 향후 입지 구축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말을 참 자연스럽게 하시네. 능력 있는 사람이 원장이 돼야지, 아무나 하면 되겠어요?”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왜 이래요? 기부를 하신 분에게만 집중하세요. 행사 끝나는 대로 신규 간호사 선발 작업을 즉시 진행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말고요. 아! 소아 수술도 바로 이어지니까 돈 때문에 보호자분들 불편하지 않도록 박 이사님과 잘 상의해 진행해야 합니다.”

민정호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능력 있는 사람이라!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부원장님이 원장님을 맡아야 합니다.’

김진호 원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릇 어떤 조직이든 설립 초기, 발전이 요구될 때, 안정이 중요한 시기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이 달라지는 법이었다. 특히 가장 꼭대기에서 이끌어 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 합당한 능력과 덕목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

김지훈의 연륜이 깊다고 볼 수는 없었다.

반면 열정에서 비롯된 추진력과 행동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했다. 개원 초기 수많은 문제점이 노출될 종합 병원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데 김지훈 이상의 인재는 없다는 것이 민정호의 판단이었다.

‘신 이사장님과 이사님들 생각도 다르지 않겠지. 만약 판단이 다르다면 기필코 설득해야 한다.’

물론 자리 욕심이 없는 김지훈이기에 말이 나오자마자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민정호의 추진력 또한 만만치 않은 데다 명분에 약한 김지훈이었다.

민정호는 실행 가능한 일이라 믿고 있었다.

그 역시 종합 병원 설립이 목적이었고, 반드시 실행시켜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처럼 선대 이사장 및 진상건과 얽힌 관계는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선대 이사장님은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나 하셨을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민 부원장님이라도 집중 좀 합시다. 기부금 운용 계획서와 약정식 진행 서류 한 부 주세요.”

“운용 계획은 아직 기본 틀에 불과하고, 정식 약정식 끝난 후에 전체 회의를 통해 확정하기로 하셨잖습니까? 왜 그러시죠?”

“직위가 없어도 보고드려야 할 분이 있잖아요? 준비가 어설프다고 자꾸 미뤘다간 일 다 진행된 후에 말씀드릴 판이네요.”

서류를 받아 든 김지훈이 휘리릭 사라졌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엘리베이터를 빤히 보고도 계단을 이용했고, 발걸음엔 왠지 힘이 넘쳐났다.

민정호가 웃고 말았다.

김지훈의 마음을 고스란히 본 덕이었다.

‘평생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이상의 행운도 없겠지?’

부러운 일이었다.

금요일 하루가 다 지났다.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마주 앉았다.

그윽한 커피 향이 흐르는 가운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행정적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사람치고는 상당히 진지했다.

“고생이 많다.”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가져오지 못해 죄송합니다. 기부 액수가 워낙 큰 데다 사업 영역이 넓어 확정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습니다.”

“서두를 것 없어. 그보다 소아 외과 파트 구성은 잘 진행되고 있어?”

“그게 제일 어렵네요. 이번 일로 새삼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병원에 필요한 인재를 사전에 키우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는 김지훈이었다. 자신의 길을 따르려 하지만 김지훈만의 길이 따로 있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았다.

‘잘하고 있다. 동료들과 함께 발전하려 하는 것이 곧 네 자신이 성공하는 길인 것 같구나. 네 꿈이 이뤄질 날도 머지않았어.’

제자를 위해 할 일이 있었다.

“소아 외과 파트가 갖춰질 때까지 당분간 나도 수술에 참여하마. 혁원이까지 네 명이라면 한 달에 네 건 정도는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야.”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최고의 써전이 도와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생각할 때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격무에 시달리는 스승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정도 여유는 있어.”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힘들면 혁원이가 대신 할 수도 있고, 진우 역시 빠르게 자리를 잡을 겁니다.”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서 하는 말이야. 혼자 감당할 이유가 없어. 우리 과 일이다. 다음 주부터 바로 희귀 질환 준비 회의에 참석하마.”

단호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일반외과 일이기에 함께 수술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이준영 교수를 대신할 써전은 많았다. 시간과 여력이 없다는 사실도 모든 써전이 갖는 공통적인 문제였다. 소아 수술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득이 되는 일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스승님과 함께 수술한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지만 괜찮으실까? 너무 힘들지는 않으실까? 아니야. 스승님은 써전 중의 써전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손이 떨리면 끝인 의사가 써전이었다.

즉,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술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준영 교수는 결코 자신의 한계나 문제를 숨길 써전이 아니었다.

좋은 면만 생각할 때였다.

결국 제자를 위한 마음이었다.

김지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다. 늦었다. 커피 다 마셨으면 가 봐.”

조금 더 자리를 갖고 싶었지만 오늘도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즐거워진 김지훈이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묵직한 목소리가 다가왔다.

“네 뒤에 언제나 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피곤할 텐데 몸 관리 잘해.”

상상도 못한 말을 들었다.

울컥 뭉클해진 김지훈이 훅 긴 숨을 내쉬었다.

‘이 느낌은 뭐지?’

채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옆구리에서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전해졌다.

이 주 만에 맞는 당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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