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일반적인 인간관계처럼 수술 팀에도 소위 궁합이라는 것이 있다. 마음 안 맞는 써전끼리 몇 시간씩 얼굴 맞대며 수술하다간 자칫 사달이 나고도 남았다.
물론 의국 분위기를 믿었지만 세상일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짧은 기간이라 해도 함께 수술해야 할 이혁원과 평생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송진우의 판단이 무척 중요한 이유였다.
반드시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장차 소아과의 핵심이 될 의사이자 써전들과 호흡을 맞춰야 할 강은미의 생각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소아과 소속 신규 펠로우를 선발할 때 중요한 역할을 맡겨야 할 수도 있었다.
다섯 명의 써전과 한 명의 소아과 전문의가 모였다. 갑작스러운 호출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부원장과의 자리였다.
이내 진지한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김지훈이 소아 외과에 관한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열쇠를 쥐고 있는 한수영과 모찬우가 모이게 된 이유를 깨닫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결론적으로 당장 소아 외과를 전공할 써전이 한 명 더 필요해. 당분간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하겠지만 일 년 후에는 송진우 선생과 함께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돼.”
“이혁원 선생님은 이미 간 이식 파트를 선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일 년 후에 선생님까지 소아 외과에서 완전히 손 떼시는 겁니까?”
“그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난 송진우 선생을 믿고 있어. 너희 둘도 당연히 신뢰하기 때문에 제안하는 거야. 말 그대로 제안이니까 부담 가질 이유는 없어. 어디까지나 선택은 두 사람 몫이고, 거절한다고 해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당장은 이혁원까지 있어 지나치게 서두를 일도 아니었다. 애초 택했던 진로를 바꿔야 하는 문제기에 적절한 시간을 주어야 마땅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언제까지 결정해야 합니까?”
“미안하지만 오래 기다리지는 못해. 소아 외과를 전공했을 때 오는 장단점을 잘 생각해서 일주일 내에 결정했으면 좋겠다.”
한수영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장점은 김지훈이 병원을 떠나거나 실권을 완전히 잃지 않는 이상 교수 임용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소아 외과 전문의가 많지 않다는 현실도 분명 유리한 점이었다.
단점은 역시 불과 일주일 사이에 인생의 진로를 바꿔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오직 간 이식만이 목표일 수는 없지만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어떤 말로도 부담을 줄 수밖에 없어 이해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최종 결정은 각자의 판단에 따를 일이었다.
“모찬우 선생, 한수영 선생, 다시 말하지만 어떤 불이익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병원 상황이 변했고, 그에 따라 새로운 제안을 한 것뿐이야. 송진우 선생하고 강은미 선생은 하고 싶은 말 없어?”
불타는 고구마 하나 나타났다.
송진우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다.
강은미는 다소 들떠 보였다.
“소아 외과 일이지만 결국 소아과 일이기도 하네요. 희귀 질환 전문 병원으로 발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과가 확장되면 좋죠.”
“강은미 선생이라면 충분히 그렇게 만들 수 있다고 믿어. 다들 소아 외과 운영에 좋은 의견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주면 좋겠다. 늦었네. 그만 일어나자.”
부원장실을 나간 후에도 펠로우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았다. 제안을 한 사람과 받은 사람의 입장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참 어렵네. 신규 병원이 커 가려면 거쳐야 할 일들인가? 강요라고 느끼지는 않았을까? 제발 부담 갖지 말고 결정하기 바란다.’
생각이 많아지는 하루였다.
다른 병원의 귀중한 인력을 빼 오지 않고, 전문 병원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하지만 종합 병원 완공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인재 확보는 분명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다.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안이 필요했다.
의사를 포함한 의료진 전체는 물론 행정직까지 많은 사람을 선발해야 한다. 능력 검증까지 요구돼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산업 의학과만 문제가 아니네.”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일거리 조금도 줄지 않았다.
아니, 더 늘었나?
기부가 가져온 여파가 대단했다.
말이 억 단위이지 솔직히 막연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너무 큰 액수였다. 소아 희귀 질환 환우회 관계자들을 만나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준비되는 대로 일주일에 한 명씩 무료로 수술해 주시겠단 말씀입니까? 정말입니까?”
“예.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하신 이상 우리 병원 역시 한 아이라도 더 빨리 수술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시울을 붉혔다.
환우회 일을 보는 사람 역시 희귀 질환을 앓는 아이의 부모 중 한 명인 데다 모두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인지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대기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급하지 않은 아이가 없었지만 의사 눈에는 분명 우선순위가 있었다.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고 해도 당장 수술이 필요한 아이를 선별해야 했다.
‘신중해야 한다. 내 선택이 잘못되는 순간 살릴 수 있는 아이 한 명을 잃을 수 있다.’
고심하며 우선순위를 정하던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뱉고 말았다. 일전에 확인한 목록이 확실한데 보이지 않았던 내용이 보였다.
깨알 같은 숫자.
치료비였다.
하나같이 평범한 가정은 감당하기 힘든 액수였다.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을 것이다.
단 한 명의 결정이 모든 것을 바꿨다.
부모를 절망에 빠트리고, 아이를 사지로 몰았던 돈이 오히려 희망으로 변했다. 자칫 나락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를 가족들 모두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많은 아이들을 돈 걱정 없이 치료할 수 있다니 이제야 기부액의 크기가 다가오네.’
관계자 모두 울며 웃었다.
연락을 받은 부모들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돈이 있어도 치료가 힘든 아이가 있었지만 가장 큰 걱정을 덜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가오는 달의 수술 차례를 정한 김지훈은 사지에 빠진 아이를 결코 잊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치료비를 떠나 가장 급한 아이일 수도 있었다.
“선천성 담도 협착으로 소장 연결술을 받은 아이 상태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유일한 치료는 간 이식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부모님께 연락해 공여자가 확보되면 즉시 수술하겠다고 말씀 전해 주십시오.”
“공여자 수술 비용을 따로 마련해야 할까요? 죄송하지만 넉넉한 집안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문제까지 모두 해결할 테니 공여자 확보에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대기 순위에서 밀린 아이들도 상태가 나빠지면 언제든 우선순위로 올려야 한다는 점 잊지 마십시오.”
관계자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항상 어둡고 무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박재순 환자가 제일 먼저 보아야 할 미소를 가로챘다는 생각에 미안할 지경이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송진우 선생, 다음 주에 수술할 아이 정했으니까 확실히 준비해.”
“수술 팀은 어떻게 구성할까요?”
“내가 들어가야 할 수술이면 사전이 미리 말해 줄 테니까, 별도로 말이 없으면 송진우 선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해. 한수영 선생이나 모찬우 선생 중 소아 외과를 전공할 의향이 있다고 하면 퍼스트 세워도 좋아.”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온전히 맡긴 채 나 몰라라 할 김지훈이 아니었지만, 스스로 수술 팀을 짜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선배인 이혁원을 퍼스트로 세워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자식! 허구한 날 본 얼굴인데 오늘따라 벌게진 얼굴이 달라 보이네. 기분 탓인가?’
일이 밀린 김지훈에겐 다행이었다.
곧바로 민정호를 찾아 정식으로 열릴 기부 약정식 문제를 논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참석자는 정해졌습니까?”
“하마터면 약정식을 아예 열지도 못할 뻔했습니다. 입원 중에 회사 임원 한 명 안 보인 이유가 있더군요. 극구 필요 없다는 박재순 회장님을 설득하느라 애먹었지만 박현철 이사님 덕분에 참석하기로 하셨습니다.”
“성격도 영향이 있겠지만 짧은 시간에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 이상으로 고민하셨다는 말이겠죠. 기부 이유 중 자식들과의 분쟁은 아주 작은 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 외 참석자는요?”
“이사장님과 이사 전원, 각 병원 원장단과 우리 병원 주요 인물들이 모두 참석할 겁니다. 환우회에도 요청을 해 놓았고요.”
‘만난 김에 나도 얘기를 할 걸 그랬나?’
“우리보다 환우회분들이 더 중요하니까 신경 바짝 쓰세요. 신생아 가족은 절대적으로 챙겨야 합니다.”
민정호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신생아 대목에서 목소리가 높아지시네.’
“사실상 기부 대상 일 호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박재순 회장님도 만나고 싶으실 겁니다.”
김지훈의 눈이 찢어졌다.
‘스승님도 아니고 웃으려면 웃지, 뭐 하는 거야? 이 정도 사이가 됐으면 대놓고 웃어도 되잖아?’
“왜 웃어요?”
“흠! 웃지 않았습니다. 순간 부원장님 열의가 강하게 느껴졌을 뿐입니다. 신생아 수술이 무척 기억에 남으신 모양입니다.”
“아이 한 명 살렸는데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어요? 그건 그렇고, 앞으로 웃으려면 확실하게 웃어요. 쯧! 사람 감질나게 입꼬리만 움직이고 말이야.”
“안 웃었습니다.”
그래! 성격대로 사는 세상이다.
김지훈이 포기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말고 준엄한 경고를 날렸다. 찌를 것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일석이하고 술 먹을 때 티 나게 웃지 않았나?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손 교수하고 진충기 교수님에게도 똑같이 행동하길 바랍니다. 만약 제대로 웃다가 걸리면…….”
“뒤끝이 제법 있으십니다. 제 문제는 여기서 접으시고 약정식 행사 계획서에 서명부터 해 주십시오.”
“박재순 회장님과 기념사진 찍을 때 하얀 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확인할 겁니다.”
뒤끝 작렬이었다.
부원장란에 서명을 하면서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왠지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는 생각이 든 민정호가 재빨리 마무리를 지었다.
“당분간 약정식 준비로 바쁠 것 같습니다. 연락할 일 있으시면 문자로 남겨 주십시오. 그럼 이만!”
‘에이! 내가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늦었다.’
별 시답잖은 일로 자존심을 세우던 김지훈이 후다닥 걸음을 재촉했다. 본격적인 소아 수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경석이 맡은 일이 잘 해결됐는지 확인해야 했다.
“윤서연 선생이 흔쾌히 동의했어. 단, 내년에 펠로우를 최소 세 명 이상 뽑아 달라고 하더라. 오다가 내과 공정식 선생 만났는데 거긴 다섯이야.”
“어후! 머리 아파. 간호과는요?”
“마취 담당 간호사까지 신규로 네 명 요구하면서 딱 한 달만 여유를 주겠대. 소아 외과 전담 간호사는 경력자가 맡을 수밖에 없다면서 그 이상 기존 수술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데 말이 탁 막히더라.”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억만금이 있어도 쌓아만 놓으면 종이에 불과한 것이 돈이었다. 생각해 보면 기부 역시 스스로 움직일 리 없는 돈이 아니라 사람의 결정이었다.
역시 돈보다 사람이었다.
하기에 김지훈의 역할이 중요했다.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어느새 전문 병원을 대표하는 의사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의료와 행정 영역 모두에서 말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간 이식을 비롯해 복강경까지 다수의 전담 간호사가 있지만 소아 외과는 단 한 명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요구되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김지훈이 곧바로 일어났다.
본의 아니게 일찍 퇴근했다.
“마님! 간호 부장님께 소아 외과 전담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소식 들으셨죠?”
“결론 난 거 아니에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마당인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모든 사람에게 실력을 인정받는 간호사가 전담하면 좋지 않을까요?”
“그래서요?”
“간호 부장님과 잘 얘기했으면 해서요. 아니면 직접 제안을 하는 방안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고경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 상황에서 당분간 고생할 것이 빤한 업무를 자청하는 간호사가 있을 리 없었다. 제안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김지훈이 눈치를 보며 재빨리 움직였다.
남은 집안일 충실히 하고, 잘 시간이 될 때까지 희연이와 놀며 피곤이 쌓인 엄마 곁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다. 물론 당분을 보충할 주스 한 잔과 피부에 좋은 과일을 대령한 지 오래였다.
아! 긍정적인 답은 없었다.
오히려 살찐다고 핀잔만 먹었다. 결정적으로 평생 살을 맞대며 어려움도 기쁨도 함께해야 할 부부 사이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넘지 못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카르페 디엠이 멀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