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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51화 (1,251/1,329)

17화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막상 손일석, 이경석과 자리를 함께하자 평소와 뭔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내심 당연히 맡아야 할 일이라는 생각 한편으로 이번 일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맡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데다 엄청난 기부금을 잘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 탓인지 약간의 여유를 갖고 싶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도 제대로 안 되네. 나 아니어도 소아 외과를 맡을 능력자는 많으니까 적당히 나눴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한 달에 몇 건을 해야 적정할까? 후우! 계산이 쉽지 않네.’

일종의 꾀가 난 탓인지 소아 외과 부문 확충 방안부터 만만치 않았다. 단지 써전 한두 명 늘리면 되는 일이 아니라 관련 분야 전체를 강화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경석이 입술을 모았다.

“일단 한 달에 몇 건이나 시행할지가 중요해. 게다가 문제가 하나 더 있어. 희귀 질환 수술이 생각 이상으로 많아지면 다른 소아 수술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경석이 형 말이 맞아. 어려운 수술이 많아질수록 상대적으로 쉬운 수술이 늘어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야. 탈장이든 뭐든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성인보다 손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까지 고려해야 돼.”

“이혁원 선생이 도와준다고 해도 송진우 선생이 혼자 소아 외과를 관리하기 힘들 수밖에 없어. 펠로우라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돼. 실력은 둘째 치고 경험이 너무 부족하잖아. 의욕만으로 끌어갈 분야가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종합 병원이었다면 소아 외과 과장으로서 관련 분야 전체를 총괄해야 한다. 더구나 환자나 보호자는 귀 막고, 눈 감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외부인 눈에도 빤히 보일 전문 병원의 구조와 직책을 감안할 때 그만큼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펠로우에게 맡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비볐다.

“수술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많아서 하루라도 빨리 소아 외과 진용을 갖춰야 하는데 큰일이네. 이런저런 문제로 너무 늦어지면 기부를 하신 분의 뜻에도 어긋나고 말이야.”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외과 내에서도 보다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세부 분야인 것처럼 마취과, 간호과 역시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했다. 소아과 전문의 보강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군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소아 외과 팀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져 말발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빠르게 진척될 것이다.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일석아, 최소한 나눠서 하자.’

“구성에서부터 운영까지 다른 과 협조가 절실한데 역시 책임자가 관건이겠지? 종합 병원이 완공될 때면 진우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을 테니까 그사이가 문제네. 기부와도 관련이 깊은 일이라서 한두 명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두 명이면 될까?”

손일석과 이경석이 동시에 김지훈을 보았다.

아주 말 잘했다는 표정이었다. 넌지시 두 명이라는 말에 힘을 팍 주었건만 뭔가 잘못 전달됐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쳤다.

“눈빛이 왜 이래?”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답이 안 나와? 일단 소아 외과를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써전부터 추려 보자.”

순간 뜨끔했던 김지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추려 보자고?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젠 일을 분산해야 할 때도 됐잖아? 기부금만 삼백억이다. 소아 외과는 일부에 불과해.’

기대 이상이었다.

손일석이 진충기 교수, 이경석과 함께 자기 자신을 꼽았다. 다들 주력 분야가 다르지만 실제 소아 외과 전담 책임자가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인 데다 병원 일로 바쁜 김지훈을 배려하는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누구를 추천할까?’

“세 명을 꼽긴 했지만 진충기 선생님과 나는 한 명이나 다름없어. 간 이식 파트 일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상황에서 학회 일까지 해야 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이제 학회를 창립했는데 앞으로 일이 줄어들까?”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병원 내부 일보다 외부 일이 몇 배로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수긍해야 했다. 더구나 간 이식 파트를 관리해야 하는 진충기 교수와 손일석 역시 정시 퇴근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상황이었다.

‘그러면 경석이 형을? 형 스타일이면 소아 외과를 끌고 나가기 충분한 데다 다른 과와도 사이가 좋으니까 적임자일 수도 있겠어. 아니, 딱 맞는 사람이네.’

“남은 사람은 우리 과장님인데……. 자! 봅시다. 과장 자리가 자신의 과 업무에 별 신경 안 쓰면 한없이 편하겠지만 반대로 힘들려면 엄청나게 힘든 자리란 말이야. 김 부원장님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당연히 힘든 자리…….”

“김 부원장이 생각해도 그렇지? 라파로만이 아니라 펠로우 관리부터 행정적인 일까지 한도 끝도 없는 게 사실이야. 결국 우리 셋 모두 적임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어.”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막판에 방향을 비틀었다.

“그래서?”

“소아 외과 특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박재순 회장님의 기부를 이끌어 냈고, 어떤 뜻을 가졌는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누굴까? 만일 그 사람이 창립 학회가 끝난 후 학회장으로서 실무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면 우리는 이미 정해진 답을 두고 쓸데없는 고민을 한 거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병원 일이 엄청나게 많아. 모든 일을 혼자 다 해결해야 한다는 게…….”

“아주 지당한 말씀이십니다만 원장님은 왜 계실까요? 행정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민정호 부원장은 또 어떤 존재일까요? 기부금이 어마어마해서 관리가 쉽지 않겠지만 박현철이란 양반이 이사가 됐다면 굳이 손에 피, 아니 돈 묻힐 일이 없겠죠?”

결론 나왔다.

강력한 압박이었다.

다들 일에 치일 정도로 바빠 반박할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손일석 말처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일은 따로 있었다.

김지훈이 후회하고 말았다.

‘기부금 때문에 내가 너무 들떴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친 걸까?’

결정적으로 어떤 상황이든 소아 외과 일이야말로 의사 본연의 업무였다. 정말 지쳤다면 일을 피하기 전에 회복할 방법부터 강구하는 것이 마땅했다.

무엇보다 수술이 필요한 환자는 생사가 걸린 문제일 수도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않는 한 환자는 결코 기다릴 수 없을뿐더러 기다리게 해서도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기부금에 정신이 팔려 정작 무엇을 가장 중시해야 하는지를 잊었다. 김진호 원장과 민정호의 권한과 역할마저 무시한 꼴이었다.

“알았어. 무엇을 상의해야 하는지 이제야 알겠네. 내 생각만 한 모양이야.”

손일석이 현란하게 혀를 놀리는 동안 잠자코 듣기만 하던 이경석이 모처럼 입을 열었다. 당연하다는 눈빛 속에 미안한 감정이 가득했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미안하지. 사실 소아 외과를 제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의사가 누구겠어? 실력도 중요하지만 열정이 있는 의사잖아. 정훈이를 보면 손 교수 열정도 만만치 않겠지만 학회 일에 경험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면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러게요. 내 생각이 짧았네요.”

“우리도 최대한 김 부원장이 짐을 덜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힘내자.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힘들다 못해 일에 치일 때면 병원 일 혼자 다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느낌일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다들 그렇게 생각할 테고, 실제로 피곤이 쌓일 정도로 일하고 있었다.

웃어야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을 두고 얼굴 찡그려 봐야 스트레스만 받을 것이 빤했다.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김지훈이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새 마음 새 뜻으로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해 볼까요?”

“이제야 김지훈답네. 당장은 김 부원장과 이혁원 선생이 있으니까 문제없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아 외과 써전을 미리 확보해야 돼.”

“혁원이와 나는 결국 간 이식 분야에 집중해야 합니다. 결국 내부에서는 진우 한 명뿐인데 초빙이 가능할까요?”

“다른 병원이라고 소아 외과 자원이 넘칠까? 없는 사람 빼 오는 건 예의가 아니야.”

“그럼 펠로우 중에서 키워야 한다는 말인데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손일석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어떤 면에서는 간 이식보다 더 전문적이어야 하는 파트가 소아 외과야. 같은 수술을 해도 훨씬 더 어렵고,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잖아?”

“그래서?”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펠로우 중에 능력이 있는 써전을 뽑아야 제대로 굴러갈 거야. 설득하고, 키워 주는 건 당연히 우리 몫이고. 사실 교수로 남고자 한다면 소아 외과 쪽이 훨씬 유리하잖아.”

“일리가 있네. 생각한 펠로우라도 있어?”

김지훈과 이경석이 귀를 쫑긋 세우자 손일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왜 이래? 한수영 선생하고 모찬우 선생이 딱 적임자라는 생각 안 들어?”

“세부 전공을 아예 바꿔야 하는 일이야. 가장 적극적인 자세로 간 이식 파트만 보고 들어왔는데 얘기가 될까?”

“후우! 김 부원장이 그런 걱정을 할 줄 몰랐네. 멀쩡하게 혈관, 위장관, 대장 전공을 하던 써전을 간 이식과 라파로로 바꾼 사람이 누구지? 제자를 잃고 흘리던 스승님들의 피눈물을 벌써 잊은 거야?”

김지훈의 입이 턱 막혔다.

어떻게든 전문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본인들의 동의가 있긴 했지만 자신의 설득이 아니었으면 이뤄졌을 일이 아니었다.

내심 아픈 구석이었다.

“미안하게 새삼 그 얘기는 왜 또 꺼내?”

“그런 각오로 소아 외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야. 기부받아 하는 수술이라고 문제 안 생기겠어? 시어머니투성이인 간 이식 파트보다 머리가 될 수 있는 파트가 오히려 매력적일 수도 있어.”

“진우와 함께 핵심이 된다!”

“그렇지. 세부 전공 바꾼다고 써전이 내과 의사 되는 것도 아니잖아? 만류귀종이라고 했다. 어차피 써전은 다 한곳으로 모이게 돼 있다고.”

“한곳?”

“제대로 퇴근도 못하면서 고생을 자처하는 이유가 뭐야? 대가!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 우리 모두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목표를 위해 달리는 거 아니야? 수영이하고 찬우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도 괜찮다고 봐. 싫다고 하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자구.”

오늘따라 유난히 말발이 서는 손일석이었다.

묘한 설득력까지 느껴졌다.

최선의 방안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일석이 말이 맞아. 제안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부담은 절대 금물!’

“오케이! 내가 만나 볼게. 그럼 다른 과는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을까?”

이경석이 나섰다.

“내가 다른 과 사람들하고 얘기해 볼게. 당장 일이 늘어나더라도 마침 펠로우 선발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마취과하고 소아과는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고 봐. 대신 김 부원장은 펠로우 티오를 확실하게 따내야 돼.”

“펠로우 선발 인원은 걱정하지 마세요. 신 교수와 담판을 짓겠습니다. 건물 공사와 관련이 있는 기부금을 걸고 넘어갈 수도 있고요.”

“협박을 해서라도 반드시 관철시켜. 그럼 간호 부장님 만나서 전담 간호사 배정만 합의하면 되겠네. 아무래도 신규 선발을 요구할 테니까 민 부원장과도 협의가 필요하겠지? 손 교수, 예산 문제는 항상 껄끄러운데 같이 만나자.”

“이런 때를 대비해 민 부원장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반항하면 바로 강호의 법도를 가르쳐 주겠습니다.”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다들 바쁜 와중에도 도와주겠다는 동료들이 이렇게 많은데 왜 힘들다고만 생각했을까?’

“경석이 형, 고마워요. 일석아, 고맙다.”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아. 그게 강호의 도리다. 근데 희귀 질환 수술은 한 달에 몇 건이나 할 생각이야? 찬우나 수영이 둘 중 한 명까지 가세하면 케이스가 많아야 하잖아?”

당연한 일이었다.

논의 전까지 몇 건이 적정할지를 두고 갈팡질팡했던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환우회에서 보내 준 명단을 보면 끝도 없어. 우선순위 다시 짠 후에 최소 일주일에 한 건은 해야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지 않겠어?”

“다른 수술까지 더하면 꽤 되겠네. 소아 외과가 반석 위에 올라서는 일이 시간문제라면 진우야 불타는 고구마가 될 게 빤하고, 수영이나 찬우도 솔깃하겠다. 근데 김 부원장은 시간을 낼 수 있어?”

“도훈이가 췌장 파트를 확실하게 맡아 주면 휘플 라파로 때나 내 손이 필요할 테니까 문제없어. 혁원이 실력도 만만치 않아.”

“강은미 선생하고 환자 궁합까지 훌륭하긴 해. 그럼 얼추 다 해결됐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움직이자. 아! 나는 학회 일입니다.”

재빨리 자리를 정리했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한수영과 모찬우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이경석은 이미 김진호 교수부터 만난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끼리 얘기하는 것과 당사자에게 얘기하는 건 완전히 다른데 무엇부터 꺼내야 하지? 세부 전공을 바꿀 의향이 있냐는 말만으로도 자칫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으니까 신중해야 돼.’

생각과 현실의 괴리였다.

어떤 생각을 해도 김지훈 자신의 관념일 뿐이었다. 부딪쳐 보기 전에는 모찬우와 한수영의 생각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네 명의 써전을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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