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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50화 (1,250/1,329)

16화

김진호 원장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절대 회장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돈으로 치료받을 아이들과 암 환자들 모두 평생 회장님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막상 서명을 하고 나니 마음이 더 편해집니다. 현금 자산은 이번 주 내로 출연하겠습니다. 아픈 아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졌으면 좋겠군요.”

돈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돈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로든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박재순 환자였다. 한 명의 환자였던 사람이 사회의 주춧돌이 될 거인으로 보였다.

허리가 절로 굽혀졌다.

무엇이 계기가 됐든 숭고한 뜻이 퇴색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회적 약자를 돕고자 하는 사람에게 갖춰야 할 예의이자 존경이었다.

“김 박사님, 예정대로 퇴원해도 됩니까?”

“내일이나 모레 중 편한 시간에 퇴원하셔도 됩니다. 경과가 무척 좋지만 당분간 무리한 활동을 피하셔야 합니다.”

“기부와 관련된 일은 뺍시다.”

박재순 환자가 웃었다.

지금까지 본 미소와 달라 보였다.

아픈 육신에서 비롯된 삶의 의지와는 또 다른 의지를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박재순 환자에게도 기부가 희망이 된 것은 아닐까?

구체적인 진행 방법과 일정은 민정호와 박현철이 상의하기로 했다. 사심 없이 일한다면 진상미와 같은 동료 한 명을 또 얻게 될 것이다.

이로써 어마어마한 자리가 끝났다.

김지훈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공증까지 마치면 곧바로 법적 효력이 발생할 것이다. 만에 하나 자식들이 소송을 걸어올 경우 박재순 환자가 아니라 병원이 소송 주체가 된다는 말이었다.

그만큼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액수가 너무 커 도리어 더욱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전문 병원 소속 몇 명이 감당할 수준의 규모가 아니었다. 신현수에게 연락해 둘째 아들의 거취를 포함해 재단 차원에서 기부금을 관리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민정호도 동의했다.

즉시 신현수에게 연락했다.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달달 떨렸다.

(뭐? 그게 정말이야? 왜 일찍 연락 안 했어?)

“안 그래도 변호사 대동했을 때 바로 연락했어야 했는데 후회하는 중이다. 기부 의사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자리로만 생각했지, 액수가 그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

재단 전체의 자금 집행을 결정하는 이사장이라고 해도 엄청난 기부 액수 앞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는지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둘째 아드님 성함이 어떻게 돼?)

“박현철이야.”

(연락처 알려 줘. 긴급 재단 회의 열어서 논의해야 할 것 같다. 야! 자금 융통이 힘들어서 걱정이었는데 지훈이 네가 복덩이다. 복덩이.)

“우리 병원 환자 치료와 종합 병원 건립에만 사용해야 한다는 거 잊지 마. 소아 병동이든 암 센터든 원래 계획에 있었으니까, 기부금으로 전액 충당할 생각도 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 아들을 관리 직책으로 삼아 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는데, 그런 짓을 하면 기부하신 분이 가만히 있겠어. 이런 기회 놓치면 이사장 자리 내놓아야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박재순 회장님과 자리 빨리 만들어 줘. 감사 인사도 해야 하고, 박현철 씨 거취 문제도 상의해야겠다.)

“벌써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원한다면 이사장 자리도 주어야 할 상황인데 이사 자리 하나 못 만들겠어? 그 정도로도 부족하지만 우리 역시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지. 상황 진척되는 대로 연락 줘.)

목소리가 꽤 컸다.

민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재단 이사 중 한 명으로 기부금의 운용과 사용을 관리하는 방안이 가장 아이디얼합니다. 어차피 연락할 일이 많아질 텐데 회장님과의 소통도 원활해질 테고요.”

“생각해 보니 그게 제일 좋겠네요.”

“목소리가 많이 떨리십니다.”

“사돈 남 말 하네. 지금도 믿겨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원장님, 원장님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세요?”

“삼백억! 이게 무슨 일이냐?”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얼이 빠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정보통 손일석이었다.

기부금 액수를 듣고는 한참 동안 눈만 멀뚱거리며 입조차 열지 못했다. 무슨 생각인지 손가락을 열심히 놀리다 말고 헉헉 가쁜 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몇 년 치 월급이야? 한 푼도 안 쓰고 모아도 삼백 년이 훌쩍 넘네. 삼백 년이. 아무리 물려줄 마음이 없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돈을 기부할 생각을 할 수 있지?”

“나도 궁금해.”

“정말 대단한 분이네. 지금쯤 자식들 모두 난리가 났겠지? 아버지가 호랑이인 줄도 모르고 덤볐으니 자업자득이다. 호랑이가 개를 낳을 수도 있구나. 회진 돌 때 마지막까지 조심해. 잘못하면 멱살 잡히겠다.”

“그러고도 남을 것 같긴 해.”

“그렇다고 양아치 대하는 것처럼 힘쓰지 말고. 야! 그 나이대 노인네치고 체격이 상당히 좋으시던데 키다리 아저씨가 따로 없네. 삼백억 뿌리는 키다리 아저씨! 멋지다. 멋져.”

정신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이번 주 내로 기부금이 들어온다.

희귀 질환으로 수술을 기다리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알려 준비하게 해야 했다. 더불어 가장 관련이 깊은 정훈철에게 연락할 필요가 있었다.

“훈철이 형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뉴스에 크게 나와야 한다는 말 잊지 마. 뜻이 어마어마한 만큼 더 널리 알려야 하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야.”

“당연하지.”

“일전에 주식으로 오백억 정도 기부했다는 기사 보고 세상에 저런 사람도 있구나 했는데, 눈앞에서 볼 줄은 몰랐어. 야! 정말 말이 안 나오네.”

‘지금 네가 제일 말이 많아.’

“아직도 얼떨떨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민 부원장님, 행정적인 일 철저히 준비해 주세요. 원장님, 우리도 대비해야 할 일이…….”

김지훈이 말을 하다 말고 돌연 눈가를 찌푸리며 이마를 톡톡 쳤다. 기부금 용처를 떠올리는 순간 자연스럽게 당장 해야 할 일이 뇌리를 스쳤다.

‘소아 수술이 늘어나는 건 좋은데 우리가 뒷받침할 수 있나? 혁원이가 다시 참여한다고 해도 진우와 둘만으로는 불가능해. 강은미 선생뿐인 소아과는 또 어떻게 하지?’

새롭게 해야 할 일이 보였다.

소아 외과 및 소아과 인력 충원이었다.

게다가 간 이식 분야 교수 임용을 앞두고 있는 이혁원에게 많은 짐을 안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당분간 김지훈도 적극적으로 소아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일복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야 했다. 운명이라면 이번만큼은 분명 달콤한 운명이었다.

카르페 디엠!

***

다음 날.

박재순 환자가 퇴원을 원했다.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평소와 똑같은 태도로 회진을 돌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리를 치고도 남을 자식들이 입을 꿰매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퇴원 후 주의 사항과 향후 치료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박재순 환자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은연중 자식들과의 불편한 관계를 의식했던 지난날의 얼굴이 아니었다.

“일전에 수술한 아기는 건강합니까?”

“벌써 퇴원했고, 곧 외래 진료를 받을 겁니다. 다른 기형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건강하게 잘 자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왜 그러시죠?”

“김 박사님만이 아니라 그 아이도 내 결심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안타까웠지만 건강한 모습을 봤을 때는 내 아이처럼 흐뭇하기도 했고요. 해서 혹시 아이 부모님이 양해한다면 뒤늦게라도 치료비 전액을 부담했으면 합니다.”

김지훈이 모처럼 자식들이 있는 앞에서 기분 좋게 웃었다. 박재순의 환자가 기부를 결심하게 된 동기가 상속 문제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분들도 크게 기뻐할 겁니다. 저 역시 환자분 뜻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허허! 잘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삼백억을 기부했는데 충분하다니!

그럴 리 없었다.

보답하는 길은 더욱더 환자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건강에 일조하는 길뿐이었다. 돈 싸움밖에 모르던 자식들이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패륜에 가까운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가 오히려 허탈함을 불렀는지도 몰랐다.

아니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남은 재산마저 기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분명했다. 애초 아버지 생각을 따랐다면 세금을 내고도 최소 수십억씩 물려받았을 테니 말이다.

삼백억만 따져도 그렇다.

‘그 많은 돈을 기부하고도 남는 재산이 상당한 모양이네. 사람 욕심 끝이 없다더니 스스로 복을 걷어찼구나.’

이제라도 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찾기를 바랐다. 백 원짜리 고스톱 치다 공연히 사달 나는 것이 아니었다. 또다시 욕심을 부린다면 복을 찬 정도가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점심 무렵 박재순 환자가 퇴원했다.

수술 중인 김지훈 대신 김진호 원장과 민정호가 병원 밖까지 나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다음 외래 진료 때 역시 환자이자 귀빈으로 대우받을 것이다.

박재순 환자는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아버지가 기부를 결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박현철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는 부원장과 재단 이사로 만날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 말이다.

예정된 수술을 모두 마친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 분위기가 싱숭생숭 심상치 않았다. 전액 종합 병원 건립과 운영에 쓰일 엄청난 액수가 기부됐다. 직원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고 남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참 빨리도 알았네.’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다. 하오문주가 안 이상 비밀이 지켜질 리 없었고, 굳이 지켜야 할 일도 아니긴 했다.

의료진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빡빡했던 살림 어느 한구석에 여유가 생기면 덩달아 다른 일에도 덕이 되기 마련이었다. 기부자의 신원과 기부액이 하루 종일 화제가 돼 오르내렸지만 그보다 용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비용 문제가 해결된 소아 희귀 질환은 언제 변동이 생길지 몰랐다. 당장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혁원, 송진우, 강은미와 소아 수술 관련 의료진 모두 김지훈을 볼 때마다 무엇인가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김지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서명까지 마쳤지만 통장에 돈이 찍힌 것은 아니었다. 약속한 기부가 실제로 실행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렸다.

‘설레발치다 무산되면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큰일일수록 조용히 차근차근 밟아 나가야 잘 풀리는 법이다.’

침착해야 한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것처럼 진행됐다. 병원 측의 의지가 아니라 박재순 환자의 의지였다. 물론 실무를 맡은 민정호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부원장님, 기부금 관리 계좌를 만들고 연락하자마자 첫 번째 기부금이 들어왔습니다.”

약정 후 불과 사흘 만이었다.

“벌써요?”

“평소 재산을 여러 형태로 분산 관리하셨는지 삼십억입니다. 액수가 너무 커 오히려 실감이 안 났는데 이제야 실감이 납니다.”

“후우! 난 아직도 믿기지 않네요.”

“이사장님께도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요?”

“박현철 씨를 기부금 관리를 위한 이사로 선출했답니다. 박재순 회장님과의 소통은 물론 우리 병원 소속 상근 이사기 때문에 급여 지불에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기부 대신 요구한 사안이지만 유일한 혜택이었다. 기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고, 단 한 명이기에 분란이 초래될 여지가 없었다.

“잘됐네요.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정식으로 기부 약정식을 열 생각이신 모양입니다. 장소는 우리 병원이고, 재단 관계자분들까지 모두 참석할 예정이랍니다.”

“이런 일은 세상 전체에 알려야 하지만, 달랑 변호사 한 명 대동하신 분인데 박재순 회장님이 동의하실까요?”

“어떻게든 모셔야 합니다. 정훈철 형님에게도 장소와 일자가 통보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박한 행사도 나쁘지 않지만 이번 일은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국 취재까지 있을 정도로 거창한 행사가 되겠지만 정치적 야심 등으로 얼굴 알리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기에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좋았다.

물론 기부를 하는 모든 사람의 행동은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일 세상에 널리 알리지 않으면 소문낼 일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참! 특별히 부탁하신 일이니까 신생아 가족에게 신경 써야 합니다.”

“이미 조치를 취했습니다.”

“벌써요?”

“연락처가 있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전액 무료로 처리했고, 전화한 김에 가족 전체를 정식 약정식에 초대했습니다. 박현철 씨에게도 말씀드려 협의했습니다. 회장님과 사진 한 장 찍으면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민정호만 믿으면 되는 일이었다.

‘돈에 관한 한 누구보다 정직한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힘이 되네.’

사실 기부금 관리에 일일이 관여할 위치가 아니었고, 관여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의료진이 할 일이었다.

신뢰 가득한 눈으로 민정호를 보던 김지훈이 새로운 고민에 눈가를 찡그렸다. 행정 부분의 일 처리 속도를 의료진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기부가 실제로 진행된 이상 당장 수술 건수를 늘릴 수 있건만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소아 외과 보강이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하루가 당겨지면 한 아이를 더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대처 방안을 고민하던 김지훈이 부리나케 손일석과 이경석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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