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49화 (1,249/1,329)

15화

박재순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문성 변호사가 서류를 꺼내며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낡은 서류 가방이 왠지 고객과 변호사의 오랜 친분 관계를 말하는 것 같았다.

“현재 박재순 회장님의 자문 변호사를 맡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모두 회장님의 의견을 따른 것이며, 법적 구속력이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죄송하지만 대화 내용을 모두 녹음해도 될까요?”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자문 변호사까지 있는 회장님? 우리가 생각했던 재력가 수준이 아닌가? 그런데 왜 녹음을 하지?’

약정을 하면 끝나는 일이었고,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만에 하나 마음이 바뀌었을 경우 오히려 박재순 환자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었다. 아마도 못을 박아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식들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일까?’

유불리를 따질 일이 아니었지만 병원 입장에서 불리할 일이 없는 제안임은 분명했다.

“녹음 내용이 관계자분 이외에 외부로 흘러 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재차 양해를 구했다.

많은 정보를 주고받은 모양이었다.

김진호 원장이 있었지만 마치 협의 상대자가 김지훈인 것처럼 눈길을 주었다. 어느 조직이든 상하와 책임 범위가 있는 법이었다. 병원 행정의 최종 책임자가 김진호 원장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김지훈이 김진호 원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원장님, 진행하시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치 드라마에서 보듯 책상 위에 녹음기를 올려놓고 녹음을 시작했다. 가뜩이나 진지했던 분위기에 엄숙함까지 더해졌다.

“먼저 회장님의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부 총액의 각 30퍼센트를 소아 희귀 질환 치료 및 소아 전문 병동과 노인 전문 병동 건립에 사용되길 바라고 계십니다. 나머지 40퍼센트는 암 센터 건립과 연구에 유용하게 쓰였으면 하십니다.”

확실한 기부 의사였다.

이런 일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기부금 사용처가 오히려 김지훈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자식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놀라거나 기뻐할 틈이 없었다.

내용이 너무 거창했다.

소아 치료 시 드는 비용은 일회성에 가깝기 때문에 예산 내에서 쪼개 사용하면 된다. 액수에 따라 대상을 늘리거나 줄여 사용하면 된다.

반면 병동 및 암 센터 건립은 웬만한 액수로 거론하기 힘든 사업이었다. 각 건물 안에 설치해야 하는 장비와 시설의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었다.

‘건물만 세 개를 짓고 싶다는 말씀인데 도대체 얼마나 기부하신다는 말이지? 혹시 단순히 뼈대만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시나? 아니면 건립 비용의 일부를 충당하고 싶다는 말인가?’

민정호와 농담처럼 세 자릿수의 억대 기부금을 언급했지만 바라지도 못할 일이었다. 통상 이뤄지는 기부를 고려할 때 도리어 박재순 환자의 뜻이 애매모호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변호사까지 대동했다. 회사 임원의 얼굴조차 못 보았지만 회장이라고 불렸다.

상황도 딱 맞아떨어졌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 종합 병원 건립 현장을 못 보았을 리 없었다. 관심이 있었다면 어떤 건물이 지어지는지 조감도 정도는 확인했을 것이다.

더욱이 암 센터 건립만이 아니라 연구까지 언급했다. 대학 병원급에 필요한 시설과 장비는 물론 인력까지 모두 고려했다는 말이었다.

결국 생각 이상이란 의미였다.

김진호 원장은 말할 것도 없었고, 누구보다 상황 파악이 빠른 민정호마저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지 모를 기부 제안에 입을 열지 못했다.

김지훈의 입이 절로 열렸다.

“소아 치료만 도와주셔도 감사한 상황인데 병동 건립까지 말씀하시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 사업이 가능하려면 상당한 재정이 필요합니다. 혹시 기부 금액을 소액이라도 각 부분으로 나누길 원하시는 겁니까?”

박재순 환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종합 병원 건립 때 어떤 병동을 짓는지 조감도만 보고 내 바람을 추가했습니다. 병원 건물 하나 짓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모자란다고 해도 소아와 노인을 위한 전문 병동을 제대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한 변호사, 계속하지.”

“예, 회장님. 그럼 기부 총액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식과 부동산이 일부분 포함돼 있기 때문에 처분 시점에 따라 최종 액수가 다소 달라질 수 있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점입가경이었다.

부동산이나 주식 부자가 기부를 할 경우 대부분 현금화하지 않는다. 일정 규모 이상이라면 재단 등을 설립하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금 기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부로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 규모가 너무 컸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의 현금을 쥔 부자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모두 현금으로 기부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주식이나 임대가 가능한 부동산은 의외로 손이 많이 갑니다. 기부금을 관리해야 하는 인원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는 회장님의 뜻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계속 벌어졌다.

기대일지도 모를 흥분이 다가왔다.

두근두근!

왠지 심장까지 벌렁거렸다.

변호사의 입만 바라보았다.

“회장님, 최종 결정입니다. 지금 번복하시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확정된 후에 취소하시면 명예가 훼손되실 겁니다. 법적인 문제까지 걸릴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기부를 해도, 취소해도 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니 칠십이 넘도록 헛살았어. 자식 놈들보다 김 박사와 얼굴 붉히는 것이 천 번 만 번 낫겠지.’

“진행하시게.”

둘째 아들에게도 확인했다.

“박 부장님, 회장님께서 만일을 대비해 유일하게 후견인으로 지정하신 분입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문성 변호사가 헛기침을 했다.

살짝 손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돈을 기부하는 것도 아니고, 법적 자문과 처리를 할 뿐인데도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도대체 얼마를 기부하기에!’

“기부 액수는…….”

꿀꺽!

“현재 기준으로 삼백억입니다.”

김지훈이 눈만 껌뻑였다.

김진호 원장은 아예 멍한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백억대 이상의 기부금을 운운했던 민정호마저 당혹스러운 표정을 내보였다.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삼백억이라고 하셨습니까?”

“정확한 금액입니다. 기부금 운용과 결과에 따라 추가 기부까지 고려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일억도, 십억도, 백억도 아니었다.

물경 삼백억이었다.

천문학적 금액이라는 생각만 날 뿐 얼마나 많은 돈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현금으로 기부한다니, 박재순 환자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다.

기부도 기부 나름이었다.

이건 감당할 수 없는 부담에 가까웠다.

김지훈이 마음을 진정시켰다.

웬만한 부자는 생각지도 못할 자문 변호사를 고용한 사람이었다. 현금화시킬 수 있는 삼백억을 재산 일부라고 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모은 재력가가 허술하게 일 처리를 할 가능성은 없었다.

분명 조건이 있을 것이다.

박재순 환자의 눈빛이 변했다.

김지훈의 짐작이 맞았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번 기부는 전문 병원과 지금 건립하고 있는 종합 병원에 국한된 일입니다. 재단 산하 병원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혼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기부금이 정확하게 집행되고 있는지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 박사님을 믿지만 별개의 문제고요.”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지금으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혹시 미리 생각해 두신 방안이라도 있으십니까?”

둘째 아들이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다시 생각하셔야 합니다. 형제들 모두 오해할 것이 빤합니다.”

“어떤 위치를 갖는지에 따라 달라질 문제야. 원장님, 김 박사님, 우리 둘째를 병원 식구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비록 부장에 머물게 했지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평생 우리 회사에서 일하며 자금 관리를 맡아 왔으니 문제없을 겁니다.”

박재순 환자가 가장 믿는 둘째 아들이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생소한 사람이었다. 갑자기 병원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고민할 여지가 있을까?

엄청난 액수기에 원뜻과 달리 여기저기 새는 구석이 많을 것이다. 누군가 횡령이라도 하면 그 이상으로 큰일이 없을 것이다.

책임감을 갖고 완벽하게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더구나 기부자와 가장 긴밀한 소통이 가능한 데다 자금 관리 능력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였다.

김지훈이 김진호 원장과 민정호의 의향을 물었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기부 자체를 막을 요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희가 요청드려야 할 일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진행할까요? 한 변호사.”

한문성 변호사가 서류를 꺼냈다.

도장만 찍으면 기부가 성사되기 직전이었다.

그때 민정호가 입을 열었다.

“지금은 회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회장님, 삼백억이라는 돈은 저로서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하지만 운용에 따라 지속적인 후원을 하고도 남을 액수란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종잣돈이 될 수 있는 액수죠.”

“그렇다면 재단을 만드시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 않습니까? 보다 확실하게 회계 감사를 할 여건이 되고, 둘째 아드님 역시 병원 직원으로 근무할 필요 자체가 없고요.”

박재순 환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안전하지만 가장 수익이 낮은 은행 예금도 연간 수억 원대의 수익을 바라볼 수 있다. 만일 주식과 부동산을 처분하지 않고 제대로 운용한다면 그 이상의 수입 창출도 충분히 가능했다.

재단 설립의 이점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기부자 본인이 직접 관리할 수 있어 지출 내역이 보다 투명해질 것이다. 사안에 따라 빠르게 대응할 수 있고, 무엇보다 삼백억이란 돈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될 수 있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큰 존경과 명예까지 움켜잡을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공익을 위해 설립된 재단의 이사장이란 자리였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재단 설립을 통한 기부는 막대한 세금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기부하고, 친인척으로 재단 임원진을 구성하면 증여나 상속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증여나 상속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김지훈이 슬며시 눈길을 주었다.

박재순 환자의 표정이 어두웠다.

변호사까지 대동한 마당이었다.

재단 설립의 장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누구보다 문제점 또한 가장 잘 알 것이다. 결국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었다.

자식이다.

지금도 상속 문제로 형용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재단을 만들면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제각각 한자리 차지하려 아우성을 칠 테고, 본래의 의미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결국 탐욕과 욕망만이 남을 것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는 듯 박재순 환자가 만년필을 받아 들었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진행합시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반드시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함부로 물었다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일지도 몰랐다. 기부는 오로지 돈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회장님, 지금 이 순간 행복하십니까?”

일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강요한 기부가 아니었다.

스스로 막대한 액수의 기부를 결정한 칠십삼 세 노인에게 무례한 질문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박재순 환자의 자식들이 어떤 사람인지 피부로 느낀 김지훈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돌연 박재순 환자가 크게 웃었다.

“묻지 않았으면 실망할 뻔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남은 인생이 행복해질 것이란 확신이 들어요. 잘 치료받아 건강해진 아이들 얼굴을 빨리 보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부탁합니다. 믿습니다.”

만년필촉이 반짝였다.

양측 모두 정식 약정서에 서명했다.

김지훈이 훅훅 숨을 내뱉었다.

실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무려 삼백억이었다.

얼마나 많은 아이와 환자들이 혜택을 볼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경제적인 문제로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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