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은퇴라는 단어였다.
이준영 교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존경하며 많은 영향을 받은 교수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송재덕 교수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대장 하자. 대장.’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이경석이 뒤를 이은 후에도 툭하면 같은 말을 반복하며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의사로서의 자세와 능력을 이준영 교수에게 배웠다면 송재덕 교수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해 배웠다.
‘정년퇴직이 언제시지?’
이 년 정도 남았다.
어렸을 때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계절이 몇 번 바뀐다 싶으면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최근 들어 정년이 연장되는 추세긴 하지만 그 안에 바뀔 분위기도 아니었다. 물론 병원에 공헌한 바가 크면 일종의 혜택이 있긴 했다. 은퇴한 후, 일주일에 이삼 일 정도 병원에 근무하며 체력이 허락하는 선에서 진료 업무를 볼 것이다.
그나마 최대 삼 년 정도였다.
‘송재덕 선생님은 분명 초빙 대상이 되니까 오 년을 더 계실 수 있다는 말이지만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지.’
송재덕 교수 다음은 누굴까?
이준영 교수에 이어 이혁민 교수와 신기동 교수가 차례로 현직을 떠날 것이다. 능력 있는 후배들을 양성해 탄탄한 일반외과를 만들었지만 아직도 배울 것이 많았다.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었다.
‘스승님 은퇴를 생각하니까 정말 울적해지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민정호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닙니다.”
김지훈이 애써 웃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 흐르는 세월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스승님들을 모시는 것만이 답이었다. 솔직히 은퇴한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금은 좋은 일만 생각할 때였다.
할 일이 무지하게 남아 있었다.
***
학회 일로 모두들 정신없이 움직였다.
초빙할 인사들과의 통화 때문에 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였다. 거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바쁜 일과로 인해 한 번에 연결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거의 동일한 업무를 가진 지역 대표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선생님, 부산과 경남 지역 잘 부탁드립니다. 초청장 곧 발송할 예정이고, 학회 일정표와 자료집도 완성 직전입니다. 혹시 논문 발표할 순서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도록 잘 얘기해 주십시오.”
(걱정하지 마세요.)
부산 지역 대표이자 부학회장인 유철호 교수는 최대 후원자나 다름없었다.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H 병원의 경기복 과장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성향이 어떻든 간 이식 분야의 주요 인사임은 분명해. 함께 가기 위해 자존심 따위는 버려야 한다.’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하나둘 일정대로 착착 정리됐다. 특히 학회 운영 경험이 풍부한 이준영 교수가 조언을 아끼지 않아 더욱 순조로운 진행을 보였다.
“기존 학회 진행 매뉴얼이다. 참조해.”
“선생님도 한 말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사말은 학회장 한 명으로 족해. 초빙하는 선생님들의 축사까지 있는 상황인데 나까지 시간을 뺏을 수는 없어. 공여자 파트 논문 발표면 된다.”
김지훈이 콧등만 찡그렸다.
형식적 명예와는 담을 쌓은 스승이었다.
외부 행사에도 적극적이었던 큰 스승님과는 확실히 성향 자체가 달랐다. 누가 옳다 그르다 할 수 없는 문제인 탓에 가끔은 설명하기 힘든 아쉬움도 있었다.
‘대가라는 말에 욕심은 있으신 건가? 다들 듣고 싶어 하는 말이자 오르고 싶은 경지인데, 대가라는 소리에 관심이나 있으신 건가?’
모르긴 몰라도 의학에 관한 한 이준영 교수가 갖고 있는 유일한 욕심일 것이다. 젊은 의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열정과 끊임없는 연구가 이를 직접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더불어 자신을 혹독하게 가르쳤고, 드러내 말하지 않지만 이혁원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나도 스승님처럼 살고 싶은데…….’
어쨌든 김지훈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어떤 일이 됐든 나이 먹었다고 봐줄 스승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준영 교수에게 크게 한 소리 듣고도 남았다.
‘스승님 눈치를 보며 일하면 안 되는데 그게 잘 안 되네. 아직도 스승님 눈에 들고 싶어 하는 걸까? 솔직히 칭찬받으면 좋지.’
정신없이 일하던 사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환자들이 모두 퇴원했다. 온전한 건강을 되찾으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테지만 웃으며 병원을 나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간 이식 환자들이 있었지만 주력하는 분야기에 평생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여러모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박재순 환자만 남았다.
회복에 어떤 문제도 없었다.
식사는 물론 각종 검사 모두 양호한 결과를 보였다. 곧 퇴원이 가능해 기부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보호자들이 병실에 진을 쳤다.
때때로 고성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아버지! 자식들 놔두고 엉뚱한 곳에 돈을 기부한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우린 못 먹고, 못살아도 상관없어요? 손주들을 생각해 보세요. 불쌍하지도 않아요?”
“둘째 형, 도대체 우리 몰래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이러면 우리도 못 참아. 물려받을 돈이 일인당 얼마인 줄이나 알아? 평생 뼈 빠지게 일해도 못 만질 돈이야.”
“아빠, 남은 여생 편하게 사실 돈만 있으면 되잖아요. 말년에 왜 이런 일을 벌여서 분란을 만드시는 거예요? 앞으로 누가 둘째 오빠하고 상종을 하겠어요? 아빠한테도 원망밖에 더 남겠어요?”
상속 문제로 형제도 아닌 부모와 얼굴을 붉히는 일 자체가 창피한 일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도 아닌 병원에서조차 목소리를 높이다니 도저히 가족이라 할 수 없었다.
‘저런 얘기는 퇴원 후에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환자분도 왜 굳이 병원에서 말씀을 하셨을까?’
보호자들이 이성마저 잃었다.
불똥이 김지훈에게도 튀었다.
최악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선생님, 의사는 의사 일에만 충실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환자 돈에 신경 쓰지 말고 치료에만 집중하세요.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무슨 말입니까?”
“수술 전에는 기부에 ‘기’ 자도 꺼내지 않았던 분이 갑자기 기부라니요? 누구나 우리 집안 돈 보고 살살 꼬드겼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격분하고도 남을 말이었다.
얼마나 물려받는지 모르지만 돈에 눈이 멀어 이성까지 잃었다. 인간의 추악한 이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었고, 이해의 여지조차 없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본인 집안일에 왜 엉뚱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아버지가 치매라도 걸린 게 아니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어요.”
“치매요?”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고서는 갑자기 기부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뉴스에서나 보던 부자지간의 소송이 떠올랐다.
정신 멀쩡한 상태에서 결정을 했다는 부모와 치매 때문에 제대로 판단할 능력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자식들이 벌이는 진흙탕 싸움 말이다.
‘이러다 법정까지 갈 기세네.’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었다.
욕이란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왔지만 말을 나눠 봐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었다. 애초에 기부는 없는 돈과 마찬가지기에 언제든 포기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런 인간들에게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자업자득이란 말이 있습니다. 환자분이 기부를 고민하시는 이유가 본인들에게 있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이럴 시간에 진심으로 아버님 건강부터 챙기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눈빛까지 이상해졌다.
인간 망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싸우러 오셨습니까?”
“왜, 어디 찔리는 데라도 있어요?”
“앞으로 환자분을 면회하고 싶으시면 예의를 갖추세요. 오늘과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병원 직권으로 면회를 제한하겠습니다.”
“말이라고 다 말인 줄 알아요? 자식이 아픈 아버지를 만나겠다는데 그럴 권리가 있어?”
“시험해 보시죠. 환자분 치료에 방해가 된다면 병원 차원에서 대처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미 충분한 근거 자료가 있고요.”
강경한 말에 보호자들이 꼬리를 내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속 결정권을 갖고 있는 아버지를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 두려울 것이다.
아니다.
부모의 재산을 무조건 자신들 것이라 여기는 자식들에게는 돈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때문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이 아버지든 형제든, 아무 관련도 없는 의사든 간에 말이다.
김지훈이 벅벅 얼굴을 문질렀다.
정말 심란한 하루였다.
손일석은 어이가 없는지 웃기만 했다.
“별 거지 같은 인간들이 다 있네. 내가 아버지라도 십 원 한 장 주고 싶지 않겠다. 호적에서 파 버리고 연을 끊는 게 속 편하겠어.”
“기부 소리를 들었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는데 별일이 다 생기네. 솔직히 자식들 때문에 찜찜하긴 했어. 둘째 아들 말고는 멀쩡한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신경 쓰지 마.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을 거야. 백 원짜리 고스톱 치다가 살인났다는 말 못 들었어? 막장 드라마라고 손가락질하면서도 끝까지 보는 이유가 뭔지 알아? 그게 다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야. 심지어 시청률까지 높잖아.”
김지훈이 쓴 입맛을 다셨다.
“환자분 상태도 괜찮은데 예정보다 빨리 퇴원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러다 병원이 아니라 싸움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개싸움 판.”
“에헤! 그건 아니지. 꼬드겼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여기서 꼬리 내리면 더 난리 칠 거야. 마지막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게 맞아. 기부를 받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복수 아니겠어?”
“우리가 무슨 복수를 해?”
“그럼 응징이라고 하자. 아버지가 패악질을 한 것도 아닌데 인륜을 무시하는 사람들이잖아. 강호의 도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 반드시 응징해야 돼. 기부 꼭 받아라. 돈에 눈멀어 부모도 모르는 놈들 다 닭 쫓던 개로 만들란 말이야. 에휴! 개가 뭔 죄일까?”
“손일석답다.”
김지훈도 피식 웃었다.
말만으로도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이제는 사정을 모두 알았을 이준영 교수는 당연히 별말 없었다. 은근슬쩍 눈치를 줘도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는다는 눈빛만 보였다.
한마디 말과 함께.
“커피 한잔하자.”
“블랙으로 하실까요?”
“캔 커피가 좋겠다.”
흔하디흔한 캔 커피였지만 지금 이 순간 역시 특별한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마음이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사 생활 중 가장 힘든 회진을 돌아야 했다. 보호자들의 싸늘한 눈초리 속에 환자를 보며 웃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박재순 환자 역시 입을 닫았다.
둘째 아들마저 형제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다들 집으로 간 후에야 나타나 아버지의 아프고 괴로운 마음을 함께 나누었다. 자기 자신 또한 엄청나게 힘들 텐데 말이다.
“내 결정이 잘못된 걸까?”
“아버지, 평생 일하며 힘들게 버신 돈입니다. 주시는 돈만 받으며 호의호식한 우리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쓸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고맙다.”
어느새 퇴원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답은 없었다.
김지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기부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부디 퇴원한 후에도 그 마음 잊지 마시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깨끗이 생각을 접으려는 순간!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자식들 모두 두 눈이 벌게진 채 아버지를 감시하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누구든 난처하고 곤란한 상황을 피하려 할 텐데 뜻밖의 연락이었다.
김진호 원장과 민정호가 함께하기를 바랐다. 속단하기 일렀지만 병원 책임자들을 모두 찾다니 확실하게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긍정적일까?
아니면 결국 자식들 등살에 못 이겨 기부를 포기하고, 사과하는 자리가 될까?
회의실을 찾은 김지훈이 목을 휘휘 돌렸다. 내심 기부를 바랐지만 분란이 얼마나 더 일어날지 몰라 심정이 복잡하기만 했다.
커피 향이 감돌았다.
박재순 환자와 둘째 아들은 미리 와 기다리는 중이었고, 김진호 원장과 민정호는 다소 긴장된 기색이었다. 그리고 한 명의 낯선 인물이 보였다.
“김지훈 부원장님이십니까?”
“맞습니다. 누구시죠?”
“변호사, 한문성입니다.”
변호사?
법적인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결국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결정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심 반기던 김지훈이 돌연 얼굴을 굳혔다.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자리였다.
변호사까지 대동한 박재순 환자의 의도를 온전히 짐작할 수도 없었다. 한편으로 액수를 떠나 단 한 푼도 허투루 쓸 수 없는 돈이기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서류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 편히 대하자.’
김지훈이 차분하게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는 박재순 환자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