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민정호였다.
“무슨 일이에요? 급하지 않으면 일단 끊읍시다. 이따 내가 연락할게요.”
(혹시 박재순 환자분 때문에 그러십니까?)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요?”
(회진 시간인데 환자가 보이지 않으면 당황하실 수밖에 없겠죠. 지금 제 옆에 계시니까 내려오시죠. 보호자에겐 말씀하지 마시고요. 환자분 요청입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재순 환자가 민정호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말아야 할 자식들이 모두 온 마당이었다. 물론 만나고 싶지 않겠지만 말이다.
‘아무리 자식들을 보고 싶지 않아도 그렇지, 피한다고 해결이 되나? 이 시간에 민 부원장은 또 왜 만나고 계시지? 알 수가 없네.’
김지훈이 대충 핑계를 대고 부리나케 행정부원장실로 향했다. 뒤통수에 따라붙는 자식들의 불평과 불만에 짜증이 나긴 했다. 말도 없이 사라진 환자를 걱정하는 말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민정호가 박재순 환자와 차를 앞에 두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환자 표정이 상당히 평온해 보였다. 그동안 아버지 못지않게 마음고생이 많았을 둘째 아들 역시 편안한 얼굴이었다.
“환자분, 회진 시간에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자리를 비우려면 미리 말씀이라도 하셨어야지, 보호자분들이 찾고 난리가 아니에요.”
“그렇게 됐습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괜찮습니다. 일단 앉으시죠.”
명색이 의사와 환자 관계인데 어째 주객이 전도된 분위기였다. 민정호마저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내오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민 부원장님을 찾으신 겁니까? 설마 병원비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알아볼 일이 있고, 박사님과 상의할 일도 있어서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어차피 회진에 드는 시간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박재순 환자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나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둘째 아들을 바라보는 눈길에 미안함과 착잡함이 담겨 있었다.
“희귀 질환을 앓는 아이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좋은 일을 하시는데 어려운 점은 없으십니까?”
상당히 빠른 회복을 보인다고 해도 아직은 제 코가 석 자인 환자였다. 자신의 건강에 모든 힘을 다해도 모자랄 텐데 난데없이 아픈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환자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는 순간 무언가 강렬한 감이 왔다.
‘설마?’
추측으로 대처할 일이 아니었다.
단순히 관심을 충족시키는 일에 불과하다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야 할 상황도 아니었다.
“말씀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먼저 이유를 알아야겠습니다. 우리 과 전체가 관련된 일이 밀려 시간이 빠듯하기도 하고요.”
“민 부원장님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솔직하게 말하죠. 눈치채셨겠지만 운이 좋아 제법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 때문에 말년에 못 볼 꼴을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어느 집이나 걱정거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돈이 너무 없어도 걱정이고, 너무 많아도 걱정이긴 하죠. 어쨌든 이번에 수술을 받으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돈이란 것이 사람을 살릴 수도, 망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망치는 길로 간다면 필요한 돈 이상을 손에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군요. 특히 자식이 그런 길로 빠진다면 아비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재순 환자가 둘째 아들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건만 자신의 기대에 부응한 자식은 단 한 명뿐이었다.
거창한 것을 바란 적이 없었다.
자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기만을 원했다. 무덤까지 가져갈 수 있는 돈이 아니기에 여느 부모처럼 골고루 나눠 줄 생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건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떴다.
자신도 나이가 들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자 자식들의 관심은 온통 돈에만 집중됐다. 평생 부모 곁을 지킨 둘째 아들은 어느새 형제가 아니라 남이 돼 버렸다. 조금 더 물려주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말이다.
‘후우! 공평하게 나눈다 한들 불만이 없을까? 큰 놈은 큰 놈대로 제 몫을 더 챙기려 하겠지. 아비의 돈이 자식들의 앞길을 망칠 것이 빤하다면 차라리 물려주지 않는 것이 낫다.’
아픈 손가락은 단 하나만이 남았다.
둘째 아들은 아비의 재산에 눈독 한번 들인 적이 없었다. 형제들에게 남보다 못한 눈총을 받으면서도 내색하지 않았고, 도리어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고자 하는 아비의 결정을 바꾸려 애썼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상의하는 내내 둘째의 걱정은 돈이 아니라 아비의 남은 날이었다.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았기에 오직 아버지의 행복만을 바란다고 했다.
‘차라리 똑같이 욕심을 부렸다면 내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아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때문인지 마음이 오락가락했지만 시간을 끌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 빤했다. 결정적으로 오늘 아침 상속 문제를 논의하자는 자식들의 연락을 받았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모르지만 퇴원을 하지도 않은 아비에게 할 말이 절대 아니었다.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박재순 환자가 김지훈을 보았다.
“무엇보다 박사님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힘들기만 한 생활인데 무엇이 한 의사를 이토록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제 직업입니다.”
“천직이라고 해도 힘든 건 힘든 겁니다. 단지 월급을 많이 받기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겠죠. 아마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쓰면서 얻는 기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정 부분 맞는 말이었다.
반면 부족하지 않은 돈과 보람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일터야말로 모든 사람이 바라는 직장일 것이다. 김지훈은 운 좋게 두 가지를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가진 능력이 무엇일까요? 불행히도 사람이 아닌 돈이더군요. 해서 내가 가진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기부가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 병원에 기부를 하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늙은이가 아파도 이렇게 서러운데 이제 꽃도 피지 못한 아이나 아이 부모는 오죽하겠습니까? 적어도 돈 걱정 없이 치료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누구나 두 팔 벌려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김지훈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기부는 분명 선행이다.
재력가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아무리 밉다 한들 자식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친다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었다. 더구나 수술 전에는 기부를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성급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하나 더 있었다.
도중에 마음이 변했을 경우였다.
지금도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부 액수에 따라서 많은 아이들이 혜택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섣불리 진행했다 무산된다면 희망을 가졌던 누군가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었다.
‘단순히 돈만 걸린 문제라면 바로 대답해도 되겠지만, 어떤 치료든 간에 한 생명과 한 가족의 삶이 달린 일이다. 환자분의 결심이 확고해야만 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박재순 환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병원이나 김지훈에겐 손해 될 일이 단 하나도 없는 일이었다. 제안만으로도 덥석 반응하며 어떻게든 성사시키려 애를 써야 할 상황이었다.
이미 상속 문제로 싸움이 났다는 사실 정도는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김지훈이었다. 게다가 기부를 유치했다는 사실 자체가 개인적인 성과일 수도 있어 욕심을 내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일 것이다.
반응이 이상할 정도로 미적지근했다.
“왜 그러십니까?”
“환자분, 정말 감사한 말씀입니다. 당장이라도 구체적인 약속을 주고받았으면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습니다. 걱정이라기보단 타인을 위한 기부이기 이전에 환자분을 위한 기부이기를 바랍니다.”
“날 위한 기부요?”
“액수를 떠나 평생 고생하시며 모은 재산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가치 있게 사용하셨으면 합니다. 외람되지만 혹시 가족 간의 일 때문에 기부를 결심하셨다면 다시 한번 고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순 환자가 눈가를 굳혔다.
“후회할 것 같습니까? 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줘도 후회할 것이 빤한데 무얼 주저하겠습니까? 자식들이 밉기도 하지만 앞날을 더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린 결정입니다.”
“만에 하나 기부를 하신 후 후회하게 된다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요? 무엇보다 건강하게 된 아이와 가족을 보며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환자분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야 김지훈이 주저한 이유가 가슴에 와닿았다. 분명 남에게 베푸는 행위 자체만을 기부의 본질로 생각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자식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앞섰는지도 몰랐다.
‘날 가장 잘 아는 자식도 똑같이 생각할까?’
둘째 아들을 보며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박사님 말씀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전 아버지 마음이 편안하기만을 바랍니다. 기부를 하신 후에 정말 행복한 웃음을 보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네게도 단 한 푼 안 줄 수 있어.”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그동안 제게 해 주신 것과 지금 가지고 있는 돈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형제들과 싸우면서까지 아버지 돈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단호했다.
세상에 돈 욕심 없는 사람 없다지만 분명 물려받을 재산보다 아버지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유일하게 마음 편한 자식일지도 몰랐다.
박재순 환자가 돌연 웃었다.
“허허허! 이런 대답을 들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평생 살아오며 박사님 같은 사람도 처음 보고요. 알겠습니다. 한 번 더 고민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는 내 뜻대로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주시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물읍시다. 혹시 기부 액수가 생각 외로 크면 어디에 사용하셨으면 합니까?”
김지훈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필요한 곳이야 정말 많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기부하는 사람의 의사였다. 어떤 의도와 취지인지에 따라 사용처가 달라질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우리 마음대로 사용처를 결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부하시는 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뜻이라!”
박재순 환자가 왠지 즐거워 보였다.
처음 기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와 지금 표정이 확실히 달랐다. 자신의 의사를 존중하다 못해 기부의 의미까지 다시 생각하게 해 준 덕일 것이다.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자리가 끝났다.
민정호가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부원장님이 성급하셨던 거 아닙니까?”
“내가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 말에 따라 일억이 이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정이 어찌 됐든 어렵게 기부를 결정했을 텐데, 이왕이면 기부하는 사람을 어느 정도 띄워 줘야 좋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기부한다는 말에 기뻐한 사람이 나였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잖아요. 기부자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뜻을 살리는 길 아닐까요?”
“동의합니다만…….”
긍정적으로 마무리됐지만 다시 한번 고민할 시간이 문제였다. 자신에게 쓰는 돈은 얼마가 되든 아깝지 않겠지만 타인에게 쓰는 돈은 아까운 법이었다. 하지만 이유 여하를 떠나 선한 의지를 보았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즐거운 상상이 뒤따랐다.
“만일 기부가 결정되면 어떤 식으로 사용해야 할까요? 한 명이라도 더 치료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환자분 태도로 봐서 억 단위는 될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액수에 따라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한 자릿수라면 몇몇 아이들 치료에 사용하고 끝이 나겠죠.”
“그렇다고 의미가 퇴색되는 건 아니죠.”
“맞습니다. 만일 두 자릿수라면 뜻을 같이하는 후원자들을 모아 일종의 기금을 조성하는 방식을 택해도 될 겁니다. 보다 장기간에 걸친 사업이 가능할 겁니다.”
김지훈이 웃었다.
“야! 기금이라니 생각만 해도 좋네요.”
“세 자릿수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설마!”
“여섯이나 되는 자식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싸우는 집안입니다. 상속해야 할 재산이 상당하다는 말입니다.”
“그럴듯하네요. 만일 세 자릿수라면?”
“재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은퇴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사업이 가능하다는 말이죠. 기념관을 만들면 더 좋겠죠?”
“기부받은 돈으로 건물을 세운다고요?”
“그럴 수는 없죠. 어차피 소아 병동을 지어야 하는데 박재순이라는 이름을 붙여 뜻을 기리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가 아닐까요?”
상상의 나래가 마구 펼쳐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히죽히죽 웃던 김지훈이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바쁜 일상에 잊고 있었던 단어 하나가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