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새날이 밝았다.
김지훈이 어깨를 활짝 폈다.
‘항상 오늘만 같아라!’
회진을 도는 내내 휘파람이라도 불 것 같은 표정이었다. 모든 환자가 바라는 대로 회복을 보였고, 바로 해결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만이 남았다.
“밥 잘 드셨죠?”
“잘 먹었습니다. 이제야 살 것 같네요. 퇴원하면 삼겹살 먹어도 되죠?”
“아버지!”
산재를 당한 환자인데 가족도 그렇고 김지훈 자신도 왜 이리 웃음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으아아앙!”
“울음소리가 우렁차네요.”
“배가 고파 우나 봐요.”
“경과가 무척 좋습니다. 차근차근 물 시작하고, 괜찮으면 바로 수유 가능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엄마도 몸조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아이 아빠가 저녁에 올 수 있어서 교대하면 돼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간마다 울며 보챌 신생아였다.
이 시기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엄마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움이 되겠지만 아빠가 온다고 편해질 리 없었다.
‘엄마가 괜히 위대한가?’
자식 키운 경험을 가져 가장 도움이 될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부부 모두 김지훈과 똑같은 처지인지도 몰랐다. 아이의 빠른 회복에 기쁘면서도 젊은 부부가 왠지 측은했다.
‘각자 다 사정이 있고, 어렵기 마련이지만 언젠가 좋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힘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박재순 환자를 찾았다.
병실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갑갑하기만 했던 코 줄을 뺀 덕인지 아침부터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바퀴 네 개 달린 보행 보조기가 아닌 수액대 하나에 의지한 채였다.
‘대단하시네. 이건 라파로의 장점이 아니라 환자분의 의지가 분명해.’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수술 잘해 주셨는데 몇 끼 굶었다고 쓰러질 내가 아닙니다.”
“대단하십니다.”
룰루랄라!
환자들이 힘을 팍팍 준 덕에 수술도 무난하게 잘 끝났다. 오후 늦게 수술실에서 나왔지만 다른 때보다 훨씬 몸이 가벼웠다.
이유가 있었다.
밀린 일 빨리 처리하라는 말이었다.
“회진 끝나고 보자.”
창립총회 준비가 남았다.
그동안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가 거의 전적으로 맡아 왔지만 이젠 머리를 맞대야 할 때였다. 미진한 부분이 있으면 창피를 당할 것이 빤했다.
학회 준비가 간단할 리 없었다.
장소와 일시는 이미 정해졌다.
컨벤션 센터 두 층을 모두 빌려 네 개의 세션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했다. 계약까지 완료됐고, 초청해야 할 의료계 인사 섭외도 상당 부분 진전이 있었다.
김지훈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의사다.
수술부터 모든 업무가 다르지 않았고, 일이 적은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평 하나 없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미안해 죽겠네.’
“고생했어.”
“고생은! 이제 시작이야. 그릇 잘 만들면 뭐 해? 세상에 소문난 명장이 만들어도 술잔에 김치 대충 담아 놓으면 그게 작품이 되겠어?”
“그렇지.”
“알면 됐어.”
손일석이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이름, 소속,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왕이면 다다익선이라고, 이분들 모두 오기 어렵겠지만 최대한 많이 모셔야 하지 않겠어? 시간 나는 대로 전화하세요.”
“헉! 이 많은 분들에게.”
“눈은 뭐 하러 뜨고 다녀? 옆에 빨갛게 별표 해 놨잖아. 학회장님이 직접 전화해서 참석을 요청해야 할 귀빈들이니까 신경 바짝 써. 센스가 다시 빵점이 되면 어떻게 해?”
무조건 무릎 꿇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찬찬히 명단을 살폈다.
‘그래도 많네.’
전화하기 벅찬 정도를 넘었지만 한 명 한 명이 정말 귀빈이었다. 각 병원의 내로라하는 간담췌 전문의와 간 이식 내과 전문의부터 마취과 전문의까지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 본 인사들이었다.
송재덕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이름은 영원한 대가이자 큰 스승님인 허경발 교수님이었다.
“부원장님은 전화만 하셔. 초청장은 따로 발송할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진행 순서와 사회를 볼 사람은 우리가 정해도 되겠지?”
누가 사회를 볼지 빤했다.
진지해야 하는 행사지만 너무 무거운 분위기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때론 가벼운 농담으로 학회 분위기를 끌어 올릴 필요가 있는 이상 김지훈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적임자는 단 한 명이었다.
“그래 주면 고맙지. 잘 부탁해.”
“센스 다시 돌아오기 시작하네. 역시 김 부원장에겐 내가 필요해. 자! 그럼 가장 중요한 일을 분담해 볼까?”
창립총회 역시 학회의 연장선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며 자리를 빛내 주겠지만 형식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양적 질적 수준을 모두 만족시켜야 했다.
진충기 교수가 두툼한 자료를 꺼냈다.
“오늘까지 접수된 논문입니다. 각 병원 모두 자존심을 걸고 작성해 수준이 높습니다만 메인이 될 논문을 추려 내야 합니다.”
“메인이요?”
“세션이 진행될 때마다 첫머리가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걸 빨리 정해야 부회장님을 비롯해 임원진과 상의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학회 전에 일정표를 배포하고, 좌장도 미리 결정해야죠.”
‘이건 더 많네.’
“언제까지 검토해야 합니까?”
“이번 주 내에 끝내야 합니다.”
“이번 주요?”
헉!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논문은 대충 읽고 추천할 수 있는 성격의 글이 아니었다. 내용에 따라 핵심을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충기 교수가 웃었다.
“많죠?”
“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데요.”
“센스가 왔다 갔다 하십니다. 맨 위부터 여덟 번째까지 첫머리 발표로 적당한 논문을 추려 놨습니다. 검토해 보시고 동의 여부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수준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둘이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다.
‘어후! 이런 농담 바람직하지 않은데 진충기 선생님도 일석이를 따라가시나?’
“그럼 나머지는?”
“첫머리가 아니라고 수준이 낮은 것은 아닙니다. 백지장 하나 차이니까 찬찬히 읽어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맞는 말이었다.
내용이 제아무리 풍성해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렇다 해도 일단 여덟 편의 논문 자체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 대신 학회가 두 어깨를 팍팍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응급실에 국한됐던 일복이 병원으로 퍼지더니, 이제는 병원 밖의 일까지 홍수처럼 밀려오는 형국이었다.
‘며칠은 잠도 제대로 못 자겠네.’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자리가 잡히지 않은 학회를 이끌어야 할 초대 학회장이란 자리가 원래 그럴 수밖에 없었고,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는 지금도 온갖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서 말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다.
간 이식 학회를 반석 위에 올려 주요 학회로 자리매김 시킨다면 그보다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노고를 알아줄 것이다.
‘가자! 이런 날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심히 하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한동안 논의를 더 이어 간 후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손일석과 함께 걸어가던 중 불현듯 다른 부분에서 발표할 논문이 떠올랐다.
“손 교수, 다른 과 논문은?”
“간 이식이라는 공통점이 있어도 전문 분야가 아닌데 그걸 우리가 어떻게 검토해? 다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처형도 아마 논문의 숲에 빠져 있을걸?”
“간호과 논문이 그렇게 많아?”
“매일 저녁마다 얼굴 보면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몰랐단 말이야?”
“자기 논문 하나 작성하고, 나머지는 강의 준비하는 줄 알았지.”
손일석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용감한 거야? 무관심한 거야? 이런 생활 태도로 용케 살아 있는 걸 보면 처형 마음이 정말 넓어. 나 같았으면 당장 칼 뽑았다.”
“에휴! 나도 나름 바빴어.”
“핑계는 내게만 대고 처형 보자마자 그냥 엎드려. 직장 다니면서 희연이 보는 일이 쉬울 것 같아? 야! 사람 죽으라는 법 없네. 저기 꽃집 아직 안 닫았다.”
후다닥!
김지훈이 순식간에 꽃집 안으로 사라졌다.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방법 어렵지 않다.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와 마음을 담은 꽃 몇 송이만 있어도 상대의 서운함을 덜어 줄 수 있다.
서로를 사랑하기에.
물론 그 전에 잘해야 한다.
노력 없이 쉬운 일 반복하며 모면하려 하다 보면 면역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때는 뭘 해도 늦을 수밖에 없고,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 있다.
‘어머! 웬 꽃이에요? 너무 예쁘다.’
‘이건 왜 또 샀어요? 그 돈 있으면 차라리 날 주지. 시들면 다 쓰레기야. 아까워 죽겠네.’
둘 중의 어느 쪽을 택할지는 자신에게 달렸다.
손일석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진 김지훈은 전자를 택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짝 엎드렸고, 대신 고경아의 행복한 웃음을 받았다.
카르페 디엠!
***
김지훈이 휴대폰을 붙들고 살았다.
틈만 나면 명단을 보며 전화를 해 학회 참석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각 지역을 담당하는 임원진과도 충분히 소통해 가며 하나하나 주어진 일을 처리해 나갔다.
(지훈아, 부원장 됐다는 소리 듣고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못해 미안하다. 학회 설립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알아. 누구도 완벽한 행사를 요구하지 않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하던 대로 하면 될 거야.)
“자주 연락 못 드려 죄송합니다.”
(내가 미안해. 한가한 사람이 바쁜 사람에게 연락하는 것이 맞아. 준영이와 지훈이가 부탁하는 자리인데 어떻게 빠지겠어? 꼭 참석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김지훈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넉넉한 큰 스승님이었다.
때문에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를 일이었다.
이마에 식은땀까지 맺혔다.
잠시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해야 할 일을 이어 나갔다. 논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감탄이 터졌고, 얼마나 많은 의료진이 피땀을 쏟고 있는지 절감했다.
동료이자 강력한 경쟁자였다.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라 정당한 경쟁을 통해 결국 함께 발전해야 할 대상이었다. 누군가는 앞서고 뒤처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 또한 자극으로 삼아야 했다.
‘바쁘다. 바빠.’
그 와중에 힘이 되는 일이 연달아 터졌다.
한덕식 환자가 퇴원했다.
“삼겹살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아버지!”
끝까지 고기 타령에 한바탕 웃음을 주고 드디어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내와 아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겹겹이 쌓인 피로를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우회술을 받은 아이가 수유를 시작했다.
그동안 먹지 못한 것을 모두 먹어 치울 셈인지 모유가 부족해 결국 분유를 먹여야 했다. 여전히 산후조리가 필요하건만 엄마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주말 지나고 퇴원해도 되겠습니다.”
“벌써요?”
“이렇게 잘 먹고 똥 잘 싸는데 병원에 있을 이유가 있나요? 소장 말고는 다 건강했으니까 외래 진료도 한두 번이면 끝날 겁니다. 미리미리 퇴원 준비해 두세요.”
기뻐서 한 말인데 순간 아이 엄마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퇴원 준비에 가장 큰 부분은 치료비 계산이었다. 30퍼센트를 경감해 줘도 병원비가 만만치 않다는 기색에 김지훈도 아차 싶었다.
말 길어져야 더 우울할 것이다.
‘후우! 난감하네.’
환자들의 사정을 모두 짊어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으로 애써 위안 삼으며 마지막 순서로 박재순 환자를 찾았다.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회복 속도를 보였다. 환자의 의지가 너무 강해 심리적 안정 때문에 고심했던 일이 무의미할 지경이었다.
‘벌써 밥을 드셔도 될 때가 되다니, 라파로의 장점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네.’
똑똑똑!
그동안 돌아가며 한 명씩 보이던 보호자들이 바글바글했다. 무슨 이유인지 환자와 둘째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누군가를 감시하며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셋째 아들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환자분 어디 가셨습니까?”
“아버지 찾아 달라고 얘기한 게 벌써 삼십 분이나 됐는데, 병원에서 환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말이 됩니까?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할 겁니까? 에이! 오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환자가 무단 외출을 했더라도 병원은 관리 책임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는 박재순 환자였다. 솔직히 짜증만 내고 있는 보호자들을 보고 있자니 갑갑하기만 했다.
‘뭘 마무리 짓는다는 거야? 어딜 가신 거지?’
찾기는 찾아야 했다.
그때 호출이 왔다.
이 와중에 또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