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순조로웠다.
반면 은근히 초조한 날들이기도 했다.
심지를 뺀 한덕식 환자가 식후 어떤 불편을 겪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심한 복통을 호소하거나 심지가 있었던 자리에 염증이 생기면 즉각적인 추가 검사가 필요했다.
이젠 병원이 갑갑하다는 듯 툭하면 바깥바람을 쐬는 모습을 보며 안도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서로를 더욱 이해하게 된 아버지와 아들이 투닥거릴 때마다 웃음을 자아냈다.
‘삼겹살 너무 좋아하시네.’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인 신생아 역시 적절한 회복을 보였다. 물조차 먹이지 못해 칭얼거리며 자다 깨기를 반복했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변을 봤다.
수술할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이렇게 약하고 여린 몸 어디에 이런 힘이 숨어 있을까? 언제 봐도 경이로워.’
아직도 얼굴이 퉁퉁 부은 엄마와 병원을 떠나지 못하는 아빠가 기저귀를 갈며 눈물을 터트렸다. 자식의 똥은 똥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송진우 선생님에게 하실 말씀입니다.”
“병원비를 깎아 주셨다고 해서요.”
아이 아빠의 얼굴이 벌게졌다.
말로 하기 힘든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어쩌면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아내와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긴 자식에 대한 미안함일지도 몰랐다.
자존감마저 저하됐을 것이다.
‘가장이라면 가족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겠지.’
김지훈이 정색을 했다.
“개인적인 결정이 아닙니다. 깎아 줬다는 건 말도 안 되고요. 아시겠지만 우리 병원은 소아 희귀 질환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전적으로 지원하지 못해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응급 수술을 해 주신 것만 해도…….”
“그런 생각 하실 필요 없습니다. 의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음은 감사히 받지만 부담을 느끼실 일이 아닙니다. 아이만 생각하세요. 이런 말 또 나오면 저는 회진 못 돕니다.”
최대한 마음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했다.
아이 아빠의 진심이 담긴 인사로 족했다.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핵심은 응급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전신에 영향을 받은 아이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간 이식을 비롯해 다른 수술을 받은 환자 모두 불안과 동시에 안도와 보람을 주는 존재였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어 회복의 길로 들어서도 퇴원할 때까지 결코 방심할 수 없었다.
‘어렵지 않은 환자가 없어.’
최근 간 이식 수술을 한 환자 중 한 명이 잠시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그 탓에 중환자실 치료가 길어졌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다행히 모든 노력을 기울인 끝에 고비를 넘겼고, 지금은 일반 병실에서 퇴원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간 이식 수술 후 사망률을 생각하면 난 정말 운이 좋은 편이지만 실력을 더 쌓아야 한다. 공여자들도 많은 문제로 고통받는데 스승님이 수술한 환자들은 합병증 발생률이 상당히 적은 것만 봐도 답은 명확해.’
간 이식 학회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수많은 의사들의 경험과 지식을 모아 또 한 번의 도약이 가능해지도록 노력해야 했다.
‘몸만 치료하는 일도 이렇게 어려운데 마음은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정신과 의사들에겐 명쾌한 답이 있을까?’
박재순 환자의 변하지 않는 상황은 누구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가족 모두 마음을 열고, 양보해야 바라던 식구가 될 것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손일석 말대로 관여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 몸의 병이 되는 법이었다. 실제 터닝 포인트는 몸의 변화만도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식욕이 좋아지고, 웃음을 보이는 이유 중에는 감정의 변화도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면에서 박재순 환자는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어 자주 찾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오후 회진을 앞뒀다.
김지훈이 결전을 앞둔 사람처럼 얼굴을 굳힌 채 뷰박스를 바라보았다. 한덕식 환자를 수술한 오만석, 이혁원, 박재순 환자의 나종진, 신생아 수술을 한 송진우와 함께였다.
“보자.”
이혁원이 재빨리 필름을 걸었다.
한덕식 환자의 상부 위장관 조영술이었다.
식도, 위, 십이지장에 이어 소장까지 차례차례 찍어 내부 이상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검사였다. 장 밖으로 새어 나갈 경우를 대비해 수용성 조영제를 쓴다.
모든 눈이 십이지장으로 쏠렸다.
제대로 아물었다면 파열됐던 부분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반대라면 미세한 선으로라도 드레인을 박았던 통로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퇴원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를 떠나 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김지훈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확실하게 막히지 않았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소화액이 새고 있다면 아무리 미세해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지금 놓치면 환자에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다섯 쌍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소장 주름이 정상적으로 관찰됐다.
파열됐었던 부분에 집중하며 조영제가 새어 나간 흔적이 있는지 샅샅이 살폈다.
“오만석 선생, 이혁원 선생, 어때?”
“안 보입니다. 확실히 막혔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결론을 내렸지만 단 하나의 검사로 확정할 수 없는 손상이 십이지장 파열이었다. 만일 심지가 박혔던 통로 주변에 소화액이 포함된 일종의 물혹이 발생했다면 십이지장에 구멍을 낼 수도 있었다.
“CT 보자.”
흉부와 복부 CT를 걸었다.
흉이 남았어도 폐 손상은 완벽하게 치료됐다. 아직 간이 자라려면 멀었지만 남은 간 역시 정상적인 소견을 보여 십이지장 주변의 복벽만 확인하면 됐다.
심지를 박았던 통로가 흉처럼 남은 흔적이 관찰됐다. 옆구리에서 시작된 선이 십이지장과 딱 맞닿은 조직에서 끝났다. 우려했던 물혹은 보이지 않았고, 십이지장과의 연결도 보이지 않았다.
한덕식 환자는 완전히 회복됐다.
“후우! 됐어.”
김지훈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십이지장 손상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민수의 기억에서 벗어날 희망이 보였다. 불행한 일이 또 일어나면 안 되지만 동일 손상의 치료 방침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혁원 선생, 정상적인 식사 시작하고, 이상 없으면 다음 주 월요일에 퇴원시키자.”
“지금도 삼겹살 타령을 하는 것 같던데 고기반찬 꼭꼭 씹으라고 하겠습니다.”
농담에도 긴장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송진우가 다음 사진을 걸었다.
위와 공장을 연결하는 우회 수술을 받은 신생아 역시 상부 위장관 조영술을 시행했다. 말로 통제할 수 없는 아이인 데다 가느다란 코 줄을 통해 조영제를 소량 주입해야 하기 때문에 검사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지훈이 안타까운 숨을 내뱉었다.
‘신생아는 신생아네.’
위와 소장만 촬영하면 되는데 필름마다 전신이 다 찍혔다. 그만큼 작고 여린 생명에겐 치료를 위한 방사선 검사마저 부담이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인간의 몸, 특히 아이의 몸은 단순하지 않았다. 언제나 느끼지만 안는 것조차 힘든 아이라 할지라도 몸에 깃든 생명력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증명이라도 하듯 소장 결손이란 병을 타고나 응급으로 수술한 아이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변을 봤다. 마치 성인이 돼 다친 상처는 평생 남지만 어려서 다친 상처는 거의 흉을 남기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신중하게 진찰하고, 강은미와도 상의해 불과 며칠 만에 위장관 조영술을 시행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로운 경과였다.
핵심 부위를 찾았다.
관건은 연결 부위의 유출이었다.
‘장 소리도 좋고, 단순 촬영에서 이미 대장까지 공기가 내려갔다. 제대로 아물었다는 신호가 분명해.’
위에 머문 조영제가 하얗게 보였다.
다음 사진과 그다음 사진.
조영제가 공장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모든 필름에서 연결 부위 밖으로 새는 조영제 음영을 찾을 수 없었다. 사진마다 달라지는 소장 모양은 장 기능이 원활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송진우 선생.”
“하루 더 지켜보고 물 시작하겠습니다.”
“좋아. 내일 아침 일반 병실로 올리자.”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도한 아이가 극적이라 할 정도로 빠른 회복을 보이는데 가슴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소아 외과 전문의의 첫걸음을 떼게 한 환아나 마찬가지였다.
김지훈의 얼굴도 차츰 편안해졌다.
가장 걱정됐던 환자 두 명의 검사 결과가 너무 좋았다. 의사로서 가슴 벅찬 때였고, 후배들의 뛰어난 능력과 실력에 뿌듯하기만 했다.
마지막 검사가 남았다.
“나종진 선생.”
박재순 환자의 CT를 걸었다.
정상적인 구조를 완전히 잃었지만 수없이 본 휘플 수술 후 CT였다. 췌장, 담도, 위와 차례로 연결된 소장을 따라 세세하게 확인했다.
깨끗했다.
췌장 소화액이나 담즙이 새고 있다는 징후를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수술 후 흔히 볼 수 있는 복강 내 복수마저 극히 소량이었다.
‘암만 아니었으면 정말 건강했던 분이었구나. 심리적으로 불안할 텐데도 회복은 오히려 더 빨라 보이네.’
“어때?”
그때 서도훈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늦었습니다.”
“우리도 이제 막 확인하던 참이야. 어때 보여?”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아 보입니다. 환자 상태를 감안할 때 코 줄 빼고 지켜봐도 될 것 같습니다. 라파로로 했는데 하루 정도 후에 물을 시작하는 건 어떨까요?”
“빠르지 않을까?”
“개복보다 훨씬 경과가 좋습니다. 드레인도 무척 깨끗하고, 장 기능도 활발합니다. 지금보다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을까요?”
서도훈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오직 췌장이라는 단 한 우물만 파는 써전의 의견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 부분에 관여하는 김지훈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도 남았다.
‘인정해야 할 때는 인정해야지.’
“좋아. 그렇게 하자.”
만족스러운 결과에 다들 웃음을 머금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오후 회진을 시작도 안 했는데 여섯 시가 훌쩍 넘었다.
“어이구! 결과 확인하느라 늦었네. 빨리 회진 돌고 퇴근하자. 각자 일 봐.”
김지훈이 휘리릭 사라졌다.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박재순 환자가 모처럼 웃었다.
둘째 아들 역시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장 사이가 안 좋아 보였던 셋째 아들은 무슨 이유인지 급히 휴대폰을 들고 나갔다.
“정말 내일 코 줄을 빼고, 모레부터 물을 먹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복강경을 선택하셨을 때 솔직히 우리도 우려했는데 환자분 선택이 옳았네요.”
“감사합니다. 두 분 박사님 덕택입니다.”
병실 분위기가 확 좋아졌다.
김지훈 역시 아직은 안심할 때가 아니라며 주의 사항을 전하면서도 싱글벙글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확실히 그동안 보인 모습과 달랐다.
박재순 환자가 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이 늙은이 하나 때문은 아닌 것 같네요.”
‘역시 인생 경험이 풍부하시네요. 코 줄을 끼고 이렇게 말을 잘하는 분도 찾기 힘든데 의지까지 참 강하시고요.’
강한 의지가 부모와 자식 간에 벌어지고 있는 불화의 원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환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맞습니다. 신경 바짝 쓰던 환자 두 명이 있는데 오늘 검사 결과가 너무 좋아 저절로 웃음이 나네요. 환자분 회복까지 무척 빨라 이렇게만 의사 생활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환자기에?”
“개인 정보라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지만 신생아 수술이 너무 잘됐습니다. 그 아이도 아버님과 비슷하게 물을 시작하게 됐거든요.”
‘또 아버님이라고 부르네. 정말 날 부모처럼 생각하고 치료하는 걸까?’
“아! 프로그램이라고…….”
“기억하시네요. 병원 입장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정말 큰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한편으로 아픈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고요.”
자신의 몸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박재순 환자가 이상하리만치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 아이들이 많습니까?”
“많죠. 웬만한 병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질환을 가진 경우에는 제때 치료해야 살 수 있는데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한 달에 한 명 정도 무료로…….”
김지훈이 어색하게 웃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 자신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 기분이 너무 좋은 탓에 각 환자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을 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공연한 말을 했습니다. 이만 가 봐야겠네요. 내일 뵙겠습니다. 코 줄 뽑고 싶으시면 운동 꼭 하세요.”
회진이 밀렸다.
김지훈이 서둘러 병실을 나가자마자 박재순 환자가 급히 둘째 아들에게 손짓하며 귓속말을 했다.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알아봐.”
“왜 그러세요?”
“나중에 얘기하자.”
병실로 들어오는 셋째 아들의 눈초리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