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김지훈과 오만석이 뷰박스 앞에 선 채 검사 결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드시 마지막이 되어야 할 한덕식 환자의 십이지장루 조영술 사진이었다.
“오만석 선생, 빼도 되겠어?”
“환자 전신 상태가 좋고, 식사 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십이지장 파열 부분이 거의 막힌 것으로 보입니다. 제거해도 안전하다는 판단이 듭니다.”
김지훈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순조로운 회복에도 불구하고 십이지장 파열 치료의 특수성과 위험성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했었다. 아직도 같은 상황으로 고통받았던 장민수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날 정도로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검사상으로는 문제없어 보이지만 섣부른 판단이면 순식간에 처음 상태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유지하면 감염의 우려가 있는 데다 아예 굳어 버려 도리어 통로가 막히지 않을 수도 있다.’
정확한 판단이 요구됐다.
답은 환자에게 있었다.
김지훈이 직접 드레싱을 하며 신중하게 한덕식 환자의 십이지장루 상태를 살폈다. 거의 다 아물어 조그만 구멍 하나 보일 뿐이었고, 좁아진 통로에 심지를 유지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전신 상태 역시 확실하게 좋아졌다.
‘소화액이 새고 있다면 이 정도로 살이 차지 못한다. 검사 결과와 비교할 때 더 이상 늦추면 오히려 환자에게 손해다.’
결정을 내렸다.
심지를 제거했다.
한덕식 환자와 보호자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하나같이 치명적이라는 간, 폐, 십이지장의 손상으로 사경을 헤맨 날들이 엊그제 같은데 드디어 퇴원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병원 생활만큼 힘든 생활이 없었다.
마음이 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퇴원할 수 있습니까?”
“일주일 후 상부 위장 조영술을 시행할 생각입니다. 그때 아무 문제 없다면 퇴원이 가능합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지훈이 웃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지만 아직 고비 완전히 넘은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의사만큼은 끝까지 환자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했다. 그렇다고 환자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하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삼겹살 드시고 싶어서 그러세요?”
“그런 게 아니라…….”
“농담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도 절대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십이지장이라는 장기가 의사에게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힘드시더라도 여유를 갖고, 마지막까지 치료에 잘 따라 주십시오.”
환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보호자들도 핀잔하듯 눈을 흘겼다.
“넌 왜 그렇게 봐?”
“아버지! 일주일이라고 분명히 들으셨죠. 퇴원하고 싶다고 엄마 달달 볶으면 안 돼요.”
“내가 언제 그랬어?”
건강하지 않으면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십이지장 파열 자체가 극히 드문 경우이기에 마지막까지 성급한 판단인지 아닌지 고민스러웠는데 한결 마음이 놓였다.
병실을 나왔다.
슬그머니 따라 나온 아들이 음료수를 건네며 물었다. 슬쩍 병실 쪽을 바라보는 것을 보니 아버지 앞에서 묻기 곤란했던 모양이었다.
“선생님, 설마 아직도 위험한 상태는 아니죠?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마음에 걸리네요.”
“위험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주의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십이지장 손상을 받은 환자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그동안 몸과 마음의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바짝 말라 있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짜증 섞인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어떤 가족과 꽤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아픈 게 벼슬은 아니지만 부모 자식 간에도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을 텐데 너무 비교되네.’
때문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질문 드리기 뭐하지만 회사와 합의는 잘됐습니까? 이곳 분도 아닌데 퇴원 전에 확실하게 마무리 지으셔야죠.”
아들이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분들을 만나 합의 끝냈습니다. 오상철 상무가 저지른 사건 때문인지 공정을 기하려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가장 마음에 걸렸던 과실 부분은 10퍼센트 정도 있는 것으로 조정됐고요.”
“10퍼센트요?”
“안전 조치는 회사만이 아니라 근로자분들도 지켜야 하는데 아버지를 비롯해 모두 안전 지침을 확실하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도 솔직하게 인정하셨고요. 그래도 뇌물 사건 때문인지 애초 회사 주장보다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애초에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다들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려 했던 회사도 잘못했지만 합의에 정신이 팔렸던 우리 역시 잘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세상일 참 복잡했다.
솔직히 작업자 과실이 있었다는 사실에 내심 당혹스러웠다. 자신의 몸을 스스로 지켜야 하건만 최소한의 원칙조차 지키지 않은 것이다. 정도와 결과에 차이가 있을 뿐 안전 불감증은 회사와 개인을 가리지 않고 만연한 모양이었다.
씁쓸했다.
‘양쪽 말 다 들어 봐야 안다더니 이런 사고도 예외가 아니었네. 오상철 상무 부류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애초에 서로가 잘못을 인정하고 솔직한 태도로 상의했으면 어땠을까?’
역시 원칙이 가장 큰 무기였다.
최선의 대책은 사고 후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근로자 스스로 안전 조치를 요구하고, 수칙을 준수하는 것이 마땅했다. 회사 역시 예방과 교육, 안전에 드는 돈은 결코 비용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산업 의학과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창립학회 끝난 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구미 예방 의학과를 찾아야겠어. 누구하고 가지?’
예전이었으면 숨도 안 쉬고 손일석이나 이경석과 함께 상의하며 실행해 가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 병원의 일과가 너무 빡빡해 주말까지 양보하라는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민정호는?
행정부원장이라도 다를 리 없었다.
사실 김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 돈 되는 일도 아니고, 사서 고생하는 꼴이라 어떤 사람은 내심 비웃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겸사겸사 경아 씨하고 희연이랑 같이 갈까? 근데 구미 주변에 구경할 데가 있었던가? 시간은?’
이리저리 궁리를 해 봐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거리라도 가까우면 한결 수월할 텐데 너무 멀었다. 예방 의학과에 친분이 있는 의사도 없어 빠른 시간 내에 해결되기를 바라기도 힘들었다.
세상에 쉬운 일 얼마 없었다.
김지훈이 어깨를 휘휘 돌렸다.
힘내는 수밖에 더 있을까?
고비 하나를 넘기 직전이었지만 또 다른 고비가 떡하니 남아 있었다. 고령인 경우 휘플 자체가 위험한 상황에서 경험이 없는 복강경 수술을 시행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안정이 필요한 때이건만 병실 분위기는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곤란하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김지훈이 수시로 박재순 환자를 찾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도훈과 나종진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핑계는 얼마든지 있었다. 집도를 했기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배에 난 상처야 별것 없어도 드레인을 통해 나오는 삼출액의 양상이 무척 중요했다.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조기에 잡아내야 그나마 대처할 기회라도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환자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어떠세요?”
“견딜 만합니다.”
“소변 줄 빼 드릴 테니 화장실부터 직접 걸어서 가셔야 합니다. 내일부터는 걷는 운동도 시작하시고요. 폐렴을 예방하고, 빠른 회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환자의 의지를 믿었지만 다른 환자 같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일까지 걱정됐다. 큰 수술을 받은 지 며칠 되지 않은 환자가 코 줄에 수액 줄까지 주렁주렁 달고 혼자 운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보호자가 아니면 간병인이라도 필요했다.
사실 하루 종일 아버지 곁에 있는 둘째 아들 한 명이면 충분했지만 문제는 다른 자식들이었다. 지금도 딸 한 명이 함께 있었지만 환자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분명하게 보였다.
‘누구보다 살가울 딸과도 사이가 안 좋아 보이네. 간병인이라도 쓰시라고 말해 볼까? 아니지.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구했겠지. 어쩐다.’
손일석 말대로 다른 사람 가정사에 신경 끊고 싶었다. 최소 둘째 아들 이외에 누군가 진정으로 걱정하는 자식이 있고, 휘플 라파로를 받은 환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생각만 그럴 뿐 자주 찾아 환자를 안정시키고, 믿음을 주는 것 이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의사는 치료로 말해야 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환자와 최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마음속 특별한 말이 아니더라도 심리적 안정을 찾기를 바랄 뿐이었다.
박재순 환자의 눈빛이 묘해졌다.
‘상처 치료도 직접 하고, 소변 줄도 직접 뽑아 주다니 대학 병원 부원장이라고 생각하기 힘드네. 내게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는지 모르지만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병실을 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진동으로 해 놓은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송진우입니다.)
“무슨 일이야?”
(소아 희귀병 환우회에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선천성 소장 결손으로 진단받은 아이가 있는데 상태가 무척 안 좋답니다.)
“뭐? 그래서?”
(하필이면 근처 병원 소아 외과 의사가 부재중이랍니다. 응급 수술이 가능한지 물어보는데 아무래도 수술받을 형편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무작정 무료 수술을 요구하는 부모는 없었다. 어쩌면 백방으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사이 아이가 나빠졌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소장 결손이라면 신생아가 분명했다. 만일 적정한 수술 시기가 임박했다면 단 몇 시간 차이로 치명적인 상황이 벌어지고도 남았다.
‘환우회에서 연락이 왔다면 어차피 우리가 수술해 줘야 하는 아이다. 설령 아니더라도 고민할 일이 아니다.’
“알았어. 강은미 선생에게 연락하고, 빨리 보내라고 해. 응급실과 수술 방에 신생아 수술 있다고 미리 말해 놔.”
언제 올지 몰랐다.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김지훈이 박재순 환자를 보았다.
“수술이 있어서 가 봐야겠습니다. 내일부터 운동하는 거 잊지 마시고, 오늘은 편히 쉬세요.”
급히 병실을 나가는 김지훈의 모습을 보던 박재순 환자가 눈가를 좁혔다. 명색이 부원장이고, 아래 의사가 한둘이 아닌데 항상 바쁘게 움직였다. 퇴근 시간이 다 된 지금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한 아이의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이 끝나고 나면 상당히 늦을 텐데 난처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네. 그 와중에 자주 찾아오다니 환자를 위해 정말 최선을 다하는구나.’
많은 의사들이 그렇게 산다.
특히 바이탈을 다루는 과는 본능적으로 반응한다고 해도 무방했다. 불친절한 병원과 의사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환자에겐 직접적이면서도 크게 다가오기에 더욱 심각하게 느끼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좋은 일과 나쁜 일 중 나쁜 일을 유독 오래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응급실에 도착한 김지훈이 당직실로 들어가 바로 교과서를 꺼냈다. 원칙적인 설명만 있다고 해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은 수없이 되새기는 것이 마땅했다.
송진우가 콧등을 찡그렸다.
‘경험과 이미 알고 있는 지식만으로도 충분하실 텐데 정말 한결같으시네. 부끄럽지 않은 소아 외과 전문의가 되려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어.’
강은미도 다르지 않았다.
연락을 통해 들은 정보를 토대로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소아 수술에서 손 떼기로 했던 이혁원까지 나타나 뜻밖의 말을 했다.
“신생아라며? 집도를 누가 할지 모르지만 케이스에 따라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내가 세컨 설게.”
“퍼스트 안 서시고요?”
“난 간 이식 파트야.”
송진우가 긴 숨을 내쉬었다.
한 명의 아이를 위해 네 명의 전문의, 아니 마취과까지 다섯 명의 전문의가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실력을 갖췄으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의사들이었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강한 확신이었다.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결손, 부분 폐쇄, 혹은 완전 폐쇄에 따라 달라지는 수술 방법과 수술 후 치료까지 필요한 부분을 모두 검토하는 데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얼마 후,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애애애애앵!
한 여인이 새파랗게 질린 채 수액과 작은 코 줄을 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급히 환아를 맞이한 의료진 모두 한숨을 쉬고 말았다.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된 신생아였다.
아프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것도 생명을 위협하는 선천성 질환에 걸렸다. 아이들을 수술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었지만 가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도 문제였다.
첫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자식 걱정으로 까맣게 탔을 가슴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느 집은 돈이 너무 많아 문제고, 어느 집은 돈이 너무 없어 문제네. 적어도 아이만큼은 돈 걱정 없이 키워야 하지 않을까?’
잠깐 스친 상념이었다.
의료진 전체가 아이에게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