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37화 (1,237/1,329)

3화

다짜고짜 팔을 잡아끌며 스테이션에 붙은 당직실로 향했다. 개원 후 단 한 번도 병동 당직실에서 볼 일이 없었던 민정호까지 보였다.

“무슨 일이야?”

“훈철이 형님한테 연락 못 받았어? 하긴 방송도 못 듣는 사람이 전화를 받을 리가 없지. 뉴스부터 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지훈이 반색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정훈철이 연락하고, 손일석과 민정호가 관심을 보일 일은 하나뿐이었다.

‘결과가 나온 건가?’

저녁 뉴스가 시작됐다.

다들 텔레비전 앞에 바짝 앉았다.

어느 틈엔가 회진을 마친 의국원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둘 모여들어 당직실이 꽉 찼다. 이준영 교수와 오만석까지 들어와 자리가 비좁을 정도였다.

“이 시간에 방송하는 거 맞아?”

“훈철이 형님이 없는 소리 했겠어?”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드디어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자 어떤 결말이 날지 알 수 없었던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일전 병원 공사 중 구조물이 무너져 세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사고를 보도드린 적이 있습니다.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모든 분이 무사히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와 무척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고의 원인과 처리 과정을 심층 추적한 결과 분노와 서글픔을 감출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처참했던 초기 사고 현장에 이어 공사 관계자들이 줄줄이 소환되는 모습이 방송됐다. 얼굴을 가렸지만 익히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상철 상무, 하청과 재하청 업체 사장, 감리 담당자, 6급 주사인 공무원에 경찰로 짐작되는 사람까지 보였다. 매일 발생하는 산업재해와 처리 과정을 생각하면 실로 대규모 인원이 연루됐다.

『이들 모두 공사 관련자입니다. 건설사부터 감리 담당자도 모자라 인허가를 감독하는 공무원까지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안전을 무시하고 오직 자신들의 이득만 챙겼다는 말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사고 이후 조사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조사를 담당한 경찰 일부까지 사고를 축소 왜곡하려 했다. 서정호를 찾았을 때 얼핏 들어 의심하고 있었지만 실로 충격적이었다.

『검찰에서는 수사 중이라며 말을 아끼고 있지만 소환된 관련자 전원에게 구속 영장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중 주도적인 역할을 한 건설사 임원과 뇌물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공무원, 경찰 관계자는 구속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검은 연관 고리가 낱낱이 밝혀지기 직전이었다.

총체적 비리였다.

『지금도 이 땅에서 수많은 재해가 발생하고, 근로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재판이 시작돼야 이들의 비리와 범죄를 확정할 수 있겠지만, 부디 엄정한 판결이 내려지기를 바랍니다.』

앵커의 표정이 착잡하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건이 뇌물과 비리 문제로까지 확대된 계기는 익명의 제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교훈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일석과 민정호가 김지훈에게 힐끗 눈길을 주었다. 무작정 고소 고발을 했거나, 굴비를 오상철 면전에다 냅다 내던지는 등 감정대로 처리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이 정도로 사건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보기보다 훨씬 주도면밀한 건 확실해. 부원장 되더니 변했어. 확실히 변했어.’

뉴스가 끝났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후련하면서도 갑갑했다.

본격적인 조사일 뿐 당장 처벌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극악한 사람이라도 정해진 절차를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오심을 방지하기 위한 3심 제도에 예외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손일석이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제대로 처벌을 받을까?”

“가장 껄끄러웠을 경찰과의 유착까지 서정호 검사님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합당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고 재판부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전유죄! 유전무죄!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청렴한 공무원, 강직한 검사와 경찰, 권력이나 부에 영향받지 않는 판사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극소수에 불과한 자들이 분탕질을 치고, 그들이 언론에 집중적으로 노출되며 불신이 더욱 가중되는지도 몰랐다. 스스로 그런 자들을 끊어 내지 못한 조직 자체도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의사의 영역이 아니었다.

이런 뉴스에 모두들 귀를 기울인 이유가 있었다. 단지 종합 병원 건립이 늦어진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피해자를 수술했고, 치료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민 부원장님, 이렇게 되면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설마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개인이 아니라 회사 전체가 걸린 상황이라 이미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어디나 정직한 사람이 있겠지만 때론 이런 사건을 기회로 여기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사람이 있겠죠? 너무 많으면 안 되는데……. 어쨌든 산재 처리가 됐나요?”

민정호 얼굴에 살짝 표정이 묻어났다.

‘경쟁하는 측에서 오상철 상무를 묻어 버릴 것이란 내 말을 바로 이해하시네.’

“오늘 오후에 정식 처리했고, 피해자분들과 다시 합의한다고 합니다. 비리 혐의자들과 관계를 끊고, 회사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적절하게 보상하지 않겠습니까?”

손일석이 손뼉을 쳤다.

“당연하지. 피해자들과 원만하게 합의하지 못하면 재판에도 영향을 줄 테고, 회사라고 피해 갈 수 있겠어? 역시 형님이야. 칼 딱 뽑으니까 추풍낙엽이네. 야! 굴비가 도대체 몇 사람을 잡은 거야?”

“손 교수!”

굴비와 상품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몇 없었다. 공연한 오해를 살 이유가 없었고, 여러 사람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었다.

“흠흠! 아! 이준영 선생님, 언제 오셨습니까? 김 부원장이 이번에 또 한 건 했네요. 아주 큰 의사가 될 것 같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잘 해결돼서 다행이다. 더 이상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이젠 환자에 집중해. 서도훈 선생과 할 휘플 라파로 기대하고 있다. 다들 남은 회진 안 돌고 뭐 해?”

사실상 일반외과 대장이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당직실이 휑하니 비었다.

이준영 교수가 마지막으로 나가는 김지훈의 어깨를 툭 쳤다. 무뚝뚝한 얼굴 속에 제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가득했다.

“환자는 어때?”

“이대로 회복되면 이 차 수술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자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우리 선생들도 덜 고생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도 감사드리고요.”

“내게? 왜?”

‘민 부원장에게 사고 처리에 대해 물으셨다면서요? 가끔 한덕식 환자 드레인까지 직접 세척하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말없이 꾸벅 인사를 했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씰룩였다.

김지훈이 한덕식 환자를 다시 찾았다.

환자는 잠이 든 상태였고, 아들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외출 준비 중이었다. 뉴스를 본 때문인지 모르지만 제법 급해 보였다.

“어디 가십니까?”

“회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얘기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마치 상관없다는 것처럼 담담했다.

의사가 반응을 보일 일이 아니었지만 그동안 김지훈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는 아들이었다. 더구나 민정호에게 정식으로 산재 처리가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부담스러울까 봐 이러시나?’

고마운 일투성이였다.

아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받은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미처 환자와 가족이 알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인사받자고 한 일이 아니기에, 누군가 당연히 했을 일이기에 스승과 비슷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인사를 하지?’

분위기 어색해졌다.

“주무시니까 내일 뵙겠습니다.”

김지훈이 먼저 병실을 나왔다.

손일석이 손짓을 했다.

“왜?”

“그냥 가면 섭섭하지.”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

“이준영 선생님이 깔끔하게 정리한 것으로 아는데 정신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이제 우리 선에서 할 일은 없어. 형님 칼 안 믿고 더 나가다 금 밟으면 죽는 거야. 지금까지 누구보다 잘했어. 맥주 한잔하면서 깨끗하게 정리하고, 환자에게 집중하자.”

“맞다. 네 말이 맞다.”

“진충기 선생님하고 민 부원장이 기다리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아! 처형한데 허락받아라.”

이미 판 깔았다.

술 한 잔 생각나는 하루기도 했다.

간만에 술자리를 가졌다.

서정호 검사와 재판, 휘플 라파로에 산업 의학과 개설까지 술안주 풍성한 날이었다. 마지막에 던진 손일석의 말에 입맛을 다셔야 하긴 했다.

“산업 의학과 개설하려면 구미 병원 예방 의학 선생님들께 조언을 받아야 할 텐데 직접 내려가야 하지 않아? 사람 구하는 일도 꽤 걸릴 거야.”

“그러게. 언제 시간 내지?”

“일단 총회 끝나고 생각하자. 아! 싱글벙글 생각난다. 희한하게 잊히지가 않네.”

입에 침 고였다.

어떤 입맛을 다셨는지 모를 일이었다.

***

박재순 환자가 입원했다.

평균 수명이 점점 늘어나 환갑잔치를 치르면 욕먹는 세상이었다. 실제로 예전에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한 노인이 많았다. 하지만 칠순이 넘은 이상 고령이라는 위험 인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공하더라도 전통적 휘플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확실하다. 전신 상태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된다.’

전체 건강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혈액 검사부터 시작해 폐 기능까지 점검했다. 나이에 비해 상당히 건강하다고 나와 한시름 놓았다.

환자의 의지도 변하지 않았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루를 살아도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다. 특히 정신이 멀쩡해야지요.”

김지훈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 건강을 유난히 강조하는 환자였다. 가끔 장시간 마취에 노출되는 큰 수술을 받았거나 술, 약물 등의 다른 요인이 있는 환자의 경우 일시적으로 의식이 흐려지는 때가 있었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거의 100퍼센트 회복되지만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재순 환자가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환자가 겪는 수술과 병에 대한 불안에 무엇인가 더해진 것처럼 깊고 무겁게 느껴졌다.

서도훈의 말이 절로 생각났다.

‘정말 재산 싸움이라도 났나?’

그러고 보니 자식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혼자 의사와 상담을 하고 있었다. 자식들이 진료실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일은 의무였다.

만나야 했다.

췌장암 자체의 경과와 복강경을 이용한 휘플의 위험성을 모두 설명한 후 추가 동의서를 받았다. 유독 한 사람의 눈가가 붉어 보였다.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중간 정도 돼 보이는 자식이 물었다.

“얼마나 사실까요?”

“1기인 경우 수술만 잘되면 오 년 생존율이 사오십 퍼센트 정도 됩니다. 확률이자 평균이니까 더 오래 사시는 분도 많다는 말입니다.”

“수술 후 혹시 정신이 혼미해진다거나 치매 기운이 생긴다거나, 이런 문제는 없습니까?”

“무척 드물지만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리 판단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다소 놀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도 걱정하기 마련인데 사무적인 말투처럼 들렸다. 모든 보호자들이 입에 다는 잘 부탁한다는 말조차 없었다.

“둘째 형님, 들었죠. 평생 아버지 모신 일은 고맙지만 일은 똑바로 처리해야 합니다.”

“셋째 말이 맞아.”

장남으로 보이는 자식부터 딸들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법대로 해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둘째를 보는 눈길 자체가 곱지 못했다.

‘후우! 정말 유산 때문에 싸우는 모양이네. 부모 노릇, 자식 노릇 못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호성이 엄마처럼 내 오해였으면 좋겠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째 아들이었다.

“선생님, 우리 아버님 수술 잘 부탁드립니다.”

눈가가 벌게진 채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특별난 일이 아니었다. 거의 매일 보는 모습인데 왜 이리 슬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김지훈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돌아선 둘째 아들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고, 신경 써서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찜찜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수술이 잘되기를,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식이 단 한 명뿐이라는 느낌 때문일까?

그놈의 돈이 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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