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35화 (1,235/1,329)

1화

따르르릉!

송진우였다.

(선생님, 오늘 당직이시죠?)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부원장 우대한다고 당직을 줄여 준 데다 여러 가지 일로 당직 날까지 까먹었다. 각오한 일복과 예기치 못한 일복은 체감이 다른 법이었다.

“어? 오늘 내가 당직이야?”

(예, 당직이십니다.)

“환자 있어?”

(응급실에 환자 두 명 누워 있습니다. 첫 번째 환자는 아뻬고, 두 번째 환자는…….)

“됐다. 내려갈게.”

오늘은 잊지 않았다.

“경아 씨, 나 오늘 당직이에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분명 부드러운 목소리로 통화 잘 끝났는데 이유 모를 찜찜함에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굳이 안 해도 되는 날은 꼬박꼬박 잘도 연락하시네. 당직 말고 다른 일이 생겼을 때 전화하란 말이에요.’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이다.

어쨌든 환자가 두 명이었다.

다행히 마이너 수술인 아뻬와 외부에서 복원되지 않는 탈장이었지만 일과가 막 끝난 시점이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였다.

“아뻬는 고경철 선생이 라파로로 해. 그동안 이경석 선생님에게 얼마나 잘 배웠는지 볼 거야. 송진우 선생, 탈장 라파로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좋아. 대신 두 수술 모두 퍼스트는 내가 선다.”

수술이 시작됐다.

고경철의 노력과 성취가 눈에 보였다.

상당 부분 양보할 경우였다.

이제 곧 전공의 삼 년 차를 바라보지만 전문의, 특히 고수의 눈에는 부족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더욱이 누구보다 깐깐한 김지훈에게 걸리는 부분이 없을 수 없었다.

김지훈의 준엄한 눈길에 송진우가 고경철과 함께 휴게실로 직행했다. 지적하고 당하는 사람이 다른데 왜 두 놈 다 얼굴이 시뻘게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송진우는 분명 한 단계 올라섰다.

소아외과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써전답게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복강 내에서 시행했던 기존 방법 대신 복부 피하층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써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잘하네. 소아외과를 하든 간 이식을 택하든 손색이 없겠어. 아! 전공의 이 년 차 수준을 뛰어넘은 경철이까지 내 후배들은 다 왜 이렇게 잘났지?’

그뿐일까?

모찬우, 한수영을 비롯해 펠로우 일 년 차들 역시 후한 점수를 받고 있었다. 교수 임용을 떠나 자신이 선택한 분야의 중추가 되고도 남았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뒤로한 김지훈이 조용히 송진우를 불렀다. 부원장의 내공으로 휴게실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줬다.

쇠는 두드릴수록 강해진다.

송진우가 난로가 됐다.

전문의 태운 벌 바로 받았다.

“선생님, 응급실에 단체 TA래요.”

TA(Traffic Accident), 단체 교통사고?

근래 다소 잠잠했던 응급실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어디 한 군데 부러져도 이송 때문에 바쁜데 수술 환자까지 발생했다.

한밤이 되도록 환자가 끊이지 않아 응급실, 수술실, 마취과는 물론 원무과의 눈총까지 받았다. 허기진 배를 달래 줄 야식마저 윤활유가 되지 못했다.

‘나도 힘들어 죽겠어요.’

김지훈이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몸이 허한 모양이었다.

또 환청이 들렸다.

민정호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니 그날 오후.

응급 수술에 이어 정규 수술까지 내처 달린 김지훈이 뻑뻑한 눈을 비비며 심각한 표정으로 한덕식 환자의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죽까지 식사를 진행한 후 처음으로 시행한 십이지장루 조영술이었다. 드레인이 박힌 통로 이외의 조직에 조영제가 스며든 흔적이 있다면 아무리 미세해도 이후 치료를 진행할 수 없었다.

“오만석 선생, 어때?”

“통로가 단단하게 굳은 것 같습니다.”

“확실히 보이는 게 없지? 환자 전신 상태도 괜찮은데 이제 진행해도 될까?”

“진행하시죠.”

십이지장루를 막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점점 가느다란 드레인으로 교체해 주변 조직에 살이 차도록 조치하면 된다. 더 이상 드레인을 삽입할 수 없을 정도로 통로가 좁아지게 되면 별다른 치료 없이 자연스럽게 아물 것이다.

위험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통로를 따라 흐른 소화액이 언제든 염증을 유발할 수 있었다. 일단 염증이 발생해 주변 조직이 물러지게 되면 검사상 통로가 막힌 것처럼 보여도 곧바로 터질 수 있었다. 완벽하게 막힐 때까지 의료진의 노력이 필요한 이유였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오만석 선생과 경철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진행하자.”

곧바로 보호자에게 설명했다.

“이 차 수술은 안 해도 되는 겁니까?”

“방심할 수 없지만 아버님 상태가 잘 유지된다면 현재로서는 수술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만석이 조심스럽게 통로를 세척한 후 기존 드레인보다 가는 드레인으로 교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의 눈가가 벌게졌다.

생사를 넘나들던 아버지가 이젠 밥을 먹고 싶다고 할 정도로 회복됐다. 그렇다 해도 오랜 투병으로 상당히 힘들 텐데 의지가 꺾이지도 않았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머니는 든든한 힘이었다.

하루 종일 병간호를 하면서도 단 한 번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의 직장 문제까지 걱정하느라 누구보다 까맣게 속이 탔을 것이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의료진도 다시 보았다.

특히 김지훈에겐 어떤 말로도 고마움을 표현하기 힘들었다. 우연한 기회에 산재 적용과 합당한 보상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비치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런 의사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분, 보호자분, 지금까지 잘해 오셨지만 앞으로가 더욱 중요합니다. 힘들더라도 우리 선생님들을 믿고 지시를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대로 퇴원하실 것이라고 믿겠습니다.”

그때 한덕식 환자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밥은 언제 먹을 수 있습니까?”

“상황 보면서 곧 진행하겠습니다.”

“혹시 고기도 먹을 수 있습니까?”

“고기요?”

김지훈과 오만석이 정색했다.

환자의 회복은 식욕과 비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기가 먹고 싶다는 말 자체가 실로 엄청난 회복 속도를 암시했지만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었다.

“전에 말씀드린 걸 잊으신 모양이네요.”

“무슨 말이요?”

“식이요법과 영양제 투여를 계속하는 이유를 말씀드렸죠? 단백질과 지방 섭취는 췌장 소화액을 크게 증가시킵니다. 그게 바로 요 심지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자칫 통로가 막히지 않을 수도 있어요. 속이 많이 허하더라도 참으셔야 합니다.”

한덕식 환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매일 먹던 삼겹살이 그립다는 말에 때 아닌 웃음이 터졌다.

“삼겹살은 더 안 됩니다.”

아들과 아내도 웃었다.

모처럼 찾아온 행복에 아들이 긴 숨을 내쉬었다. 중환자실을 벗어난 후에도 꿈도 못 꾼 일이었다.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병원에서 삼겹살 찾는 환자는 처음이네요. 아버님 고기 못 드시게 단단히 단속하셔야 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김지훈의 뒷모습이 듬직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에서 직업 이상의 무엇을 보았다. 아마도 오랜 열정과 의지, 노력이 만들어 낸 신념일 것이다.

김지훈이 크게 기지개를 폈다.

이틀 만에 맞는 진짜 퇴근이었다.

당직 날은 수시로 불려 나가 집에 있어도 근무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난밤 그 난리를 쳐 놓고 응급실에 얼굴 비치면 욕먹을 것이 빤해 살금살금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때 민정호를 만났다.

“어제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분명히 즐거워하는 목소리인데 지금도 얼굴하고 매치가 안 되네.’

“별 표시는 면하겠죠?”

“요즘 와 느끼는 건데 뒤끝 있으시네요. 어쨌든 좋은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이삼 일 내로 공사가 재개될 것 같습니다.”

와우!

김지훈이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럼 조사 결과가 다 나왔다는 말이네요. 어떻게 처리된대요?”

“사고 처리와 무관한 일입니다. 공사 재개 명령이 떨어졌고, 건설사가 모든 책임을 지고 공사를 하겠다는데 막을 이유가 없죠.”

“모든 책임이요?”

“서정호 형님 말씀 잊으셨습니까? 민형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계약 이행을 한다는 말입니다. 사고 관련자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마세요.”

“사람이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전 부원장님 아니면 아예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계속 신경 쓰시는 걸 보니까 바쁘지 않으신 모양인데 집중할 수 있는 일을 드릴까요?”

김지훈이 순간 당황했다.

“뭐가 또 있어요?”

민정호가 공사 현장 쪽을 가리켰다.

“저 안에 무엇을 채울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장 만들고 싶다는 산업 의학과도 인력 문제에 관해서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요.”

“아! 산업 의학과!”

휘플 라파로, 간 이식 창립 학회, 종합 병원 건립과 그에 수반되는 일까지 줄줄이 사탕이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아 탄식이 터지고도 남았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정말 일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 있구나. 평생 일만 하다 끝날 운명인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 터지는 순간!

“여어! 김 부원장, 오래간만이야. 창립총회 준비는 아예 나하고 진충기 선생님에게 홀라당 맡기고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알면서 왜 이래?”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내 정보망이 아무리 촘촘해도 당사자에게 듣는 것만 하겠어? 최소 굴비 세트 들고 형님을 찾아가기 전에 보고를 했어야지.”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에휴! 그러게 말이다. 이참에 네가 부원장 하는 건 어때? 일이 밀려 죽을 지경이다.”

“사고 처리는 대충 마무리 수순을 밟는 것 같던데, 갑자기 죽을상을 하고 왜 이래? 김 부원장 공력 정도면 휘플 라파로, 산업 의학과 개설, 창립총회, 논문 작성, 기타 등등 정도는 부담 갖지 말고 해야 할 일 아니야? 옆에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힘들다고 하면 안 되지.”

‘어떻게 나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더 잘 알지?’

하오문주 인정이었다.

마지막 말이 핵심인 줄 알고 있지만 손일석의 친절한 확인 사살로 골치만 더 아파졌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기억하며 차근차근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둘이 아니긴 한데 하나같이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야.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다.”

“답답할 때는 이게 최고지.”

손일석이 손을 꺾으며 술 한잔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당겼지만 당직 다음 날 술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후회할 것이 빤했다.

“어제 당직 섰어. 난 다음에.”

“그래. 집에 가서 푹 쉬어. 민 부원장, 전에 먹은 치킨이 바싹한 게 예술이던데 어때?”

“좋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 부원장님, 집에 안 가요? 맥주 한두 잔 마시고 대리 하면 아깝지 않아요?”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어서 얼마 전에 작은 오피스텔 하나 전세 얻었습니다.”

손일석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툭하면 얼굴 보는데 이사 온 것도 몰랐다니 서운하면서 미안했다. 세세한 면이 부족한 탓이었지만 민정호도 비슷한 기분일 수 있었다.

“이사도 일인데 미안해요.”

“요새 일이 너무 많으셔서 말씀 안 드렸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미안한 건 미안한 거죠.”

때문인지 문득 이혁원과 송진우가 생각났다.

급히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빨리도 물어보시네요. 일전에 만나 냉장고, 텔레비전 하기로 다 얘기됐어요. 강은미 선생님도 좋아했고요. 시간 맞춰 물건만 들어가면 돼요.”

‘마님!’

구석구석 세심하게 챙기는 고경아 아니었으면 사회생활 빵점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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