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형님, 접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야? 병원 문제는 잘 해결됐어? 우리 소관도 아니고, 요즘 일이 많아 신경 못 써서 미안해.)
“그것 때문에 연락드렸어요. 건설사 상무하고 공사 관계자들이 굴비를 줬는데 어떻게 할까요?”
(굴비? 김 부원장에게 돈을 줬단 거야?)
“예, 상품권이네요.”
(이거 봐라? 사고를 덮거나 축소시키고 싶단 말이네. 김 서방, 바로 들어와. 사실 관계와 액수부터 확인하고 우리 차원에서 처리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신현수가 입을 쩍 벌렸다.
“김 부원장, 설마 굴비 받을 때 이미 서정호 형님에게 연락할 생각을 한 거야?”
“대충 그런 셈이 됐네. 사실 민 부원장이 한 말 때문에 미리 생각을 한 덕이 컸어.”
“제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복잡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나한테 그런 일이 뭐가 있겠어요. 대화가 안 되든지, 이런 식으로 무마하려고 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 더 있어요?”
민정호의 입가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감리나 공무원 한두 명이면 몰라도, 공사 재개 전에 오상철 상무를 포함해 관련된 모든 사람과 분쟁이 생기면 대처하기 곤란해 한 말인데 오해를 하셨네. 오해가 득이 될 때도 있다니 세상 어렵다.’
신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함정을 판 거네.”
“함정을 판 게 아니라 스스로 함정에 빠진 거지. 나만 아니라 우리 셋 모두 돈에 환장한 놈들로 본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 우리한테 줄 돈 있으면 피해자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게 맞잖아.”
“맞는 말인데 은근히 서늘해진다. 우리 김 부원장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네.”
“동감합니다. 치밀하시네요.”
‘그냥 상황을 예상해 보고 어떻게 할지 고민한 것뿐인데 내가 그렇게 치밀했나? 다들 이 정도는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나?’
김지훈은 수긍하지 못했다.
주어진 일이 많으면 어떤 사람도 빼먹는 일이 있기 마련이었다. 훨씬 냉철한 신현수와 민정호가 대비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왠지 따가운 눈길 속에 서울로 향했다.
서정호가 근무하는 곳에 도착했다.
지검이라 해도 규모가 큰 데다 결정적으로 죄지은 놈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더구나 탈탈 털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는 법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그런지 살벌하게 느껴지네.’
공연한 겁까지 나 상당히 어색했다.
역시 멀리할수록 좋은 곳이었다.
서정호가 커피를 내왔다.
김지훈이 사고 발생부터 시작해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무척 화가 난 표정으로 굴비 세트 확인까지 마쳤다. 그런데 정작 두툼한 상품권 다발을 보면서 고민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형님, 왜 그러세요?”
“기다리는 동안 고민해 봤는데 이게 뇌물도 아니고, 부정 청탁도 아니고 애매모호해. 사건을 무마하려고 한 의도가 보이지만, 이 중 누구도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가 아니잖아. 이런 식으로 나쁜 짓 저지르는 놈이 가장 잡기 어려워.”
“분명히 우리 입을 막으려고 돈을 줬는데 이게 왜 죄가 안 되죠?”
“법이란 게 그래. 특히 형사법은 명확한 조항이 있어야 적용 가능해. 기분 나쁘다고 무작정 잡아 가둘 수는 없잖아. 그래도 사고 발생에 큰 책임이 있다는 단서를 제공한 건 확실하니까 개입할 명분이 생긴 건 맞아. 세 사람 모두 진술서 작성하고, 굴비 세트는 우리에게 제출해. 김 형사, 이분들하고 작업 시작해.”
이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일사천리였다.
자리를 옮기려던 신현수가 물었다.
“형님, 최악의 경우 우리가 신고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줬을까요?”
“이런 일에 경험이 많다는 말이겠지. 방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이해관계를 따져 볼 때 돈을 건넸다는 사실 하나로는 형사처벌이 어려울 수밖에 없어. 의도가 통하면 좋고, 안 통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텐데 주저할 일이 있겠어?”
“돈의 힘을 믿었군요.”
“돈은 죄가 없어. 만지는 사람이 죄를 저지르는 거지. 재단 이사장이면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어쨌든 오상철 상무라는 인간이 실수한 것은 확실해. 상대를 잘못 판단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죄가 되지 않는 죄!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서정호의 의지를 믿었다. 최소한 사고에 관련된 자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진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이 자리에 내가 아니라 오상철 상무가 앉을 줄 알았는데 세상 참 어렵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 명의 진술이 일치하는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상품권 액수까지 특정한 후에야 모든 서류 작업이 끝났다. 동시에 진행되지 않았으면 꼬박 밤을 새울 뻔했다.
김지훈이 뻣뻣해진 고개를 돌렸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형사의 매서운 질문에 행여 실수를 할까 봐 땀이 흐를 정도였다. 신고하러 온 사람이 이럴진대 사람 죄짓고 살면 안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마지막에 들린 말이 꽤 가슴에 박혔다.
“일전에 영감님 지시로 경찰 조사를 일부 검토했는데 예상외로 깨끗했던 이유가 있었네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제가 다 미안해집니다.”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지만 공권력조차 피해자 편에 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허탈하다 못해 화가 나야 마땅했지만 서글프기만 했다. 중립을 지키기만 해도 보다 좋은 사회가 될 텐데 말이다.
‘경찰도 연루됐다는 말이네. 직분을 다하는 경찰이 대부분일 텐데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몇이 이러니 비리가 끊임없이 터지겠지.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연못을 흙탕물로 만든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틀린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서정호가 신신당부했다.
“건설사가 상당히 큰 회사야. 여러 수단으로 압박해 올 수 있는 데다 조사 기관과의 유착까지 의심되니까 오늘 일은 입도 벙긋하지 마. 이제부터 우리가 확실하게 처리할 테니까 더 이상 관계자들하고 접촉하지 말고, 고소 고발도 잊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요?”
“뭐라도 하면 조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빠져나갈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니야. 돈 잘 받은 척하며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자 자신의 일을 할 뿐이야.”
평소처럼 행동하면 된다지만 상황이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관련자가 더 늘어 검찰이 나선다고 사건이 빠르게 종결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신현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검찰이 직접 수사하면 새로 시작하는 꼴인데 혹시 공사 재개도 뒤로 밀릴까요? 벌써 몇 주 넘게 완전히 중단된 상태라 마음이 급해지네요.”
“현장 조사는 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어. 서류 조작이나 은폐한 정황이 새로 드러난다면 모를까, 밀려도 며칠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감사합니다.”
서정호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묘한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아! 상품권은 증거물로 보관하지만 굴비는 아니다. 우리 직원들 고생하는 거 보이지? 김 형사는 집에 언제 들어갔는지 기억하지도 못할걸? 매일 이런 생활이야.”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굴비는 왜요?”
“굴비가 무슨 죄가 있어? 상하기 전에 먹어 치워야지. 김 형사, 굴비 실하더라. 폐기 처분 서류 작성하고 골고루 나눠 먹어. 나는 됐다.”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왠지 서정호가 무척 유연해 보였다.
사실 이것도 법을 어긴 것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버려야 할 굴비 유용했다고 떠벌리는 놈이 좋은 놈일 리 없었다. 때론 평생 지은 죄라곤 바늘 하나 훔친 것이 다인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형님, 부탁드립니다. 갑시다.”
밤하늘 공기가 서늘했다.
모든 걱정을 덜은 신현수와 민정호도 개운한 표정이었다.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겠지만 전문 병원 입장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이사장님, 어떤 불법이 있더라도 계약 파기는 대안이 아닙니다. 이제는 빠른 공사 재개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걱정 말아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 한통속일지 모르지만 건설사도 확실하게 대처할 겁니다. 손해는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현실적인 타협이었다.
김지훈이 기지개를 폈다.
‘현수 말이 맞네. 지금 와서 건설사를 바꾸면 종합 병원이 언제 완공될지조차 알 수 없겠지. 책임 확실하게 지고, 피해자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오랜 기간 속을 썩였던 일이 손을 떠났다.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젠 크게 한 번 외치고 다시 본래의 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하는 일만 남았다.
카르페 디엠!
연락도 없이 늦게 들어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던 고경아도 부드럽게 넘어갔다. 하긴 일중독에 가까워 문제긴 하지만 바람 안 피우고, 쉬는 날이면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긴 했다.
가끔은 용서해 주자.
***
일상으로 돌아왔다.
서정호 말대로 사고에 관한 일은 일체 신경을 끊었다. 오상철을 비롯해 누구에게도 연락이 없었지만 폭풍 전의 고요일 것이다. 사고 조사 때문인지 아직도 복구되지 않은 사고 현장을 볼 때마다 초조하긴 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는데 이제 좀 편해지려나? 공사만 다시 시작되면 후련해지겠지.’
물론 한덕식 환자를 진료할 때도 사고 처리가 떠오르긴 했지만 십이지장루 해결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혹, 환자에게 소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철저히 입원 환자 상태를 살폈다.
그 탓에 몸은 여전히 바빴다.
게다가 이제야 마음고생 조금 덜었는데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한 가지 중대한 목표가 눈앞에 다가왔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일이었다.
서도훈이 차트 하나를 들고 왔다.
“무슨 환자야?”
“췌장암 1기 환자입니다. 건강검진에서 운 좋게 발견됐는데 휘플을 해야 합니다. 주변 전이가 없어서 딱 좋은 케이스라고 판단됩니다.”
“라파로?”
“예.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합니다.”
맡은 분야의 특성상 가장 수술이 적은 서도훈이었다. 남는 시간에 빈둥거리지 않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간 이식부터 복강경 수술까지 최대한 참여했다.
목적은 하나, 실력 향상이었다.
그렇게 휘플 라파로를 꾸준히 준비했고, 마침내 시도할 자신이 생긴 것이다. 결코 무모하게 도전하는 성격이 아니기에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검사 결과를 확인했다.
췌장 머리 부분에 1센티미터 정도의 종양이 보였다. 주변조직에 전이됐다는 징후는 없었고, 환자의 전신 상태를 알리는 혈액 검사도 나쁘지 않았다.
‘정말 운 좋은 환자네.’
“환자에게 동의는 구했어?”
“선생님께 먼저 말씀드리고 동의를 얻을 생각입니다. 첫 시도인데 직접 집도하셔야죠.”
“내가?”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써전에게 먼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번에는 원하셔도 메스를 넘기지 않을 겁니다.”
써전은 자존심 하나로 먹고산다.
다른 외과 수술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가와 대우에도 불구하고 일반외과를 선택하고,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좋은 면이 있는 반면 역효과도 나기 마련이었지만 그런 면에서 서도훈은 정말 훌륭한 써전이었다.
김지훈 역시 준비된 써전이었다.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좋아. 날 잡고 환자 만나자.”
“죄송하지만 제가 외래 보는 날로 잡겠습니다. 시간 내주십시오.”
“당연하지. 나도 미안하지만 수술 결정되면 내 환자다. 집도만 하고 빠질 수는 없어.”
“케이스 보고 때 일 저자로 올리겠습니다.”
“집도한 사람이 일 저자여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그건 쓰는 놈 몫이다. 케이스 몇 개 모아 제대로 터트려. 지금까지 해 온 게 있는데 췌장 파트 대가라는 소리 들어야지.”
김지훈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첫 시도일지 모를 휘플 라파로에 관한 한 모든 실적과 뒤따라오는 명예를 서도훈에게 양보한다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대가가 되고 싶을 텐데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대부분 자기 이름을 못 올려 안달인데 정말 본받아야 할 선배다. 예전 병원이 대우는 비슷했지만 훨씬 편했는데 자리 박차고 나오길 잘했어.’
때때로 드는 생각이었다.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언젠가 마지막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이루지 못할지언정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과 성취감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고도 남았다.
서도훈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서도훈이 사라지자마자 김지훈이 허겁지겁 자료 한 무더기를 꺼냈다. 후배가 선배를 믿고 집도를 부탁한 이상 절대 실패할 수 없었다.
‘휘플에 필요한 라파로 기구를 정리해 둔 자료가 어디 갔지? 유문을 보존한 휘플 수술도 다시 검토해야 하고 바쁘다, 바빠.’
의사 본연의 일이라지만 반복되는 일상도 버거울 판인데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이 생겼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복에 김지훈 자신도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