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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33화 (1,233/1,329)

19화

말 몇 마디로 넘어갈 일이었으면 애초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을뿐더러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차이가 있군요. 죄송하지만 엄중한 조사를 요청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부원장님, 경찰에게 조사받는 것처럼 모든 자료를 보여 줄 수도 없는데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도 자존심이 있고, 내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일하고 있습니다.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런 일로 불안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가신다면 역으로 무고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감리 담당자가 치고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가장 약한 부분인 인간적인 감정에 호소했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가장 꺼려하는 법적인 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공무원은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 책임을 다했다는 공식 결과가 나오고, 근거 없는 고소 고발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면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지훈은 민정호가 건넨 자료의 정확성을 믿었다. 게다가 공무원이 뜻하지 않은 힌트를 주었다.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그럼 그 방법을 택해도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이네. 무고죄는 근거가 없을 때 적용되는 얘기니까 신경 쓰지 말자.’

당당해야 했다.

민정호가 슬쩍 눈길을 주었다.

다들 발뺌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보이는 것이 어떻겠냐는 눈치였다. 그만큼 자료에 신빙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자료를 내밀면 당황할 수도 있지만 작업자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사실 정도는 알 텐데 이런 반응을 보인다? 대비책이 있는 것이 아니면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당장은 불리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책임을 인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떤 증거도 될 수 없는 사적인 조사에 불과했다. 더구나 가진 패를 보이면 얼마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이런 일에 있어서 민정호는 몰라도 자신과 신현수는 아마추어임을 잊지 말아야 했다. 말이 길어지면 실수하기 마련이었다. 자칫 상대의 수에 말려 진실을 밝히기도 전에 혼란스러운 상황만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고죄까지 언급하시다니 목소리만 높아질 것 같군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다시는 이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정확한 조사를 원할 뿐입니다.”

김지훈의 시선이 감리와 공무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고 있으니 핑계 대지 말고 책임을 지라는 눈빛이었다.

일방적인 해명과 핑계가 이어졌지만 김지훈은 요지부동이었고, 신현수와 민정호 역시 인상을 찌푸린 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제자리를 맴맴 맴돌았다.

오상철이 눈가를 찌푸렸다.

‘무고죄까지 언급을 했는데 동요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아? 저놈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 걸까?’

여러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고소 고발을 숱하게 당했고, 적당한 선에서 무마시켜 왔다. 그러나 안전사고가 난 이상 동일하게 취급하기 어려웠다.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단순한 민원 정도로 끝나면 좋지만 김지훈의 태도가 워낙 완강해 재조사에 들어갈 가능성 또한 배제하기 힘들었다. 이대로 끝난다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마지막 수단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외 없이 성공했고, 대부분의 상대가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였다. 단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김지훈이 어떤 인간인지 애매모호하다는 점이었다.

‘신 이사장은 공사 재개에 관심을 두고 있고, 민정호는 직책상 현실적인 사람이 분명해. 그런 사람들과 함께 나왔으면서도 다른 사람 일에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목적이 뭘까?’

찬찬히 김지훈을 살폈다.

분명 감리와 공무원의 직무 유기를 확신하고 있었다. 병원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작업자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반박하기 힘든 증거를 제시하면 상당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대화 내내 구체적인 사실을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의 눈에는 시간만 질질 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원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초대하지 않은 민정호가 참석한 이유도 의미심장했다. 병원 행정부원장이라면 누구보다 돈에 민감할 테고, 많은 병원이 고가의 의료 기기를 구입하며 수수료를 받는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다시 말해 은밀한 뒷거래를 담당하는 인물이라는 얘기였다.

신현수는?

재단 이사장이다.

의료 재단이 아무리 비영리 법인이라고 해도 수익을 내 돈을 벌어야 하는 점은 여타 재단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사장 또한 당연히 자신의 몫을 챙기려 할 것이다. 성인군자라면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 행정부원장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었다.

물론 한몫 챙길 기회가 될 수 있는 공사 계약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법 큰 액수가 드는 사업이라 내부적으로 무슨 짓을 했을지 몰랐다. 재단 규모를 감안할 때 백억짜리 공사에 몇억 더 붙이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놈 없지.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세게 나올 때는 결국 원하는 바가 있다는 얘기야. 정말 책임 규명만을 원했다면 벌써 뛰쳐나갔어야 했어.’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앞에 앉은 세 명을 평가한 오상철이 슬쩍 얼굴을 비비며 눈가를 굳혔다. 결정적으로 사장 자리가 눈앞에 있었다. 승진에 치명타가 될지 모르는 사고가 났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처리해 위기 대처 능력을 보여야 했다.

‘제길! 실적만 조금 더 쌓으면 되는 상황에서 이게 무슨 꼴이야? 이 일이 커지면 유 상무 그 자식이 사장이 될 수도 있어. 그 꼴을 보느니 차라리 사표를 쓰는 게 낫지.’

조급함이 성급한 판단을 불렀다.

자신이 아는 세계의 규칙을 믿었다.

다들 양심적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대다수가 돈 앞에서는 무력했다. 오히려 그것이 능력인 양 큰소리를 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오상철 자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일감을 주는 대가로 하청, 재하청 업체에서 돈을 받았고, 감리에게 접대까지 받았다. 거꾸로 공무원에게는 일종의 급행료를 준 덕분에 빠르게 공사를 진척시킬 수 있었다. 사고만 나지 않았으면 아무 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공해 왔다.

그것이 세상 이치였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오상철이 태연한 얼굴로 웃으며 슬며시 상자 두 개를 밀었다. 미처 민정호 몫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두 명이 통과되면 남은 한 명은 자동적으로 따르게 돼 있었다.

김지훈이 눈을 크게 떴다.

긁어 부스럼일까?

생각대로 약발이 먹힐까?

“이게 뭡니까?”

“오늘은 분위기가 좋지 않아 유감입니다만, 공사는 진행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침 굴비 세트 좋은 게 나와서 겸사겸사 오해를 풀기 위해 마련했습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성의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고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굴비를 가져올 자리가 아니었다.

돈이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뇌물! 내가 공직자도 아니고, 부정 청탁인가? 어쨌든 이쯤에서 넘어가자는 말이겠지?’

신현수와 민정호가 본능적으로 손을 저었다.

받는 것만으로도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틀어질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약점을 잡혀 도리어 질질 끌려 다닐 가능성이 높았다.

‘받는 순간 우리도 공범이다.’

즉시 거절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때 김지훈이 쓰윽 손을 뻗어 막았다.

무슨 생각인지 굴비 세트를 보며 말이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후에야 입을 열었다.

“굴비라니, 잘 먹겠습니다.”

신현수와 민정호가 당황했다.

“김 부원장!”

“성의인데 사양할 이유가 있나?”

너무 태연했다.

굴비만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할 바보는 없었다. 돈 버는 일만큼 돈 쓰는 일을 잘하는 김지훈이 돈에 욕심을 내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상철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돈을 원했던 놈은 따로 있었어. 재단 이사장과 행정부원장 이상의 실권을 잡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앞으로 상대해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으니 골치 아프겠지만, 그래야 이 바닥에서는 잔챙이야.’

몇억, 몇십억짜리 공사는 쳐다보지도 않는 건설사의 상무였다. 제아무리 권한이 세도 병원 내 위치에 불과했고, 돈 몇 푼에 침을 질질 흘리는 의사 나부랭이일 뿐이었다.

“이제야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것 같군요. 식사하시면서 못다 한 대화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이쪽 사람들이 의리 하나는 끝내줍니다. 감리, 안 그래?”

“그럼요. 한 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가는 게 우리 신조 아닙니까? 분야가 달라도 언제 또 만날지 모르고요.”

분위기 확 풀렸다.

고소 고발 건은 집어치우고 웃고 즐기며 자연스럽게 해결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정작 굴비를 받아 든 김지훈이 정색을 했다.

“그렇습니까? 죄송하지만 식사는 어렵겠습니다. 가급적이면 이런 자리도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의외였다.

일 차 마친 후 룸살롱으로 이어지는 이 차까지 쭉 달리는 것이 통상의 코스였다. 돈 받아 든 놈이 거절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오상철이 내심 비웃고 말았다.

‘쪼잔한 놈! 정작 돈을 받고 나니까 겁이 나는 거야? 죄지은 기분이 들면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지. 역시 돈을 주길 잘했어.’

어쨌든 약점 하나 손에 쥐었다.

무엇보다 고소 고발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확실한 말을 듣지 못했어도 결론이 난 것과 다름없었다. 가끔 정의의 사도인 양 이상한 짓을 하는 놈들이 있었지만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리지 않은 이상 뒤탈이 생길 돈도 아니었다. 이제 깔끔하게 정리하고, 공사 재개에만 신경을 쏟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바쁘신 모양이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최대한 빨리 공사를 재개하는 일만 남았군요. 우리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것도 인연인데 이런 자리를 피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한배를 탄 꼴 아닙니까? 하하하!”

한배라는 말에 유난히 힘을 주었다.

엉뚱한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가 분명하건만 김지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잘 먹고 갑니다. 민 부원장님, 굴비 챙기세요.”

민정호가 조용히 굴비를 받아 들었다.

어색해하거나 당황한 기색이 하나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오상철이 더욱 확신을 가졌다. 정작 민정호 본인은 김지훈에게 묻고 싶은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말이다.

김지훈이 걸음을 재촉했다.

식당에서 나오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신현수나 민정호나 입이 근질거려 죽을 판이었지만 김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문제의 상자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단 뭐가 들었는지 확인부터 해 보자.”

딱 한마디만 했다.

부원장실에 모여 굴비 세트를 풀었다.

상품권이 보였다.

‘왜 말리지 못했을까? 이걸 어떻게 한다.’

신현수와 민정호가 한숨을 쉬는 순간 김지훈이 허겁지겁 풀어 헤쳐졌던 보자기를 꽁꽁 싸맸다. 그렇게 눈치를 줘도 태연히 받아 들었으면서 이제 와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말이다.

신현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와서 뭐 해? 고발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받은 거야? 오 상무 얼굴 보니까 꼬투리 단단히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 어떻게 할 거야?”

“생각이 있으신 것 같아서 들고 오긴 했는데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거겠죠?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설마 굴비만 들어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김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그럼 받은 이유부터 설명해 주시죠.”

“고소 고발을 꺼냈을 때 두 분 반응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름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우리만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알았고요.”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면 뭐 해?”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내 말부터 듣고 판단해. 사실 끝까지 발뺌할 줄 알았지, 오늘 자리는 기대하지도 못했어. 그런데 먼저 연락을 했다는 사실에 번뜩 떠오르는 게 있더라고.”

“뭔데?”

“입막음용 돈이야. 만일 내 생각대로 돈을 마련했다면 중대한 잘못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신 이사장, 원래 켕기는 놈이 돈을 주는 법이잖아? 굴비 세트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오상철 상무부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고소 고발을 두려워한다는 소리 아닐까?”

“그러니까 먼저 만나자고 했겠지. 하지만 돈 주고받는 것은 별개 문제야. 무고죄가 아니라 이걸로 시비를 걸어도 할 말이 없잖아.”

“별개 문제일까? 고소 고발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들이 죄 하나 더 지은 것만은 분명해. 주변을 개판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용서할 수는 없지. 우리를 돈에 넘어가는 사람으로 봤다는 사실에 자존심도 상하고 말이야.”

“그래서?”

“지금 바로 해결해야지.”

눈가를 굳힌 김지훈이 휴대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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