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한덕식 환자가 십이지장루 검사를 받았다.
부축 없이는 걷기도 힘든 상태로 검사실을 오간 탓에 땀을 뻘뻘 흘렸다. 하지만 결과가 무척 좋다는 소리에 모두들 기뻐했고, 곧 물이라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운동 의지까지 생겼다.
“아버지, 또 걸을 수 있겠어요?”
“걸어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경철이 찾아와 십이지장루를 씻어 낸 후 적정한 걷기 운동을 권유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복도를 왕복만 해도 충분하다는 말에 시간을 재며 일어나려는 순간 오만석이 와 똑같은 치료와 말을 반복했다.
“고경철 선생님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럼 말 나온 김에 복도 한 번 도시죠. 첫날이니까 무리하지 마시고요. 욕심내서 좋을 일 없습니다.”
한 바퀴 돌았다.
기운이 쭉 빠진 환자가 물을 축인 거즈를 입에 물고 잠을 청했다. 얼마 후 점심 식사 시간의 부산함에 눈을 뜬 환자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갈증에 이은 식욕이었다.
그때 김지훈이 나타났다.
오만석, 고경철과 함께였다.
“환자분, 혹시 배고프다는 느낌이 드세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 속을 썩이더니 회복이 정말 빠르시네요. 검사 결과가 상당히 좋다는 말 들으셨죠? 오전에 걷기 운동은 하셨고요?”
“예. 한 번.”
“오랫동안 누워 계셨었습니다. 오늘은 한 번으로도 충분하니까 조급해하지 마세요. 어디 배 좀 볼까요.”
김지훈이 신중하게 복부 진찰을 한 후 눈길을 주자 오만석과 고경철이 재차 진찰했다. 미약하지만 규칙적으로 들리는 장 소리에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만석 선생, 어때?”
“시작해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물 시작하자. 고경철 선생, 어떤 상태에서 허락해야 하는지 잘 기억해 둬.”
보호자가 다소 당황했다.
“정말 물을 드셔도 됩니까?”
“평소 환자분 체력과 의지가 대단하셨던 것 같네요. 한 모금씩 천천히 드셔도 됩니다.”
단순한 물 한 모금이 아니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겐 퇴원해도 된다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맸던 때를 생각하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눈가를 붉히는 보호자들을 보던 김지훈이 어깨를 흠칫거렸다. 이러다 밥 못 먹는다며 오만석과 함께 부랴부랴 병실을 나갔다.
아들이 입술을 모았다.
‘부원장님이라고 했지?’
마음의 여유가 생긴 덕에 이제야 아버지를 치료한 의료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숨 쉬고, 걷고, 물을 먹게 된 것은 오직 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부원장이 분명한데 부원장 같지 않은 의사, 전문의가 분명한데 중환자실에서 밤을 새우는 의사, 그들과 함께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전공의와 간호사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부끄러웠다.
생면부지의 환자를 살리고자 그토록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했었다. 회사의 입장이나 말, 함께 사고를 당한 작업자들의 태도, 다른 가족이 보였던 돈에 대한 집착, 남편을 잃어야 할지도 몰랐던 어머니까지 모든 상황이 새롭게 다가왔다.
오직 아버지만 걱정했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그때 한덕식 환자가 아들의 손을 잡았다.
“이젠 집에 가야지.”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걱정 하지 말고 출근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굵어진 마디에 투박해진 손으로 궂은일 한번 해 본 적이 없는 아들의 손을 잡은 채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다. 평생 막노동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등이 휘고, 허리가 굽었는데도 말이다.
아들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가 원해서 그런 삶을 택한 게 아닐 텐데, 난 왜 창피해하며 불평만 했을까?’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냥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아들이 숨죽여 울었다.
아버지는 등을 토닥였다.
“네 잘못 없다.”
때론 서먹하기까지 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이제야 자신의 속을 내보였다. 때론 큰 위기가 가족을 하나로 만드는지도 몰랐다.
이번 일이 가족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
김지훈이 모처럼 일과를 빨리 끝냈다.
마지막으로 직접 한덕식 환자의 십이지장루를 세척한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만 먹어도 소화액이 다량 나오는 상황인지라 미음을 시작하면 어떤 영향을 줄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장 기능이 점점 좋아지면 소화액이 십이지장루를 통해 배출될 위험이 줄어들겠지만, 이삼 일 정도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하는 게 좋겠어.’
끈기를 갖고 노력하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매달리고 싶었지만 치료해야 할 환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오만석과 고경철을 믿었다.
동시에 스스로의 의지를 끌어 올렸다. 지시만 내리는 선배가 아니라 함께 노력하는 선배일 때 후배들도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것이다.
곰곰이 생각하는 사이 신현수가 도착했다.
꽤 피곤해 보였다.
‘현수 너도 진료하며 이사장 일까지 하는 게 힘들긴 힘든 모양이구나. 얼굴이 반쪽이 됐네. 우리 모두 힘내자.’
다들 바쁜 사람들이었다.
민정호와 함께 곧바로 출발했다.
김지훈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 죽겠는데 왜 이렇게 편안해 보이지? 고소 고발 건이면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잖아?’
“신 이사장, 무슨 말이 나올까?”
“지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올 일이 아니야. 무슨 말을 하든 김 부원장이 항상 강조하는 것처럼 원칙을 유지하면 잘 대처할 수 있지 않겠어?”
“그야 그런데.”
“민 부원장이 만든 자료는 봤어?”
“봤어. 정확성 여부를 떠나 어떤 구속력도 없는 자료야. 섣불리 들이밀다 역으로 당할 수 있어. 참고만 해.”
‘우리 중 가장 냉정하다고 해도 예전이었으면 나하고 비슷한 감정을 느낄 텐데 많이 변했네. 침착해진 건가? 자리가 사람을 만들긴 만드는 모양이야.’
민정호 역시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다들 침착한데 난 왜 이러지?’
자료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흥분한 쪽이 불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꾹꾹 눌러 참았다.
무슨 말이 나올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비책을 고민하던 김지훈이 잔뜩 인상을 썼다. 침착하려면 할수록 왠지 초조하기까지 했다.
문득 손일석이 떠올랐다.
신현수나 민정호와는 또 다른 반응을 보였을 것이 빤했다. 미리 상의를 했으면 예리한 촉으로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정훈이가 아파 난리가 난 상황이라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이젠 다른 아이들과 똑같잖아. 일 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사는 애도 많은데 호들갑은.’
늦둥이를 얻은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실 고경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와중에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근방에서 가장 비싸다고 소문난 식당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공적인 자리다. 사고를 당한 작업자만이 아니라 우리도 피해를 본 이상 절대 감정적인 호소와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된다.’
마음 굳게 먹으며 전의를 다졌다.
신현수와 민정호는 여전히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고소 고발이란 소리를 가장 먼저 꺼낸 김지훈이 전면에 나서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예약된 방으로 안내받았다.
김지훈이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상철 상무와 하청, 재하청 업체 대표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감리 담당자와 해당 공무원이라는 소개에 갑갑한 느낌이 들었다.
‘껄끄럽네.’
“자! 앉으시죠. 좋은 일로 보는 자리가 아니지만 앞으로 좋은 인연을 쌓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루 종일 환자 보느라 힘드셨을 텐데 식사부터 하실까요?”
김지훈이 신현수에게 슬쩍 눈길을 주었다.
비싼 밥 먹고 체할 일 없었다.
바라는 바가 모두 충족돼 원만하게 자리가 끝나면 그때 먹어도 늦지 않았다. 물론 웃음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자리였지만 말이다.
신현수가 정중하게 사양했다.
“간단한 음식을 시키는 것은 상관없습니다만, 식사는 대화가 끝난 후에 했으면 합니다. 술도 사양합니다.”
“어색함부터 풀어야 대화가 잘될 텐데 아쉽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확실한 책임 규명과 재발 방지를 말씀하셨는데 회사로서는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입장입니다. 다만 일부 문제는 우리 권한이 아니라는 사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극단적인 상황까지 말씀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공사가 지연되면 병원 측도 상당한 손해를 입지 않습니까? 재개 명령이 떨어지는 즉시 시작하려면 어떤 잡음도 발생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지만 여기까지 오게 만든 핵심적인 사안이 빠졌다. 가장 확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답을 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이 나섰다.
“지금 말씀은 우리가 원하는 답이 아닙니다. 이미 사고가 났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관계자분들의 말만 믿고 무작정 공사를 재개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는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이해합니다. 사고가 난 부분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적극적으로 원인을 찾았고, 상당 부분 공식 조사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오상철이 하청 업체 대표들을 보았다.
마치 입단속을 하는 것 같았다.
“일단 야간작업 때 관리 감독이 미흡했던 점 인정합니다. 우리 대표들도 깊게 반성하고 있으며, 책임질 일이 있으면 감수할 것입니다. 아울러 사고를 당한 작업자분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취할 예정입니다.”
예상을 뒤엎고 안전 조치 미흡을 인정했다. 대화가 잘 풀릴지도 몰랐지만 감리 담당자와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것뿐입니까?”
“이런 말씀 드리기 어렵지만 작업자 과실도 상당합니다. 그동안 한덕식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아 확인하지 못했지만 다른 두 명은 이미 일정 부분 인정한 상태입니다.”
“결국 공동 책임이라는 말입니까?”
“공동이라기보다 과실 비율을 정확하게 가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작업자분들의 입장을 이해하지만 회사로서도 무조건 양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피해자들이 인정한 이상 반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고를 축소하거나 책임을 면하고 싶은 전형적인 대처에 입이 썼다. 더구나 듣고 싶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작업자가 일을 진행해야 하는지, 중단해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을까? 지시를 따른 것 자체가 과실이란 말인가? 다음 말에 답이 있겠지.’
“그 부분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안전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위험한 공사와 작업자 과실을 예방하기 위해 감리와 공무원의 감독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신 이사장님께 들어 무엇을 우려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떤 말을 들으셨는지 몰라 직접 두 분을 이 자리에 모셨으니까 오해를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지훈의 눈이 매서워졌다.
신현수와 민정호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
감리 담당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무 일지를 비롯해 서류 몇 장을 꺼내며 자신은 직무를 정확하게 수행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야간작업 역시 사전 통보 없이 진행돼 애초 책임이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자신이 왜 병원 관계자들에게 해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김지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애초에 떳떳했다면 이런 자리에 나올 필요조차 없었겠지만 당신은 이미 몸으로 말하고 있어. 고소 고발이라는 소리에 겁을 먹은 이유가 있겠지.’
책임 소재가 거론될 때마다 하청, 재하청 업체 대표들이 불안한 기색과 동시에 불만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공무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련 자료는 모두 경찰에 제출했습니다. 솔직히 고소 고발이란 소리가 나와 많이 당황스럽지만 이쪽 일을 잘 모르시는 분들이 흔히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에 처음 겪는 일도 아닙니다. 어쨌든 불미한 사고가 나 저도 많이 괴롭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철저히 감독해 종합 병원이 무사히 완공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김지훈이 지그시 이를 물었다.
아무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민정호가 건넨 자료는 작업자들의 증언이 대부분이었지만 분명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전조치를 무시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됐음에도 시정된 적이 없다고 했다. 감리와 공무원에게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당사자 앞에서 하기 힘든 말이지만 이대로 지나간다면 결국 같은 사고가 무수히 되풀이될 것이다. 인간적인 감정은 접자.’
의사 이전에 병원 운영을 책임지는 부원장으로서 이 자리에 섰다. 종합 병원 공사 중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을 덮는다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김지훈의 입장은 명확했다.
물러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