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31화 (1,231/1,329)

17화

오상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들 그만해. 언제까지 싸울 거야? 지금은 일 처리만 생각해. 감리, 당신은 지금처럼 야간작업 위험성을 적당히 섞으면서 작업자 과실이 훨씬 크다고 계속 밀어붙여.”

“상무님, 우리 하청 업체 입장은 생각 안 하십니까? 공사비 중 10퍼센트를…….”

“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작업자 과실로만 몰아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그 정도 책임은 져야 다음에도 공사를 줄 거 아니야?”

“확실한 겁니까?”

“사업자 다시 내고, 공사 실적 알아서 만들면 되잖아?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피차 곤란하게 하지 말자. 내가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데 피해 보상금 일부를 주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내가 상무로 끝날 것 같아? 평생 변변치 못한 회사가 주는 하청이나 받고 살래?”

조용해졌다.

잘나가는 상무이사의 말에 토조차 달지 못했다. 만에 하나 오상철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는 감리 문제는 완전히 덮고, 하청과 재하청 업체가 일부 책임을 떠안는 것으로 끝내자는 분위기가 좌중을 지배했다.

이미 법과 양심을 버렸다.

그마저도 사장들은 쏙 빠져나갈 것이다.

최악의 경우, 누군가 사법 처리가 돼도 집행유예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설령 전과 경력이 문제가 된다고 해도 바지사장을 내세우면 그뿐이었다.

이 순간의 침묵은 범죄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법이 아니더라도 보편타당한 상식으로 살아가고, 자신의 일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일부일 것이다.

하기에 절망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까지 지탱되고 있는 사회,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상식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는 방증이기 때문이었다.

이 또한 강한 희망이었다.

눈가를 찡그리며 하청 업체 사장과 감리 담당자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오상철의 표정이 변했다.

유일하게 갑을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 남았다. 지역 사회에 국한한다면 대기업보다 더욱 큰 힘을 가졌는지도 몰랐다.

6급 공무원 주사다.

“팀장님, 잘 들으셨죠. 지금까지 오간 말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서로 협력해야 할 일인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우리도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라 내부 단속 철저히 하고 있으니까 서류 처리만 잘하세요. 우리가 일일이 관여하면 골치 아픈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공사 중단되면 누가 가장 손해를 보는지 잘 아시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한 가지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오상철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공손해졌다.

“또 뭐가 있습니까?”

“재단 이사장이 신현수라는 의사 출신인데, 젊어서 그런지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병원 입장에서도 손해가 막심하다고 느낄 텐데 공사 재개만 빨리 되면 끝나는 일 아니에요?”

오상철이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말씀인데 책임 소재를 포함해 이번 사고 처리를 미흡하게 하면 고소나 고발까지 한다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감리와 팀장님까지 대상입니다.”

6급 주사의 안색이 돌변했다.

“고소 고발이요? 누굴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적당히 해결하려고 했는데 문제가 또 하나 있습니다. 재단 이사장만 상대할 일이 아닙니다.”

“누가 또 있어요?”

“종합 병원이 완공되면 곧바로 부원장에 취임할 사람이라면서 현재 전문 병원 부원장인 김지훈이라는 의사에게 거의 대등한 권한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지훈?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환자 때문에 만난 적이 있는데 무척 깐깐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아본 결과 강호성이란 아이 치료부터 시작해 이번 공사에 노약자와 장애인 시설 설치를 강력하게 주장했더군요. 하라는 치료는 안 하고 사회 문제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아! 강호성! 유명했었죠. 정말 그 사람이 관여한다면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얼핏 한 번 관심을 가진 일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요.”

조사가 미흡했다.

사실 김지훈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서정호와 정훈철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김지훈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는 이들이 아니었지만 누구 못지않게 사회 정의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말이다.

민정호 또한 간과하고 있었다.

오상철이 혀를 찼다.

“한덕식 처리만으로도 골치 아픈데 별일이 다 생기는군요. 어쨌든 신현수와 김지훈 두 사람의 입을 닫아야 합니다. 병원까지 나서면 정말 골치 아플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재단 이사장에 의사라고 해서 돈 싫어하는 사람 있겠습니까? 고소한다고 이득이 되는 일도 아닌데 섭섭하지 않게 찔러 주면 입 꾹 다물 겁니다. 어쩌면 애초에 돈을 원했을 수도 있고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소 고발만은 막아야 합니다. 경찰 조사도 우리 뜻대로 마무리되는 시점인데 재조사라도 결정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6급 주사가 불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오상철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팀장님도 감리와 함께 김지훈과 신현수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최후 수단이고, 먼저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야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내가요?”

오상철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도 당사자야. 뒷짐 지고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내 손에서 벗어날 생각 마.’

“고소 대상에 팀장님이 들어가 있는데 당연한 일 아닙니까? 자신을 방어하셔야죠.”

6급 주사의 눈가가 떨렸다.

개망신당하지 않고, 자리 보존하려면 끝까지 함께하라는 의미였다. 혼자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어진 말은 더욱 섬뜩했다.

“봉투 일부분을 비워 놓겠습니다.”

뇌물로 받은 돈까지 토하라는 말이었다.

‘지금은 무조건 막아야 돼.’

아야! 소리 한 번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상철이 웃었다.

“좋습니다. 자리 만드는 대로 연락드릴 테니 시간 약속 잘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지훈이나 신현수도 사람일 테고, 큰돈 만지기 힘든 의사라는 점 때문에 마음이 놓입니다.”

‘액수가 문제네.’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한덕식 환자를 일반 병실로 옮겼다.

더 이상 생존을 위한 의료 기기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뿐더러 중환자실은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곳이기에 오히려 해가 될 상황이었다.

병실에 누운 환자를 보던 아내와 아들이 눈가를 붉혔다. 다른 환자와 함께 한 공간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아버지, 기분은 어떠세요?”

“좋다.”

여전히 탁한 목소리였지만 힘들어 보이지 않았고, 발음도 제법 또렷했다. 앙상해진 팔다리를 주무르며 천천히 대화를 이어 갈 무렵 김지훈과 오만석이 들어왔다.

“환자분, 불편한 데 없으시죠?”

“괜찮……. 흠흠! 괜찮습니다.”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부터 걷는 운동을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물을 드실 수 있으니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해야 합니다.”

갈증만큼 지독한 괴로움도 없다.

물이라는 소리에 환자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운동하려면 소변 줄은 없는 게 낫겠죠? 지금 빼 드릴 거니까 소변 통 이용하지 마시고, 화장실에서 일 보세요.”

오만석이 소변 줄을 뺐다.

주의할 점을 잊지 않았다.

“오랫동안 소변 줄을 유지했기 때문에 소변을 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무작정 참지 마시고 바로 연락하세요. 한두 번 빼면 곧 스스로 보실 겁니다.”

김지훈이 마지막으로 복부 진찰을 한 후 십이지장루가 잘 유지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소화액이 분명한 말간 액체가 거즈 일부를 적셨지만 우려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장 기능이 약한 상태입니다. 빨리 회복시키는 방법은 운동뿐이니까 잊지 마세요.”

김지훈과 오만석이 잠시 십이지장과 연결된 드레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환자에게 남은 마지막 고비이자 퇴원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열쇠였다.

아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잘 아문다면 언제 뺄 수 있습니까?”

“소화액이 주변 조직을 침범하면 안 되기 때문에 일단 조영제를 이용해 심지가 박힌 통로가 단단해졌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만일 단단해졌다면 점점 가는 심지로 갈아 끼워 통로를 좁히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살을 채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오래 걸립니까?”

이차 수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굳이 환자 앞에서 거론할 일도 아니었다.

김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 부분은 확답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아버님 회복 속도를 보면 빨리 살이 찰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긴 합니다. 아! 내일부터 수시로 우리 선생님들이 찾아와 드레인과 통로를 식염수로 씻어 낼 겁니다. 불편한 정도에 그치니까 환자분이 힘들어하셔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노력, 정성,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의사의 손길이 한 번 더 스칠수록 이차 수술을 해야 할 확률이 낮아질 것이다. 다른 수술도 아닌 휘플이기에 더욱 주의해야 했다.

회진을 마친 김지훈이 민정호를 찾았다.

한덕식 환자의 극적인 회복에 위축됐던 마음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덕분에 의료 외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도 다시 살아났다.

“어쩐 일이십니까?”

“한덕식 환자 산재 처리는 됐나요?”

“아직 처리 안 됐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책임 소재가 명확해져야 가능할 겁니다. 작지 않은 사고라 산재 신청을 해야 하는 회사가 입을 불이익이 클 테니까요.”

“환자가 신청하면 안 됩니까?”

“그래도 되겠지만 제도라는 것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나섰다가 회사 차원의 보상을 못 받으면 환자가 고스란히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까요. 도의적이라는 말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놈의 돈이 문제네요.”

“돈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한덕식 환자만 해도 퇴원 후 생계를 걱정해야 할 겁니다. 산재 보험에서 지급하는 돈이든 개인 회사 돈이든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최선입니다.”

김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산재 처리와 보상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막상 생계유지라는 소리를 듣자 책임 소재 규명을 포함해 어느 것이 우선인지 확언하기 힘들었다.

‘딜레마네. 하지만 모든 일은 원칙을 지킬 때 가장 확실하게 해결된다.’

환자와 회사 간의 합의에 개입할 자격은 없지만 그 외 부분은 분명한 권리가 있었다. 한덕식 환자처럼 산업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사장한테 연락 없었죠?”

“부원장님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잘 지냈어? 환자는 어때?)

“일반 병실로 옮겼어.”

(다행이다. 일석이가 수술한 환자는 퇴원했나?)

“아마 이번 주 중에 퇴원할 것 같아. 일석이 말로는 회사와 합의를 한 것 같대. 그 일로 전화했어?”

(겸사겸사. 건설사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 혼자 만날까 하다가 아무래도 종합 병원 건립을 추진한 사람이 있어야 얘기가 잘 풀릴 것 같아.)

“우리까지?”

(나한테 짐 하나 던져 놓고 쏙 빠질 생각은 아니지? 나 한 명보다 셋이 만나야 우리 생각이 확실하게 전달되지 않겠어? 고소 고발을 꺼낸 당사자가 빠지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야?)

불편한 자리라고 피할 일이 아니었다.

“알았어. 언제, 어디서?”

(내일 여섯 시까지 병원으로 갈게. 함께 약속 장소로 가면 늦지 않을 거야. 그럼 내일 보자.)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민정호 역시 생각이 많아 보였다.

“민 부원장님, 우리 요구는 철저한 조사와 재발 방지인데 왜 조사와 관계가 없는 우리를 만나자고 할까요?”

“단순히 고소 고발을 막기 위한 자리일 수도 있지만 복잡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잡해지다니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만의 추측일 뿐입니다. 하루 후면 의도를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선입견을 갖고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더 궁금해졌다.

솔직히 지금도 선입견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이 개입되면 객관적인 사고와 태도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꾹 눌러 참아야 했다.

‘민 부원장 말대로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솔직히 사고 처리가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으면 공사 안전하게 하라는 말 말고는 할 말도 없네.’

이대로 넘어가기엔 뭔가 찜찜했다.

만나자고 한 이유가 고소 고발 건이 분명한 이상 근거가 있어야 했다. 상대방의 태도나 말에 따라 대응도 달라질 테고 말이다.

“알아본다는 것은 어떻게 됐어요?”

“나름 애를 썼지만 한계가 명확하네요. 일단 정리는 해 뒀는데 참고하기에도 민망할지 모르겠습니다.”

‘경찰 조사도 아직 진행 중인데 우리가 조사한다는 게 애초 무리였지.’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민정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내일 깔끔하게 정리됐으면 좋겠는데 느낌이 안 좋네. 설마 내가 생각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한시라도 빨리 전문 병원의 힘, 특히 김지훈이 환자와 병원에 집중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정보가 풍부하면 그만큼 앞당겨질 것이다.

민정호가 몇 장의 서류를 남겼다.

김지훈이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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