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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30화 (1,230/1,329)

16화

중간중간 환자를 찾았다.

눈에 확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회복되고 있었다. 면회 시간을 맞추지 못해 보호자를 만날 수 없었지만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는 말을 들었다.

간호사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이송해 달라는 소리는 없었어요?”

“오만석 선생님이 이틀 정도 미루자고 하셨는데, 그 이후 별다른 말이 없었어요.”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를 보며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설령 이송을 원한다고 해도 지금은 확신을 갖고 설득해야 할 때였다.

보호자를 만났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느낌인가?’

“의식이 돌아와 정말 다행입니다만, 도리어 이송이 더 불안해진 상태입니다. 옮길 때 옮기더라도 며칠 더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나빠지시지는 않겠죠?”

“나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그런 위험 때문에 이송을 미루고 안정을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 좋아진다고 해도 십이지장 파열로 수술한 부위가 남았다는 사실 잊지 마십시오. 자연적으로 막히는 경우가 드물어 이차 수술을 해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병원에서도 수술이 가능합니까?”

“담당 주치의 선생님 결정에 달린 일입니다만, 원칙적으로 일차 수술과 이차 수술진이 바뀌는 일은 권하지 않습니다. 유리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눈가를 찡그렸다.

“완전히 회복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김지훈도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간과 폐 손상을 이겨 내고 의식까지 돌아왔지만 치료의 끝을 알 수 없는 환자였다. 파열된 십이지장이 십이지장루만으로 아문다는 보장조차 없었다.

한편으로 가족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삼 년 병치레에 효자 없다는 말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지만 실제로 환자만큼 힘든 사람이 바로 가족이었다.

게다가 타지다.

병 수발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가 엄청 불편하고, 힘들 것이다. 환자만을 생각하며 감수하라는 말을 하기엔 모든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불과 열흘이 넘었다는 사실로 무시할 일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십이지장 파열을 단순 봉합했다 하마터면 사망에 이를 뻔한 장민수까지 생각이 났다. 완쾌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전공의 때 일인데도 생생하네. 그만큼 방심할 수 없는 손상이라는 말이겠지.’

보호자는 알 권리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기한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차 수술을 하든 안 하든 경험상 절대 짧은 기간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십이지장 문제로 또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위험할 수 있다니요?”

“결코 작은 수술이 아닌 데다 전신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이차 수술을 해야 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환자에게 첫 수술 못지않은 부담이 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입을 열지 못했다.

큰 고비를 넘겼다고 여겼는데 남은 치료도 결코 만만치 않게 다가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병원 규모가 작아 불안했었다. 하지만 간 이식 전문 병원인 동시에 간 쪽 수술에 관한 한 최고라는 소리에 안심했다. 결정적으로 의식이 돌아온 데다 찢어진 폐도 잘 아물었고, 십이지장만 남아 마음을 놓은 것도 사실이었다.

오판이었다.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동시에 또 다른 부담을 느꼈다.

‘보상은 다음 문제라 쳐도 치료비 지급을 질질 끌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회사가 원하는 대로 이송을 해야 하나?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이 뭐지?’

어머니는 자신의 뜻을 따른다고 했다. 아버지 상태를 본 작은아버지는 회사를 욕하며 길길이 날뛰다 어느 순간 회사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아들이 돌연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사의 경계에 섰던 아버지가 아니라 멀쩡하게 살아 있는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만져 보지도 못한 돈에 눈이 멀어 아버지를 포기했는지도 몰랐다.

아들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불과 열흘 남짓이었을 뿐인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아버지의 회복만을 생각하는 사람의 조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선생님,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김지훈이 조용히 아들을 보았다.

어떤 생각으로 묻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답은 고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덕식 환자에게 무엇이 최선인지 자명했다.

“환자를 가장 잘 아는 의료진에게 맡길 겁니다. 단 의료진이 아버님을 치료할 능력을 갖췄고, 보호자분이 신뢰한다는 전제가 있어야겠지요.”

아들이 눈가를 비볐다.

능력이 있을까?

의사가 아닌 이상 판단하기 힘든 문제였다. 하지만 믿음과 맞물리는 순간 인정해야 했다. 다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희망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어머니만이 일말의 끈을 붙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다. 의료진 역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분들을 믿지 못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눈을 뜨게 된 것도 선생님들의 능력과 정성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어. 다른 생각 하지 말자. 불효는 이것으로 충분해.’

“선생님께 아버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기분 나쁘실지 모르지만 이송도 선생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치료를 맡기겠다는 소리입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었다.

한덕식 환자가 눈을 뜨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다시 한번 기회를 잡았고,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엄청나게 힘든 치료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의사의 책임이자 의무였다.

문득 회사와 어떤 말이 오갔는지 묻고 싶었지만 가슴속에 묻었다. 환자가 무사히 퇴원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책임지어야 할 사람이나 회사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원청, 하청, 재하청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관계 속에 각자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감리나 공무원도 할 말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무수히 반복되는 산업재해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휘말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목숨과 삶이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현수야, 난 여기서 내 일을 하고, 넌 네가 맡은 일을 잘 처리하면 보다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부탁한다. 비록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자.’

한결 개운해졌다.

어깨에 힘도 실렸다.

이송을 취소했다는 소리에 가장 힘들 수밖에 없는 오만석과 고경철도 기뻐했다. 몸과 마음 중 하나를 택하라면 몸이 힘든 쪽을 택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환자 역시 의지를 잃지 않았다.

띠! 띠! 띠! 띠!

심장 소리와 혈압이 안정적이었다.

인공호흡기의 도움 없이 스스로 숨을 쉰 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몸 구석구석 산소를 보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호흡이 강해지고 있었다.

“물… 물을 먹…….”

갈증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점점 또렷해졌고, 흐릿했던 눈빛도 점점 맑아지기 시작했다.

팔다리에도 힘이 실렸다.

실로 놀라운 회복 속도였다.

“너무 빨라 겁이 날 정도네요.”

오만석의 말에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정말 설명하기 힘든 환자였다. 하지만 의료진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 또한 확실했다. 하기에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십이지장이 남았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컨디션이 나쁘면 자연 치유를 바라기 힘들 텐데 병실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물이라도 먹으려면 운동이 필요하고요.”

“오만석 선생이 결정해.”

“제가요?”

“환자를 가장 잘 아는 의사가 결정해야 할 문제 아니야? 한 가지 의견을 내자면 당분간 고영양 요법을 유지하는 게 좋겠다.”

“다른 오더는 없으십니까?”

“없어.”

김지훈이 돌아서자 오만석이 상당히 즐거워했다. 같은 전문의라 해도 경력이나 위치에 따라 결정권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한덕식 환자 주치의는 김지훈이었고, 그동안 보인 경과가 다른 환자와 비교하기 힘들 정도인데 자신에게 모든 치료를 일임했다.

강한 신뢰였다.

‘기분 좋네.’

교수 임용은 저절로 따라오는 덤일 것이다.

김지훈도 활력을 되찾았다.

서도훈과 십이지장 치료 문제를 상의하고, 이혁원, 송진우 논문을 검토하는 내내 목소리에 생기가 넘쳤다.

이준영 교수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부원장까지 됐는데 아직도 얼굴에 티를 내고 다니는구나. 하긴 어떤 면에서는 그게 네 장점이기도 하지.’

“얼굴이 좋다.”

‘중환자실에 환자 없는 양반도 아니면서 모른 척하시긴! 무뚝뚝한 얼굴은 정말 한결같으시네.’

“걱정했던 환자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송은?”

“일단 취소됐습니다.”

“십이지장 파열 주의해.”

“바짝 신경 쓰고 있습니다.”

십이지장 파열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진하게 퍼졌다. 오래전부터 느낀 일이었지만 김지훈은 지식과 경험 어느 하나 빠지지 않았다. 비슷한 연배의 의사 중 단연 두각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제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경험뿐인가?’

자신을 앞지르려 하는 제자.

스승에겐 더없는 기쁨이었다.

기쁨이 열정으로 변했다.

김지훈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이 젊어지셨나? 왜 전공의 때 생각이 나지? 몸에 좋은 영양제라도 복용하고 계신가?’

이유가 뭐가 됐든 바라 마지않는 일이었다.

그 시간, 한덕식 환자의 아들도 바삐 움직였다. 이송을 비롯해 아버지와 관련된 일을 모두 변경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극적인 회복을 본 이후 이송을 재촉하던 가족들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눈물은 그 이상의 힘이었다.

반면 환자에게 이해가 걸린 일부 사람들에겐 날벼락 같은 상황이었다. 오직 환자의 회복만 바랐다면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일 텐데 말이다.

다음 날 저녁.

건설사 상무이사인 오상철과 하청, 재하청 업체 대표가 급히 모였다. 잠시 후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 감리 담당자와 해당 공무원까지 얼굴을 보였다.

다들 안색이 좋지 못했다.

“상무님, 죄송합니다.”

“내가 빨리 해결하라고 했지?”

오상철 상무가 얼굴을 붉혔다. 재하청 업체 대표가 입을 열자마자 짜증부터 냈다.

“한덕식 가족에게 신경 쓰라고 했어? 안 했어? 구슬리든 협박을 하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했잖아. 제길! 그냥 죽는 게 속 편한데 갑자기 눈을 왜 떠서 도대체 몇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일이 꼬였어. 꼬여도 아주 단단히 꼬였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들은 이송을 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다른 가족들 생각은 다릅니다. 잘 설득해 피해 입지 않으시도록 처리하겠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서류 하나도 언제 어디서 쓰일지 모르는 상황이야. 우리가 지정한 병원에 있어야 일 처리가 쉬워져. 협조적인 의사에게 치료를 맡기자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끔찍한 소리까지 해 대며 버럭버럭 화를 내던 오상철이 고개를 흔들며 눈가를 좁혔다.

“돈 앞에 장사 없는 법이야. 딴생각하지 못하도록 일이천 정도 더 부르고, 서류 잘 꾸며서 과실 부분 확실하게 처리해. 설마 입도 제대로 못 맞추는 건 아니겠지?”

“한덕식만 빼고 다 맞췄습니다. 남은 두 명은 이미 도장을 찍었고, 경찰에게도 사고 당시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습니다.”

“믿어도 돼?”

“믿어 주십시오.”

하청, 재하청 업체 사장이 머리를 바짝 숙였다. 갑을 관계를 넘어 목줄을 잡고 있는 건설사 상무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반면 그런 행동이 자신의 이득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할 수 없었다. 하기에 자신이 고용했던 작업자들을 돈으로 매수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먹고 먹히는 관계였다.

사람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오상철의 눈가가 찢어졌다.

“어이! 감리.”

“예. 말씀하십시오.”

감리 담당자가 쩔쩔맸다.

공사를 시행하는 건설사와 이를 관리할 감리는 대등한 관계여야 마땅했다. 그래야 부실 공사를 막을 수 있건만 역시 갑을이었다. 돈을 지불하는 자와 일감을 따야 하는 자가 맺는 전형적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거리를 줬을 때는 무난하게 공사를 진행시켜 달라는 말이 맞아. 하지만 눈에 보이는 하자까지 덮어 달라는 소리가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처리한 거야?”

“하자나 안전 조치 미흡이 아닙니다. 가설물 제대로 설치했고, 안전 장비도 다 갖췄습니다. 하청 업체에서 야간작업을 강행한 책임이 있고, 무엇보다 작업자 과실이 훨씬 많은 상황입니다.”

하청 업체 사장이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통보했잖아요.”

“통보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그럼 직접 와서 확인했어야죠.”

“뭐요?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난장판이 됐다. 사실 사고 이후 대책 회의를 하는 내내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조용한 적이 없었다.

화가 나다 못해 서글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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