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강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손일석과 민정호까지 대동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뒤늦게 들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손일석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충기 선생님이 환자 때문에 함께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신다.”
“어떻게 아셨대?”
“나 아직 안 죽었다. 말 몇 마디 나누면 김 부원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딱 감이 와요. 내 환자가 입을 꾹 다문 것도 신경 쓰였고.”
깊지는 않아도 두루두루 해박한 손일석이었다. 상황을 꿰뚫어 보는 눈이 좋고, 반짝이는 아이디어까지 곧잘 내 의논하기 딱 좋은 상대였다.
“현수가 끝까지 반대하면 어떻게 하지?”
“못하는 거지, 뭘 어떻게 해?”
“그게 다야?”
“김 부원장, 때론 실행을 못하더라도 꾸준히 액션을 취하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바짝 긴장시킬 수 있어. 여차하면 고발하겠다는 의지를 팍팍 보이면 돼. 대형 건설사라고 쫄지 말라는 법 없잖아.”
“정말 그럴까?”
“우리보다 건설사 쪽이 훨씬 손해가 커. 감리와 공무원도 분명 건설사 편의를 봐줬을 텐데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오면 혼자 죽을 것 같아? 물에 빠진 놈 힘이 얼마나 센 줄 알지? 다 물귀신으로 변할 거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듯했다.
고발을 하든 못하든 원하는 목적의 일부는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법적 책임 여부를 떠나 안전조치를 강화시킬 수 있다면 그 역시 성과가 분명했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손일석의 이어진 한마디에 가슴이 뜨끔해지고 말았다. 능력 이상의 일을 요구하는 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간과했다.
“김 부원장, 안전도 좋고, 감리나 관리 감독이 잘되는지 확인하는 것도 다 좋은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게 무슨 말이야?”
“민 부원장 입장도 생각하라고. 계약서에 안전을 강조하는 항목을 넣는 것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고, 감리가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는 일은 우리 일이 아니잖아. 민 부원장이 건설업자야?”
민정호가 불쑥 끼어들었다.
“손 교수님, 저도 동의한 일입니다.”
“민 부원장도 너무 많은 일을 떠안지 말아요. 설마 세상일을 우리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하는 게 먼저잖아요. 어설프게 관여했다가 실수하면 수습은 누가 합니까? 처음에 보았던 냉철하고, 객관적이었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
김지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맞는 말이었다.
행정의 달인이라고 생각한 탓에 업무와 상관없는 일까지 요구했다.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던 민정호였기에 더욱 미안했다.
“민 부원장님, 손 교수 말이 맞네요. 아무 생각 없이 내 생각만 강요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해내야 직성이 풀렸는데 제 능력의 범위와 한계를 알게 돼 오히려 즐겁습니다.”
“에휴!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누가 누구한테 물든 거야? 서로 짬짜미 맞아서 감동하지 말고 우리 능력 정확하게 파악합시다. 아니면 일 애매모호하게 만들지 말고 확실하게 처리하든지.”
짬짜미는 손일석과 민정호가 먼저 맞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충기 교수까지 합세해 자기들끼리 수시로 술자리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타박할 때가 아니었다.
항상 그래 왔던 것처럼 손일석의 농담 같은 말속에 숨은 진담을 곱씹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너무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안 하느니만 못할지도 몰랐다.
‘내게 어려운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울 텐데 왜 이렇게 생각이 짧을까?’
반성하는 사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앞장서 문을 열던 손일석이 한마디 툭 던졌다.
“김 교수, 현수 성격 알지? 주장하려면 제대로 해. 우물쭈물하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반대할까?”
“그럼 얼씨구나 하며 박수 칠 것 같아?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나도 고개를 흔들 거야.”
“알았어. 확실하게 말할게.”
신현수가 난감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김 교수,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지만 현실을 생각했으면 좋겠어. 사고 처리는 관계 기관에게 맡기고, 우리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최선이야.”
“신 이사장, 아까 말한 것처럼 회사가 피해자들을 회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그런 사람들의 말을 믿고 공사를 계속 맡기자는 거야?”
“이제 와 건설사를 바꿀 수는 없어. 명백한 계약 위반이 있어야 하는데 최종 결론이 나와야 책임을 물을 수 있잖아. 자칫 우리가 계약 위반으로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어. 더구나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한다면 병원 공사가 언제 재개될지 몰라.”
이미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다.
관계 부처의 재개 승인이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하루라도 빨리 공사가 시작되기를 바랄 것이다.
재단이나 건설사 모두 말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가장 유리한 해결책이었지만 김지훈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야. 감리 담당자와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 공무원이 자신의 일을 태만히 했다는 증언들이 있어. 그들 개인의 문제일까? 아니면 건설사와 일종의 담합을 한 것일까? 확실하게 책임을 물어야 해. 우리 역시 피해자니까 자격이 되잖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 감리 담당자가 일을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도 아닐 텐데 작업자들이 어떻게 알아? 결정적으로 그런 일은 조사 기관에서 해야 할 일이야.”
눈앞에 닥친 현실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는 현실과의 충돌이었다. 사실 저마다 근거가 있어 옳다, 그르다 말하기도 힘든 문제였다.
물론 명분에 있어서 김지훈이 다소 앞선다 해도 말 그대로 명분일 뿐이었다. 오히려 유리함보다 불리한 면이 더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다.
대화가 이어졌지만 제자리를 맴돌았다.
김지훈과 신현수 모두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아 언성이 높아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평행선을 달리는 것만큼 답답한 일도 없었다.
결국 손일석이 나섰다.
“자자! 두 분 다 진정하시고, 한 발 뒤로 물러납시다. 후우! 듣기만 하려니까 정말 힘드네. 우리 깔끔하게 중간에서 합의 보자.”
“중간?”
“사고 피해자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 병원 공사가 하루빨리 재개돼야 한다는 것, 책임 소재를 정확히 가려야 한다는 말에는 둘 다 이의 없지?”
“당연하지.”
“그럼 결론 났네. 신 이사장은 지금처럼 건설사에게 정확하고, 확실한 사고 처리를 요구해. 그때 전문 병원이 고발을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압박을 받겠지? 그게 김 부원장을 만족시킬 수 있는 핵심 포인트다. 이왕이면 시한을 둬서 최대한 빨리 매듭짓게 하면 제일 좋고. 김 부원장은 일단 고발을 미루고 상황 지켜보며 결정하면 되지 않겠어? 이렇게 쉬운 일을 두고 둘 다 그냥 앞만 보고 달려서 뭘 어쩌자는 거야?”
신현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편법을 쓰지 못하도록 압박을 하자는 거야?”
“그렇지. 우리 관심이 공사 재개에만 쏠린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에게도 있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리자는 말이야. 당연히 요리조리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일만 더 커진다는 인상을 팍팍 줘야겠지?”
신현수가 입을 열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 신현수와 협의에 나섰을 것이다. 특히 이런 일에 대한 경험은 비교하기도 힘들 것이 빤했다.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손일석이 툭 어깨를 쳤다.
“신 교수, 우리 병원을 책임지고 운영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야? 바로 신 이사장 아니야? 앞으로 더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이 정도 일로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 되지. 더구나 명분, 즉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어. 말 몇 마디 툭 던지는 게 더 위력적일 수도 있으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신 이사장님의 능력을 보여 주세요.”
신현수가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네. 내가 휘둘리면 피해자는 물론 우리 병원도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해.’
“고맙다. 김 부원장, 난 동의하는데 손 교수 말대로 하면 되겠어? 김 부원장의 생각 정확하게 전달할게.”
김지훈이 힐끗 손일석을 보았다.
논의 직전에 들었던 본전도 못 찾는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맴 돌았다. 그 탓에 강경하게 나가다 평행선을 달려야 했고, 결국 운신할 폭이 좁아졌다. 손일석의 제안마저 반대하다간 정말 얼굴 붉힐 일만 남을 것이다.
‘오면서 한 말로 결론이 났네. 자식이 이걸 노렸나? 하지만 이걸로 끝낼 수는 없지.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안전장치가 있어야 돼.’
“좋아. 나도 동의해. 단, 건설사든 어디든 피해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전가하거나 산재 처리를 피하려고 한다면 바로 고발 조치할 거야. 환자 한 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어. 고소 고발이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난 결코 포기하지 않아.”
“그땐 나도 칼 뺀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깡그리 찾아서 강호의 도의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려 줄게. 우리 민 부원장님도 같은 생각이죠?”
“예. 손 교수님 제안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원리 원칙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무라도 베야죠.”
“역시 우린 아삼육이야. 이런 날 골뱅이 무침에 시원하게 맥주 한잔해야 하는데 우리 동네도 아니고, 시간까지 너무 늦어 안타깝네. 어라? 김 교수, 신 이사장, 얼굴이 왜 이래? 누구 죽었어? 안 되겠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놈이 운전하기로 하고 술 먹으러 가자.”
민정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사장님과 회의를 하러 온 자리기 때문에 대리비 정도는 공금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신 이사장님, 시원하게 맥주 한 잔 사시죠.”
김지훈과 신현수가 서로를 보았다.
‘둘이 저렇게 친했어? 일석이하고 죽이 맞다니, 내가 아는 민 부원장 맞아?’
‘몰라. 나만 쏙 빼고 지들끼리 논 지 오래됐다.’
약간은 빡빡했던 분위기가 술 한두 잔으로 싹 사라졌다. 모두가 친구였고, 의견 충돌 정도로 마음 상할 관계가 아니었다.
민정호 또한 동료가 된 지 오래였다.
손일석이 외쳤다.
“강호의 도의를 위하여 건배!”
“강호의 도의 좋습니다.”
확실히 손일석과 민정호는 아삼육이 된 모양이었다. 힐끗 눈가를 찢던 김지훈이 신현수와 힘차게 잔을 부딪쳤다. 최소한의 목적은 이룰 것이라 믿었다.
‘아! 일석이한테 말려 잊을 뻔했네.’
“신 이사장, 종합 병원 개설과에 산업 의학과 하나 추가해야겠어.”
“산업 의학과?”
민정호에게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야 했지만 이런 일일수록 널리 알려 동의를 구하는 것이 마땅했다. 설명을 할 때마다 따라오는 구체적인 구상은 덤이었다.
“필요한 인력이나 수익 모델은 구미 병원과 상의하면 될 거야. 예방 의학과에서 산업 안전이나 재해 쪽을 비중 있게 취급하잖아. 공단이 있어서 경험도 풍부할 테고 말이야.”
술 먹다 말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과 하나 만드는 작업이 의사 몇 명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필요한 인력, 시설, 장비, 공간 등등 해결해야 할 부분이 무척 많았다.
더욱이 과를 유지할 수익 정도는 창출해야 하기 때문에 종합 병원 건립까지 꽤 시간이 남았다 해도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김 부원장, 많이 벌어 주는 건 참 좋은데 그만큼 많이 쓰려고 하네. 지역 특성을 생각하면 병원 이미지까지 좋아질 수 있으니까 심도 있게 상의해 보자.”
“고맙다.”
“환자만 많이 봐.”
“안 그래도 민 부원장 등쌀에 죽을 것 같다. 서면으로 월례 회의를 대신하면서 왜 별표를 치는지 몰라. 다른 과 과장들이 항의의 눈길을 보낼 때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
막 맥주를 들이켜던 민정호가 천천히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잠시 별표를 어디에 표시했는지 생각하고는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전문 병원에서 갖춰야 할 마인드가 부족하신 분이 계신 모양이군요. 김 부원장님, 일일이 찾아뵙고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헉! 왜 이래요?”
“제 등쌀까지 언급하셨는데 진지하게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전 욕먹는 것보다 종합 병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이 훨씬 두렵습니다. 해결하겠습니다.”
“에휴! 잘못했습니다. 등쌀이 아니라 식지 않는 관심과 열정으로 수정합니다.”
“그럼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사장 닮아 가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손 교수를 닮아 가냐. 강호의 도의 좋다며 무라도 베어야 한다는 말 할 때 알아봤어야 했어.”
“김 부원장, 누굴 닮아 간다거나 비슷해진다는 말은 서로 존중하고, 아껴야 가능한 일이야. 민 부원장을 단순히 행정부원장으로 보지 말고 동료, 친구, 후배로 바라봐.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어? 민 부원장, 안 그래? 내 말이 맞지?”
“동의합니다.”
이젠 아예 반말을?
절대 술기운이 아니었다.
“에라!”
김지훈이 단번에 잔을 비웠다.
벌써 속이 쓰렸다.
손일석 앞에서 재주 부린 곰이 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김지훈이 제법 술기운이 오른 눈으로 택시를 타는 신현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정호가 다가왔다.
“불안하십니까?”
“현수는 믿는데 회사를 믿지 못하겠네요. 사고가 날 때마다 어물쩍 넘어갔기 때문에 이번 일이 일어났을 텐데 확실하게 대처할까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하얀 종이 몇 장이 펄럭였다.
‘계약서? 계약에 목을 매는 민 부원장!’
마음이 놓였다.
“우리도 갑시다. 우리 모두 파이팅!”
김지훈과 손일석의 어깨가 편안해 보였다.
민정호가 미소를 머금었다.
동료의 신뢰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돌아선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