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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27화 (1,227/1,329)

13화

대학 병원급이라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대학 병원 계열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수준의 병원이 아니었다. 당장 구미 병원만 해도 서울이나 천안 병원은 물론 전문 병원과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실제 모든 요소를 고려해 의료 기관을 1차, 2차, 3차, 대학 병원으로 등급을 나누는 것이 현실이었다. 각 병원이 담당해야 할 영역이 다르고, 상급일수록 수준 높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병원인지 구체적으로 들었습니까?”

“대학 병원급이라고만 했습니다.”

보호자가 이송을 강력하게 요구한다면 의료진이 임의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기에 확실하게 인지시켜야 했다.

“이송이 가능한 상태라고 해도 아버님은 대학 병원급이 아니라 반드시 대학 병원에서 치료해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병원명까지 들은 후에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얘기입니다만 혹시 산재 처리를 한다는 말은 들었습니까?”

“그런 말은 못 들었지만 당연한 일 아닌가요?”

반드시 통보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환자와 보호자 모두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고, 아들 말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때때로 비정상적인 일이 버젓이 벌어지기도 한다.

우습게도 산재 처리를 피하는 방법은 간단해 일반으로 처리하면 된다. 병원에서 임의로 적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제때 정산만 하면 문제를 제기할 명분이나 이유가 없었다.

산재를 담당하는 고용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이런 상황을 알고도 방치하는 것인지, 예산 절감을 위해 민간의 합의에 맡기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산재 처리를 해야 할 정도의 부상이라면 무조건 산재를 신청해야 하는 것이 환자에게 유리했다. 당연히 회사는 펄쩍 뛸 정도로 손해를 입겠지만 법과 규정을 지키지 않은 대가라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누구에게도 억울한 상황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강자와 약자로만 분리해서 생각할 문제만은 아니었다. 따라서 회사와 개인의 과실 여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 역시 무척 중요할 것이다.

‘작업자 과실이 있을 수도 있지만 판단을 내리는 기관이 공정하고, 모든 사람이 신뢰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 실제 그런 기관이 있기나 한지 의문스럽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근본적인 해결은 의사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환자와 가족이 빠질지도 모르는 수렁에서 구해 내는 일이 우선이었다.

민정호에게 연락했다.

“한덕식 환자 산재 접수가 됐습니까?”

(아직 안 됐습니다.)

“이유가 뭐죠?”

(산재 처리를 하는 회사는 큰 타격을 받을 게 빤한데 어느 회사가 책임져야 하는지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누가 먼저 처리를 하겠습니까?)

“그런 면이 있었네요. 알겠습니다. 할 일이 많겠지만 산재 처리 여부에 신경 써 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회사에서 하는 보상과 산재를 통해 받는 보상은 엄연히 다르지 않습니까? 환자가 차도를 보이지 않아 그런지 환자와 가족들이 피해를 보는 일만은 막고 싶네요. 회사 쪽 분위기도 이상한 것 같고요.”

(알겠습니다.)

오지랖일까?

주제넘은 짓일까?

설령 그렇다 해도 멈출 일이 아니었다. 또한 돈이 전부가 아니기에 환자 치료에 전력투구해야 했다. 살리지 못한다면 가족이 어떤 보상을 받아도 김지훈 스스로 한동안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수시로 환자를 찾았다.

전문 병원에서 가장 심각한 환자인 탓에 중환자실에 들른 의료진 모두 관심을 주었다. 덕분에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고 대응할 수 있었다.

수술 후 열흘째였다.

바이탈이 안정을 찾았지만 의식은 호전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식물인간 같은 상태로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이대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결국 사망에 이를 것이다.

보호자도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회사의 제안과 의료진의 단호한 반대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언제 어떤 요구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병원을 옮기고 싶습니다.”

“병원은 정했습니까?”

“회사에서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보호자분들이 원한다면 저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생체 징후가 많이 안정됐다고 해도 서두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보다 안전한 상태에서 이송할 수 있도록 이삼 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몇 배의 노력과 힘이 드는 환자였다.

병원이나 의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송이 편했지만 김지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만석과 고경철도 시간 날 때마다 환자 곁을 지키며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작은 결실이 하나하나 맺혔다.

간을 제거한 부위의 출혈이 완전히 멈췄다.

복부 CT와 초음파로 확실하게 확인했다.

솔직히 기대하지 못한 결과였기에 기뻐해야 할 일이었지만 아직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환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냉정한 판단이 필요했다.

신중하게 환자 상태를 살핀 김지훈이 결정을 내렸다. 이송을 원한다고 해서 상태가 안정되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할 때 하더라도 이제는 필요 없거나 불리한 치료는 중단해야 했다.

“복부 드레인 빼자.”

드레인을 따라 길고 찐득찐득한 조직 덩어리가 딸려 나왔다. 미처 흘러나오지 못하고 고였던 삼출액의 잔해이자 이젠 염증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요인이었다.

‘빼길 잘했네.’

“폐출혈은 어때?”

“복부 찍을 때 같이 찍은 흉부 CT상 지금 바로 흉부도관을 제거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움이 많았다.

발생하고도 남았을 폐렴, 뒤따라 이어질 치명적인 패혈증까지 모두 이겨 낸 환자였다. 정말 강인한 생명력을 가져 더욱 아쉽고 미안했다.

“자발 호흡은?”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자발 호흡을 하고 있습니다. 호흡 모드를 그에 맞춰 바꿔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 고경철 선생, 이런 날이 제일 고비야. 오늘 밤은 확실하게 킵을 해야겠다.”

잘 유지되고 있는 십이지장루를 확인한 김지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드레인과 흉부 도관을 제거할 수 있을 정도로 육신을 위협했던 손상이 회복되고 있는데 의식을 찾지 못하다니 의학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유력한 원인은 뇌손상이었다. 그러나 CT와 MRI 모두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신경외과 전문의까지 초빙해 환자를 살폈지만 이상 소견을 찾지 못했다.

‘의학의 한계일까?’

답답한 일이었다.

민정호가 드디어 기다렸던 소식을 들고 왔지만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암담한 현실이 더욱 가슴만 답답하게 했다.

“감리 담당자가 현장에 오긴 했지만 대충 둘러보는 정도라 공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작업자들의 증언을 다수 확보했습니다.”

“불성실한 감리였네요.”

“그런 셈인데 경찰도 웬만한 의지를 갖지 않고서는 증명할 길이 없을 겁니다. 서류를 완벽하게 작성했을 테니 법적인 문제를 피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입니다.”

감리 담당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없는 단순 근로자들의 기억에 의존한 증언과 잘 꾸며진 서류 사이에 어느 쪽에 신빙성을 둘지 빤한 일이었다.

“공무원 쪽은요?”

“비슷한 상황으로 보이지만 중간 관리자와 감리 담당자 모두 공무원과 이해관계가 있는데 불리한 말을 하겠습니까? 고소 고발은 어려워 보입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정훈철은 약속대로 사고 현장을 보도했지만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시청 역시 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에 책임 소재를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건설사에게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와 가족을 적당히 회유해 입을 막은 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고를 축소시킬 것이다.

결국 작업자들만 피해를 입게 생겼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돼.’

“민 부원장님, 만일 우리가 고소나 고발을 한다면 경찰이든 관계 부처든 허술하게 넘어가지 못하겠죠?”

“글쎄요.”

“포기할 일이 아니에요. 우리도 엄연히 피해자 중 하나니까 공기 지연과 그에 따른 재정 손실을 이유로 건설사부터 감리 담당자, 공무원까지 모조리 고발합시다.”

민정호의 눈가가 흔들렸다.

“일이 너무 커질 수 있습니다. 손실 부분 역시 금전적인 합의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고, 그게 현실적입니다.”

“손실 보상을 위해서라도 빠르고 정확한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웁시다. 청탁이라도 좋으니 지역 신문에 추가 보도 요청을 해 지속적으로 여론을 환기시켰으면 좋겠네요.”

민정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리한 일일까?

생각해 보면 이해 당사자 모두 적당하게 합의하고 관심을 끊었을 뿐이었다. 어차피 죽고 사는 문제는 재해를 입은 작업자만이 겪는 일인데 공연히 법적 분쟁을 일으켜 봐야 골치만 아플 것이란 생각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돈으로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지만 때론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할 수도 있겠지. 우리가 불이익을 당해야 얼마나 당한다고 겁을 먹었을까?’

“알겠습니다. 단, 신 이사장님도 동의한다는 전제하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우리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고마워요. 신 이사장에게는 내가 연락해 동의를 구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미리 생각해 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병원 일입니다.”

“무슨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이 무척 많습니다. 이번은 건설 현장이지만 다른 현장에서도 끝없이 같은 사고가 발생하겠죠.”

“설마 그때마다 관여하자는 말입니까?”

김지훈이 웃었다.

“우리가 무슨 사법 기관인가요? 산업 안전과를 만들어야겠어요. 기존 예방 의학에서 산업 안전 쪽에 관심을 두신 선생님들이 계시니까 어렵지 않을 겁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는 과입니까?”

“사고 예방, 위험 물질 관리, 중금속 중독부터 근로자들의 건강관리까지 다양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뜻은 좋았다.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실행하기 어려운 제안입니다. 사업자들이 반길 리도 없고요.”

“장기적으로 보면 사전 점검과 관리가 사업자에게도 유리한 일이 될 겁니다. 게다가 건강관리 센터를 만들기로 했잖아요. 주변에 산재한 회사 직원들의 정기 검진만 확보해도 수익이 꽤 발생하지 않을까요? 물론 행정 쪽에서 발품을 팔아야 하겠지만 민 부원장님 능력과 인맥이라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네요.”

“칭찬 맞습니다.”

민정호가 눈가를 비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거리를 주는 입장이었는데 어느 틈엔가 끊임없이 일거리를 받고 있었다. 하나같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었다.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면서 이런 생각은 언제 하십니까? 아동 학대에 장애를 가진 사람부터 산업재해를 당한 사람까지 폭이 너무 넓습니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요. 오랫동안 환자를 본 탓인지 아픈 몸만 치료하면 의사의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조금씩 사라지네요. 넓게 보면 다 의료와 관계있는 일이고요.”

“아직도 치료하지 못하는 병이 무수하게 많은데, 한길에만 매진해도 부족한 직업이 의사 아닙니까?”

“말씀 잘하셨네요. 그놈의 한계가 문제입니다. 치료하지 못하면 예방이라도 해야죠. 이준영 선생님도 이미 동의하셨습니다.”

민정호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부원장님보다 더 돈과 담을 쌓으신 분인데 반대하실 리가 없죠. 뭐라고 하셨습니까?”

“좋다.”

“예? 좋다라니요?”

“좋다. 딱 그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다른 말씀이 없었다는 말은 아주 강력하게 동의한다는 의미니까 잊지 말고 머릿속에 꾹꾹 눌러 담아 두세요.”

그 스승에 그 제자가 분명했다.

어쨌든 할 일이 또 생겼다.

민정호는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미봉책을 막기 위해 고발이라는 수단을 준비해야 했다. 아울러 산업 안전과의 수익 창출의 고민까지 떠안았다.

김지훈의 일은 변함이 없었다.

한덕식 환자를 비롯해 전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 모두 무사히 퇴원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부원장으로서 그런 여건을 조성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신현수의 동의였다.

(뭐? 건설사까지 고발하겠다고? 고위급 임원들과 이번 사고를 두고 협의 중이야. 지금 와서 건설사를 바꿀 수도 없는데 일만 꼬일 가능성이 높아.)

“누구 생각인지 모르지만 환자를 회유하고, 과실을 거론하며 일종의 협박까지 하는 상황이야. 손해 보지 않겠다고 수수방관하면 같은 사고가 또 발생할 거야. 신 이사장, 이대로 넘어가지 말자.”

(그건 조사 기관에서 할 일이잖아. 공기가 지연되면 우리도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돼.)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보다 많은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 사람을 포기한다면 종합 병원 몇 개를 지어도 의미가 없을 거야.”

(후우! 만나자.)

의사와 경영자의 차이일 것이다.

고경아에게 연락한 후 바로 약속을 잡았다.

‘설득하지 못하더라도 의미 없는 일이 아니다.’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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