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오늘도 고경아는 논문과 씨름하고 있었다.
“경아 씨, 나 왔어요.”
“오늘은 어제보다 일찍 퇴근했네요. 빨리 씻고 쉬어요. 식사는 했죠?”
“구내식당 밥이 점점 괜찮아져서…….”
눈치가 백단이었다.
“목소리가 이상하네요. 무슨 일 있죠?”
김지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경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별일은 아니고 혁원이가 결혼을 하잖아요. 겸사겸사 진우 결혼 때 선물을 못해서 이참에 결혼 선물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요.”
“난 또 뭐라고. 이혁원 선생님하고 송진우 선생님이 당신을 유달리 좋아하는데 서운하셨겠네. 뭐가 좋을까요? 두 선생님 모두 웬만한 살림살이는 다 장만했을 텐데 차라리 현금으로 하는 게…….”
‘현금? 가족도 아닌데 돈백 이상을 축의금으로 낼 수도 없고, 내가 너무 크게 질렀나?’
우물쭈물!
부드러워졌던 고경아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졌다.
가끔은 부부라도 꼭 상의해야 할 일을 덜컥 저지르는 김지훈이었다. 몹시 당황하는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선 것이 분명했다.
‘이미 다 정해졌네. 도대체 뭘 해 준다고 했기에 말도 제대로 못해?’
“뭐라고 했어요?”
“그게…….”
“논문 써야 하니까 빨리 말해요.”
“냉장고 아니면 텔레비전 중에 하나를 해 준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신혼이니까 작은 걸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한숨 터졌다.
한편으로 이해가 되긴 했다.
부모는커녕 형제 한 명 없는 김지훈이 이혁원과 송진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빤히 알기에 미우면서도 탓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가전제품 버리는 것도 일인데 작은 걸 얼마나 쓸 것 같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뭐가 필요한지만 정확히 알아 오세요. 선호하는 회사와 제품까지요.”
김지훈이 입을 쩍 벌렸다.
눈빛이 살짝 무섭긴 했지만 의외일 정도로 단번에 허락했다. 게다가 직접 골라 선물한다니 황송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마님!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감격에 겨워 고경아를 안으려 하다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또 이런 일 생기면 그때는 가만 안 있을 거예요. 나하고 먼저 상의했어야죠.”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형제도 없는 당신을 형처럼 따르는 이혁원 선생님과 송진우 선생님에게 뭘 못해 주겠어요? 그래서 더더욱 나하고 상의했어야죠. 경철이 결혼할 때 내가 무엇을 해 주든 아무 말 하지 말아요.”
할 말 다 했다는 듯 고경아가 논문에 코를 박았다. 냉랭한 목소리 속에 담긴 배려와 따스함에 감동한 김지훈이 뒷걸음질로 살살 방을 나왔다.
‘마님, 더 잘할게요.’
일 저지르는 놈과 수습하는 놈 따로 있다더니, 어째 고경아가 더 대범한 것 같았다.
마음의 짐까지 덜었다.
남은 집안일을 하고, 갈수록 엄마 말을 무시하며 자는 시간이 뒤로 밀리는 희연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때론 진이 다 빠지게 하지만 누구보다 힘을 주는 존재가 자식이었다.
“아빠! 나 오늘 백 점 맞았다.”
“뭐? 우리 희연이가 백 점을? 어디서?”
“체육! 달리기 백 점이야.”
‘음! 엄마도 좋아했니?’
“와! 우리 희연이 정말 대단하네. 몇 명하고 달리기했는데 백 점이야.”
“나는 다섯 명. 다 잘 뛰었다고 선생님이 다 백 점 주셨어. 우리 선생님 최고지?”
‘그렇구나. 다섯 명 다 백 점이구나. 곧 경쟁 속에 뛰어들어야 하지만 우리 희연이 나이 때는 일 등을 가리는 것보다 모두 백 점을 받는 게 좋겠지. 우리 딸이 좋아해서 아빠도 기뻐.’
“야! 정말 좋은 선생님이시네.”
“최고라니까. 최고.”
살짝 아쉽긴 했지만 건강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몸이 아픈 아이와 공부 싫어하는 아이 중 한 명을 택하라면 누굴 택해야 할지 자명했다. 온 가슴이 아픈 것과 속상한 것은 천양지차니 말이다.
‘그래.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모처럼 주말에 일이 없는데 희연이 데리고 근처 바다나 갈까? 에휴! 원주 간 지도 너무 오래됐구나.’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실 것이다.
김지훈이 시름을 잊고 편안한 잠에 빠졌다.
팔베개를 한 희연이가 유난히 따스했다.
가족에게 힘을 얻은 김지훈이 다시 하루 일과를 힘차게 소화했고, 한덕식 환자가 걱정됐지만 오래간만에 원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바로 틀어졌다.
(오긴 뭘 와? 시간 많은 내가 갈게.)
부랴부랴 손일석에게 연락한 후 그동안 사위 노릇 제대로 못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주말을 맞이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건강해 보여 다행이었다.
물론 고성문의 날카로운 눈빛을 면하진 못했다.
힘들지도 않은지 희연이와 정훈이를 양쪽에 끼고 물고 빨며 웃음만 터트렸다. 때때로 사위들을 볼 때마다 눈이 찢어졌다.
“김 서방, 손 서방, 그렇게 바빴어?”
“죄송합니다. 학회 설립까지 겹쳐서…….”
“핑계 없는 무덤 없지. 난 학회 일과 병원 때문에 그렇게 바쁠 때도 가족에게 소홀한 적이 없었는데 세상이 변했나? 장인, 장모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무릎 꿇는 일만 남았다.
딸들은 도와줄 생각이 없는지 최문옥 여사와 수다를 떨기 여념이 없었고, 고성문은 손자들 재롱이면 된다는 듯 손일석의 아부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님, 이젠 아버님 병원이 원주에서 탑이라는 말이 들리는데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개업할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근데 왜 물어봐?”
토요일 저녁까지 눈치만 봐야 했다.
기댈 데가 있어 다행이었다.
“장모님! 어머님!”
최문옥 여사에게 준엄한 경고를 들었는지 그나마 식사 자리에서는 눈치를 덜 줘 다행이었고, 사위들이 마련한 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성문의 얼굴이 불콰해졌다.
“김 서방, 부원장 하기 어때?”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손 서방, 실무 작업이 쉽지 않지?”
“할 만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남에게 욕먹지 않는 거야. 거꾸로 말하면 욕먹는 일 두려워하지 말고, 원리 원칙대로 하면 된다는 말이기도 해. 열심히 하면 된다.”
꽁했던 마음이 풀어진 모양이었다. 이때다 싶어 김지훈과 손일석이 바짝 다가섰지만 장인어른이 고성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저리 가. 다 큰 어른들이 징그럽게 왜 이래? 희연아, 정훈아, 할아버지하고 놀자.”
“아빠! 애들 잘 때 됐어요.”
“그런가? 알았다. 알았어.”
최문옥 여사, 딸들, 희연이와 정훈이, 고성문, 그리고 김지훈과 손일석으로 서열 딱 정해졌다. 사위는 만년 손님이라는 말까지 있었는데 세상은 변했고, 서열 꼴찌는 변하지 않을 현실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즐거운 시간만큼 빠르게 지나는 순간은 없었다. 어느새 식구 셋만 남았고, 주말 내내 북적거린 집을 청소하던 김지훈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아버님, 어머님, 항상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제 곁에 있어 주십시오.’
가족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는 없었다.
***
삶을 건 싸움이 이어졌다.
벌써 수술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김지훈이 갈수록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환자의 의식이 여전히 흐릿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흔들리는 바이탈 때문이었다. 불안한 혈압, 호흡, 심장박동은 전신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었고, 그만큼 회복을 어렵게 했다.
위안이라면 수술 후 연속해서 찍은 뇌 CT상 뇌 손상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흉부 도관과 간에 연결된 드레인을 따라 흘러나오던 피가 멈췄다는 점 때문에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오만석 선생, 검사 결과는?”
“정상 수치는 아니지만 조금씩이나마 좋아지고 있습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나빠질 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수술 전에 입은 충격과 손상이 그만큼 컸단 말이겠지. 구조 순서가 달라졌다면 경과도 달랐을 거야.”
“가장 먼저 구조됐다면 회복 가능성이 훨씬 높았겠죠. 골든아워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낍니다. 사고 현장에서의 대처와 이송 체계가 점점 더 아쉬워지네요.”
“미국은 헬리콥터까지 이용하는데 정말 기대하기 어렵겠지? 병원 옥상에 그려진 H 자를 보고 싶다.”
“큰 사건 하나 터지면 혹시 모르죠.”
바람일 뿐이었다.
문득 다른 피해자 두 명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대퇴골 골절 환자는 사고 당일 이송을 했지만 동반 손상이 없어 무사히 회복되고 있을 것이다.
‘일석이가 수술한 환자는 괜찮은가?’
때마침 손일석이 중환자실로 들어왔다.
“김 교수, 아직도 제자리야?”
“바이탈도 불안한데 의식이 돌아오질 않네. 함께 수술한 환자는 어때?”
“경찰 조사에 응할 수 있을 정도로 무난한 경과를 보이고 있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얼핏 들었는데 사고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생각 안 난다고 한 것 같아.”
“큰 사고였잖아. 정신적 충격이 무척 컸을 텐데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지 않겠어? 차차 돌아오겠지.”
손일석이 입술을 모았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회진 때 자기 옆에 두 명이 더 있었다는 말까지 하면서 같이 사고를 당한 사람들 안부를 물었거든. 기억이 안 난다면서 다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사고가 나기 얼마 전까지는 기억이 나나 보지.”
“그럴까? 회사 관계자들이 면회를 온 뒤에 태도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너무 민감한 걸까? 대개 회사에서는 산재 처리를 꺼려하잖아.”
오만석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서울 병원 근무 때 산재 환자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경향이 확실하게 느껴지긴 했습니다. 회사가 받는 처벌이나 불이익이 작지 않잖아요.”
“설마!”
공장 내에서 벌어진 사고와 달리 외부 목격자가 많은 사고였다. 무리하게 처리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딴생각을 할까? 사람을, 사회를 믿고 싶다.’
무거운 가슴으로 보호자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의 눈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선생님, 아버지는 어떠십니까?”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모든 치료를 다 하고 있지만 사고 당시 입은 손상이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무척 더디지만 검사 결과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으니까 기다려 봅시다.”
아들이 눈치를 보았다.
“선생님, 혹시 대학 병원으로 옮기면 차도를 보이지 않을까요? 시설이나 장비가 훨씬 좋지 않습니까?”
환자만큼 보호자도 힘든 상황이었다.
더구나 타지였다.
지쳤을 것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의 말 한마디에도 흔들릴 수 있었다. 솔직히 대학 병원과 비교가 안 되는 병원 규모와 호전되지 않는 환자 상태를 생각할 때 불신이 자리 잡고도 남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어떤 마음인지 잘 압니다만, 중환자실에 국한하면 시설이나 장비의 차이는 없습니다. 이송하기에 너무 위험한 상태기도 하고요.”
“정말 이송이 불가능합니까?”
“무리한 일이 분명합니다. 사소한 변화에도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는데 이송 중 문제가 생기면 대처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대학 병원 중환자실을 확보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고요.”
보호자 모두 말이 없었다.
김지훈도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할 뿐이었다.
콧등을 찡그리던 아들이 김지훈을 보았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이 안전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정황이 확인됐다면서 회사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불이익이 없을 것이란 말을 했습니다. 대학 병원급이라는 말도 했고요.”
“불이익이라니요?”
“보험이 되지 않는 치료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비는 물론 보상금 외에 위로금까지 지급을 약속하지만, 경우에 따라 보험이 안 되는 치료비는 지급하지 않을 수도 있답니다.”
김지훈이 할 말을 잃었다.
손일석의 의심에 근거가 있었다.
약자인 환자와 보호자에게 가하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돈을 빌미로 과실 여부까지 거론하며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네.’
아들의 입장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중환일수록 비보험 항목이 많고, 보험이 되어도 본인 부담이 적지 않았다. 그런 치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기 때문에 상당한 비용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무사히 회복된다고 해도 일을 하기 힘들 환자였고, 이후 반드시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 보상을 해야 하는 회사가 지급을 지연시키는 것만으로도 보호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질 것이다.
반면 회사 입장은 달랐다.
인명 사고가 나면 향후 건설 수주에서 상당한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형 건설사일수록 손해가 막대해 산재 처리를 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손해를 막는 길이었다.
당장은 보호자와 합의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이 들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이 되고도 남았다. 문제는 처리 과정 중 발생할 불법과 탈법, 그리고 환자의 피해였다.
원청, 하청, 재하청으로 수많은 사람이 얽히고설켰다. 그들 모두 환자는 안중에 없고 저마다 손해를 최소화하려 할 것이다.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환자 과실을 운운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심하기 충분했다.
‘정말 환자를 위한 제안이라면 애초 안전 조치를 철저히 취해 사고 방지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겠지.’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아들의 말속에 회사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