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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25화 (1,225/1,329)

11화

김지훈이 중환자실 환자를 보며 나직한 한숨을 토해 냈다. 세상에는 다양한 직업이 있고, 사연 없는 사람 없겠지만 이상스럽게 마음에 걸렸다.

55세 남자 환자. 한덕식.

타지 사람이다.

재하청 업체에 고용돼 해당 공사가 끝날 때까지 가족과 떨어져 생활해야 하는 처지였다. 건설 노동자들의 하루 수입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타향살이만으로도 고단한 삶이었을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야간작업을 원했을까?

문득 민정호의 말이 떠올랐다.

‘공사 기간을 앞당기는 것이 이득이라고 했지?’

수당 얼마 더 받으려고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모자라 훨씬 위험한 작업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용주의 지시를 어기면 일 자체를 할 수 없는 현실이 작업자들을 위험한 환경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 분명했다. 행여 동의했다고 해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재하청, 하청을 받은 사람도 할 말이 있을지 몰랐다. 원청의 지시와 독촉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이 사람 위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 철저한 안전조치를 했어야 했고, 그마저 무리하다 싶으면 작업을 중단시켜야 했다. 자신의 밥줄과 이득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저당 잡는 짓은 살인이나 다름없었다.

삐! 삐! 삐!

인공호흡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환자의 산소 포화도가 떨어졌다.

대기하고 있던 고경철이 재빨리 튜브 속에 관을 넣어 석션을 했다. 무척 고통스러운 일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기관지 기능 저하로 인해 쌓인 가래를 제거하자 산소 포화도가 다소 올라갔다. 오랜 흡연으로 가래 색깔마저 까매 빠른 폐 기능 호전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환자 탓을 할 수 없었다.

몸에 안 좋다는 담배 한 모금, 하루 일이 끝날 때마다 기울인 한 잔의 술이 팍팍한 삶의 고단함을 덜어 주었을 테니 말이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의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환자를 살리기 위해 기울여야 하는 최선의 노력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고 발생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이런 환자가 발생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전문 병원의 숙원 사업인 종합 병원 건립의 현장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고 현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정훈철에게 연락했다.

사고 당시부터 원청 건설사 소속 상무이사라는 오상철이 하청 업체 사장들과 나눈 대화까지 전후 사정을 모두 설명했다.

(그런 사고가 있었어?)

“형님, 죄송하지만 크게 보도할 수 없을까요?”

(보도야 할 수 있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매일 사망 사고가 벌어지는 곳이 산업 현장이야. 막말로 사람들도 이력이 났는지 단 하루의 관심에 불과하고 말이야.)

“종종 크게 보도되는 사건이 있잖아요?”

(김 부원장,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사고 자체보다 특정 사람이 갖는 사연에 집중해. 그것도 특별하지 않으면 금방 잊히는 게 현실이야. 당장 의인이라고 불렸던 사람의 이름이라도 기억할 것 같아? 아마 몇몇을 빼고 대부분은 어떤 사고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걸?)

사회 전체에 퍼진 안전 불감증이었다. 혹은 사망 사고마저 가십(Gossip)처럼 생각하거나 너무 많은 사고가 벌어져 오히려 무감각해졌을지도 몰랐다.

뾰족한 답이 없다고 해서 포기할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과 노력이 모여 변화를 만들어 내는 법이었다. 실제 동일한 사고가 나도 예전에는 기사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네요. 민 부원장에게도 한 말인데 감리 회사와 공무원이 제대로 관리했는지도 취재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민 부원장이? 공무원 잘못 건드리면 무척 곤란해질 수 있어. 법대로 하자는 말 괜히 나온 거 아니야? 우리나라 법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경우가 많아. 그 탓에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면 오히려 지키기 어려운 게 현실이야. 만에 하나 종합 병원 인허가 때 발목 잡히면 어쩌려고 그래?)

진상건 때문에 소방, 위생, 시설 점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우리가 입을 피해가 두려워 눈을 감는다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일도 못 고칠 겁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벌어진다면 감수하겠습니다.”

(가볍게 생각하지 마.)

“솔직히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원칙과 법을 제대로 지킨다면 오히려 발목 잡힐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어요. 무엇보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을 하는 겁니다.”

(후우! 김 부원장 고집을 누가 꺾을까? 하여튼 고맙다. 김 부원장 같은 사람이 있어서 아직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이 나오겠지. 나도 최선을 다할게.)

정훈철과의 대화가 잘 끝났다.

언론의 의무와 역할을 굳이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사회적 책무를 잊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띠띠띠띠! 띠띠띠띠!

환자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급박했다.

흉부 도관, 복부 드레인을 통해 나오는 피의 양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술 후 이틀이 지난 지금도 바이탈이 흔들린다면 회복 가능성이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신 상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십이지장 파열 역시 해결될 리 만무했다.

김지훈이 찬찬히 오더를 확인했다.

환자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하며 혹시 빠진 치료가 있는지 철저하게 검토했다. 오만석은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았고, 고경철은 충실히 수행했다.

‘기다리는 일뿐인가?’

답답한 가슴으로 보호자를 만났다.

“선생님! 아버지는 어떠십니까?”

“아직 차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하고 있으니까 희망을 가졌으면 합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밤새 잠을 못 주무시다 이제야 잠깐 눈을 붙이고 계십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대학 병원 이상으로 잘 치료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꼭 살려 주십시오.”

아들의 눈자위가 시뻘겠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아들 역시 자신의 일과 직장이 있을 테고, 집까지 먼 상황인데 병원을 옮기는 문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경황이 없어서, 혹은 사고 처리가 진행 중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전문 병원 의료진에게 강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매달린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더 희망적인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도 열지 못할 정도로 무력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너무 답답했던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현실적인 문제를 꺼내고 말았다.

“회사 측과 만나 보셨습니까?”

“몇몇 사람이 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제게는 변명처럼 들립니다. 당장 필요한 데 쓰라며 돈 몇 푼을 주는 것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요. 사고 처리보다 아버지 회복이 먼저 아닙니까?”

“그러네요. 아버님 회복이 가장 중요하죠.”

“건설 현장을 전전하시면서도 힘들다는 내색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학교 다닐 때도 돈 걱정 하지 말라며 어머니 몰래 용돈까지 챙겨 주셨던 분입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아버지만 사실 수 있다면 집이고 뭐고 다 처분할 수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김지훈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왜 하늘은 자식, 혹은 부모, 혹은 타인에게 몹쓸 짓을 하는 사람들을 먼저 데려가지 않는지 모를 일이었다. 누구나 흠이 있고 죄를 짓지만 정도가 있는 법이고,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 쌔고 쌨는데 말이다.

상투적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버지를 살려 주세요.”

가슴속에 납덩이 하나 들어선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너무 무기력해 만사 집어치우고, 술이나 한잔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의사에게 냉정함을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환자는 단 한 명이 아니었다.

의사의 노력 여하에 따라 환자의 삶이 좌우될 수 있었다. 몇 명이 됐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치료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의사의 의무였다.

김지훈이 어깨를 폈다.

눈가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보호자분,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환자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은 선생들이 아버님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돌아서던 아들이 눈가를 훔쳤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는지 어깨를 들썩였다. 의사가 된 이유, 의사가 된 이후 노력해야 하는 이유, 끊임없이 발전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단 한 방울의 눈물 때문인지도 몰랐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간 이식 학회 창립총회가 머지않았다.

수많은 의사와 의료진이 모여 자신의 성과와 의견을 개진하는 이유는 과시나 명예를 추구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경험과 경험이 모여 더욱 수준 높은 환자 치료를 시행하기 위한 일이었다.

실무를 맡은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는 논문 지도와 작성까지 맡았다. 부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태만히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혁원 선생, 송진우 선생, 보자.”

전공의가 아닌 전문의였지만 빨간 펜을 꺼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토씨 지적처럼 쓰잘머리 없는 일이 아니었고, 함께 내용을 고민하는 과정이기에 이혁원과 송진우의 눈빛도 진지하기만 했다.

“차트 분석은 어디까지 했어?”

“거의 다 했습니다. 모두 분석한 후에 마지막 부분까지 보강하겠습니다.”

“얼마 안 남았어. 제일 저자로서 국제 학술지에 게재할 수 있도록 제대로 써. 이미 말했지만 교수 임용 때 반영할 거야. 설마 경쟁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전문 병원에 근무했다는 경력이 아니라 선생님들께서 추천하는 사람이 임용된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선생이 와도 반드시 추천받을 수 있도록 경쟁력을 잃지 않겠습니다.”

이혁원은 눈을 빛냈고, 송진우는 간만에 난로가 된 얼굴을 선보였다. 김지훈 역시 훌륭한 후배에게 당당한 선배가 되고자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논문에 집중하며 모처럼 환자를 잊었다.

한덕식 환자의 바이탈이 수시로 흔들렸을 텐데 중환자실에서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최소 환자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는 의미였고, 당직자들이 확실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 혼자 모든 일을 할 수 없는데 왜 자꾸 잊을까? 동료를 믿고 맡기면 된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모든 일과가 끝났다.

왠지 무엇인가 빠트린 것 같았다.

거의 매일 보던 사람을 보지 못했다. 자주 보면 없던 정이 생긴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더군다나 민정호가 가져올 소식이 무척 궁금한 참이었다.

채근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빈손일 수도 있지만 실망할 이유가 없었다.

‘하긴 민 부원장이 아무리 날고뛰어도 경찰이나 관계 기관도 이제 조사를 시작했을 텐데 어떤 과실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힘들겠지.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것 같다.’

무리한 일이 분명했다.

반면 자신의 말을 확실하게 책임지는 민정호는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을 것이다. 공연히 부담만 주었단 생각에 혀를 차던 김지훈이 자리를 정리하고 퇴근했다.

우연히 정문 근처에서 민정호를 만났다.

“퇴근하십니까?”

“민 부원장님도 퇴근이 늦었네요.”

“새삼 느끼지만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사람 만나는 일 쉽지 않네요. 이번 사고에 목이 걸린 사람이 많기 때문이겠죠.”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사가 가능한가요?”

“조사라기보다 알아보는 차원입니다. 그 이상의 일은 제 능력 밖이고요. 그래도 말씀하신 부분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리와 공무원의 책임 여부!

사고 현장을 바로 목격한 사람은 물론 일정 부분 책임을 가진 중간 관리자의 증언이 모두 필요할 일이었다. 제대로 관리 감독을 했는지가 핵심인데 단지 기억에 의존해야 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기대하지 않았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민정호의 능력이 정말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대단하시네요.”

“결과를 얻기 전에 들을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 고소나 고발을 하실 생각입니까?”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훈철과 똑같은 우려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인허가 걱정을 하는 겁니까?”

“알고 계셨네요.”

“내 답은 똑같습니다. 주제넘더라도 한 사람의 삶과 목숨보다 돈을 우선한 인간이 있다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어쩌면 너무 늦게 깨달았는지도 모릅니다.”

“알겠습니다.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네요. 늦었는데 어서가시죠. 그럼 이만!”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참 한결같은 무표정이네.’

표정과 태도 하나로 많은 오해를 샀고, 지금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누구보다 뜨거운 가슴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웃을 수 있었다.

물끄러미 민정호의 뒷모습을 보던 김지훈이 돌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문득 논문과 함께 이혁원과 송진우가 떠올랐다. 그리고 고경아의 얼굴이 스쳤다.

‘어후! 말 안 했다.’

일 분이라도 빨리 말해야 덜 혼난다.

김지훈이 부리나케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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