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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21화 (1,221/1,329)

7화

시간 참 빨리 흘렀다.

장애를 가진 환자에 대해 많은 생각을 들게 한 이학재 환자가 퇴원을 했다. 의사부터 간호사까지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치료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다들 건강하게 퇴원하길 바랐지만 소장 절제 후 남은 소장이 짧아 발생하는 단장증후군 증상을 보였다. 불가피한 합병증이었고, 경미한 수준에 불과해도 지적장애를 고려할 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퇴원 후 생활이 더 걱정됐다.

‘영양 상태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하는데 가능할까? 퇴원을 한다고 해서 끝이 아니구나.’

의료진만의 고민이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가장 많이 들린 말이었다.

식사 형태를 비롯해 주의할 점을 수차례 설명했지만 정작 듣고 싶은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습관이 된 것 같은 웃음과 말이 끝날 때마다 숙여지는 고개에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자신의 상태를 묻지도 않는 환자, 걱정이 태산이지만 자식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까지 안타깝다는 말 하나로 넘어가기 힘들었다.

다행히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

최종 조직 검사상 육종으로 확진돼 항암 치료가 필요 없었다. 여러 문제를 수반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치료를 면했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사람과 사회의 관심도 확인했다.

민정호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

사회복지사 역시 자신의 일과 책임을 다했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담당 복지 선생님들이 늘어 예전보다 자주 방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약된 외래 진료 날에 함께 오겠습니다. 혹시 그 전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도 환자는 물론 보호자까지 잘 보살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노력이 모여 또 다른 한 가족의 삶을 찾아 주고 있는 현장이었다. 국가나 사회 전체의 책무만 강조하는 것이 능사만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혁원, 송진우, 고경철이 이만저만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환자 덕분에 밥 먹고 사는 데다 새로운 시각까지 준 이상 오히려 고마운 일일지도 몰랐다.

“답답하고 힘든 일이 많지만 이런 느낌은 다른 어떤 직장에서도 얻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맛에 잠도 못 자며 환자를 치료하시는 것 같네요.”

민정호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경제적 보장에 더해 보람과 성취감을 주는 직장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곳일 것이다.

‘과연 우리 병원은 직원들에게 잘하고 있는 걸까? 근무하고 싶은 병원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부원장인 이상 당연히 고민해야 할 일이었다.

***

회진, 수술, 진료로 이어지는 반복적인 일과가 계속됐다. 복강경 수술 일부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수술이 메이저였기 때문에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치 못할 합병증이 발생해 재수술을 하고, 진단이 어려워 난감한 환자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어느 병원에서나 발생하는 일이었다.

핵심은 정확하고 정직한 대처였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김지훈이 김진호 교수와 함께 부원장으로서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에게 모든 진료 정보를 솔직하게 공개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치료를 제공했다.

덕분에 환자는 안심하고 치료받을 수 있었고, 브로커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직원들 또한 각자 자신의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절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병원이었다.

미래를 알리는 가시적 변화가 도래했다.

드디어 터파기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비록 가림막이 쳐져 있어 현장을 볼 수 없었지만 칠백 병상의 병원답게 공사 규모가 상당했다. 가끔 들려오는 나직한 중장비 소리가 은근히 가슴을 뛰게 했다.

전문 병원과 종합 병원은 모든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개개인의 처우가 개선되는 것은 물론 같은 직위라도 권한과 책임 범위가 달랐다. 절대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외부에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일까?

병원 전반에 걸쳐 새로운 활력이 감돌았다.

김지훈 역시 의사 본연의 일에 더욱 확실하게 집중했다. 비록 한 사람의 힘이었지만 부원장임에도 불구하고 가운을 날리는 모습에 어느 한 명 태만하지 못했다.

동시에 민정호는 단단한 발판을 제공했다.

의료진과 직원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인력 부족을 해결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여전히 비용 절감을 부르짖으면서도 사람만은 예외였다. 모든 이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지만 인정받기에 충분했다.

물론 현실을 잊지 않았다.

미래를 대비한 포석이기도 했다.

“부원장님, 종합 병원은 보다 전문적인 인력이 필요해 미리 양성한다는 취지로 충원을 해 왔습니다만,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더 이상 요청하지 마십시오.”

“같은 업무라도 신입일수록 더 힘들어해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잘 알잖아요? 절반 이상 남는다 해도 종합 병원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힘들 수밖에 없어요. 정말 여력이 없습니까?”

“월급만 비용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개개인에게 보장하는 복지부터 사대보험까지 당장 눈에 안 보이는 비용이 상당합니다. 게다가 근무 연한이 길면 길수록 월급도 늘어나기 때문에 올 한 해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단지 최대한 이득을 내는 것보다 적절한 이득을 얻을 때 우리 병원이 보다 발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뿐입니다. 종합 병원이 되면 수가 체계도 달라지니까 조금 더 멀리 보면 안 될까요?”

민정호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재정 문제를 대하는 시각이 상당히 달라졌지만 첫째도 둘째도 사람을 우선하는 김지훈이었다. 그 탓에 때론 답답해 목소리를 높이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빠져나오기 힘든 매력이기도 했다.

살짝 걱정되는 면도 있었다.

“혹시 경제권은 누가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 집 말하는 거예요? 당연히 고 과장님이 갖고 계시죠. 난 그냥 주는 용돈만 쓰고, 정 부족하면 카드를 사용하고 있어요. 근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요?”

‘그럴 줄 알았어.’

“천만다행입니다. 일어나기 힘든 일이지만 부원장님은 절대 개원하지 마십시오.”

“왜요?”

“망할 것 같아서요.”

김지훈이 발끈했다.

“내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설마 수술할 수 있는 병원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 수가 문제는 둘째 치고 전문 병원 환자가 개인 의원으로 갈 수나 있겠습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없었다.

“규모가 큰 병원마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작은 의원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수가가 너무 낮아 망하는 병원 대부분 개인 의원이지 않습니까? 비용이 적어 보여도 그만큼 수익이 적을 테니까요. 특히 부원장님처럼 환자 한 명 진료하는 데 오랜 시간을 쏟는다면 안 봐도 빤한 일입니다.”

3분 진료!

모든 환자를 오래 볼 이유가 없지만 그 이상의 시간을 요하는 환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수가로 인해 제한된 시간 내에 일정 수 이상의 환자를 보지 못하면 망하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날로 비보험 항목이 늘어나고, 때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진료비가 청구되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의사 개개인의 의식도 문제겠지만 수입을 통제하는 반면 비용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제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의료 전반을 정부의 관여와 통제 아래 두면서도 경영상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현실이 만들어 낸 진료 행태임은 분명했다.

김지훈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개원한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에휴! 반박할 수가 없네. 병원 잘된다는 홍재순 선생님도 끙끙대던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제길! 일반외과가 봉이네. 봉.’

농담처럼 시작된 말이 진심이 됐다.

답답한 마음을 달랠 겸 창가에 섰다.

어둑해진 시간에도 불구하고 환한 조명 아래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별생각 없이 바라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민 부원장님, 왜 저렇게 서두르죠?”

“계약 금액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사람이나 장비나 하루 일당이 정해져 있으니까, 공사 기간을 줄이면 줄일수록 이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하청을 받은 업체는 규모가 영세한 데다 공사비까지 깎여서 더욱 인건비를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계약한 금액이 있는데 공사비를 깎아요?”

“부실 공사의 주요 원인 중 하나지만 재하청까지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손 안 대고 돈을 벌 수 있다니 희한하네요. 뭐 그런 불합리한 법이 다 있죠?”

“영세 업체들은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를 따기 힘들어 하청 제도를 존속시켜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공사가 도면대로 확실하게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감리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현수가 한 말이 그 말이었군요. 그런데 감리를 잘하고 있는지 확인이 가능합니까?”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제때 직접 현장에 나와 감리를 하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있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사는 건축 관련 공무원들도 의무적으로 확인하게 돼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법이란 것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지키기만 해도 커다란 불상사를 막을 수 있는 절대적 수단이었다. 즉, 각자의 일을 충실하게 한다면 된다는 말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또 다른 의문을 품었다. 조명이 아무리 밝아도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중장비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야간작업이 훨씬 더 위험할 텐데 안전 장비나 시설은 다 갖추고 공사를 하는 거겠죠?”

“문제가 생기면 개원 시기가 중요한 우리에게도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어 계약할 당시 안전에 대한 조항까지 확실하게 적시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불안한 눈으로 잠시 공사장 쪽을 보던 김지훈이 급히 책상을 정리했다. 일 없을 때 빨리 퇴근해야지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퇴근합시다. 그럼…….”

똑똑똑!

‘이 시간에 누구야?’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였다.

순간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 교수, 학회 때문에 왔어?”

“이 시간에 왜 왔겠어? 자자! 혼자 죽을 수 없다던 김 부원장님은 다시 자리에 앉으시고, 슬슬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민 부원장님도 엉덩이 붙이시죠.”

“저도요?”

“창립총회 및 학회 개최 일시, 장소, 일정을 잠정적으로 잡았습니다. 따라서 예산 집행이 시급한데 누가 돈을 꽉 잡고 주질 않고 있네요. 뭐 하십니까? 앉으세요.”

채 두 달도 남지 않았다.

참가 규모가 작지 않을 텐데 그만한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 센터 예약이 늦어지면 자칫 장소가 없어 학회를 치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결국 민정호까지 붙잡혔다.

김지훈의 퇴근은 당연히 뒤로 미뤄졌다.

그나마 실무적인 문제는 빨리 해결됐다. 예산 지원을 미루던 민정호는 손일석의 핀잔을 수없이 먹은 후 약속의 도장을 찍었다.

“우리가 말할 때 바로 집행했으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고 좋잖아요. 민 부원장님, 앞으로도 비슷한 일이 있을 때 딱 한마디만 기억하세요.”

사실 얼굴은 김지훈과 진충기 교수만 붉혔다. 손일석은 타박을 하면서도 내내 웃었고, 민정호는 속마음을 숨긴 채 예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무슨 말을 기억해야 합니까?”

“우리 김 부원장이 이준영 선생님께 유별나게 많이 들었던 소리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안 듣고 사는지 모르겠네. 어쨌든 예를 들어 하는 말이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빨리 말씀하시죠.”

손일석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다 말고 표정을 확 바꿨다. 마치 이준영 교수는 핑계일 뿐 민정호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똑바로 하자.”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농담이 너무 지나쳤다.

“손 교수! 민 부원장님, 이런 말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정호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똑바로 하겠습니다.”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역시 우리가 제일 잘 통하는 것 같네. 어떻게 이런 표정으로 농담 속 진담을 건져 내는지 몰라. 민 부원장님, 다음 주에 진충기 선생님과 시간 한 번 더 냅시다. 스트레스는 풀고 살아야지.”

“좋습니다.”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시간을 낸다는 거야? 민 부원장님,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화를 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손 교수님, 진 교수님과 제 관계를 생각할 때 충분히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평소 부원장님 퇴근이 너무 늦어 함께 자리하지 못한 점은 사과드립니다.”

배신이다!

지들끼리 술자리를 가졌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지훈이 부들부들 떨었다.

가증스러운 놈, 손일석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옆구리를 툭 쳤다.

“다 네 탓이다. 허구한 날 늦게 퇴근하는 김 부원장 데리고 술 먹으면 사모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누구 한 명은 죽고, 누구 한 명은 근처에도 못 가겠지. 난 처형이 무섭고, 항상 웃기를 바랄 뿐이야.”

‘아! 왜 설득력이 느껴지지?’

김지훈이 술과 아내와 배신한 동료를 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여하튼 핑계는 그럴듯했지만 강력한 응징이 필요했다.

그때 진충기 교수가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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