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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1220화 (1,220/1,329)

6화

하나하나 정리되기 시작했다.

종합 병원과 관련된 일은 주로 민정호가 맡고, 상의나 협의가 필요한 경우에만 회의를 열었다. 굵직한 일은 모두 결정된 데다 이젠 제법 행정적인 감각이 생긴 김지훈도 일 처리에 여유를 보였다.

신현수도 이에 화답했다.

“노약자와 장애를 가진 분들을 위한 시설을 적극 설계에 반영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다행이네요.”

“이학재 환자는 어떻습니까?”

“중환자실을 벗어나긴 했지만 다들 고생이 많아요. 보호자 간병을 기대하기 힘들고, 사회복지사분의 역할도 한계가 있고요. 다인실에서 치료하기 어려워 일인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비용도 걱정이네요.”

“시청 측에 최대한 협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강호성 때만큼은 아니어도 관심을 기울일 것 같습니다. 일인실 사용이 마음에 걸리지만 비어 있는 병실로 계산하겠습니다.”

김지훈이 힐끗 눈길을 주었다.

민정호의 변화가 눈에 보였다.

돈 얘기만이 아니었다.

재정에만 온 신경을 쏟던 사람이 환자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강호성을 치료했을 무렵부터 느낀 일이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판단했는지도 몰랐다.

‘변한 걸까? 아니면 애초 이런 사람이었는데 이제야 눈에 보이는 걸까? 어쨌든 좋은 일이네.’

“공사는 언제쯤 시작할 것 같습니까?”

“한 달 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설계에 제법 시간이 걸릴 테고, 시공사를 정하는 일도 만만치 않을 텐데 빠른 거 아닌가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정 업무는 무조건 내게 맡기시더니, 이런 질문도 하고 참 많이 변하셨네.’

“선대 이사장님 때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해 기본 작업이 수월한 데다 신 이사장님 의욕이 굉장합니다. 재정만 뒷받침된다면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닙니다.”

파고들자면 모두 골머리를 썩을 일이었지만 김지훈과 민정호 모두 편안해 보였다. 각자 자신에게 부족한 점을 채우려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한때 껄끄러웠던 얘기도 스스럼없이 나눴다.

“이번 달 수입도 괜찮죠?”

“월말에 회의를 열 이유가 없겠더군요. 서면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의료진부터 직원들까지 고생이 많으니까 비용이 들더라도 어깨 처지지 않도록 신경 써 주세요. 당직비나 야간 근무 때 지원 아끼지 말고요. 그리고 학회 지원 비용은 언제 처리가 되죠?”

“곧 처리하겠습니다.”

“그 소리 저번에도 하지 않았어요? 학회장 돼야 한다고 입에 거품 물고 주장한 사람이 누구인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망신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지급해 주세요.”

민정호가 나직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많다면 많은 돈입니다. 다른 병원도 선뜻 집행하진 못할 겁니다. 제약 회사나 의료 기기 회사에서 협찬을 받으시면 순수 비용을 제법 줄일 수 있을 텐데 그쪽을 알아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김지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화장실 갈 때 올 때 다르다더니, 민 부원장님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협찬도 법적으로 허용된 수준에서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잘 알잖아요? 가뜩이나 각 병원 출연금만으로는 창립총회 치르는 비용조차 부족할 판이라 여기저기 손 벌리고 있는 중인데 법까지 어기란 말이에요? 누구 범죄자로 만들 생각입니까?”

민정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 뜻이 아니라 최대한 후원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향후 회비로만 운영하기 힘들 가능성이 높으니까 미리 생각해 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흐음! 틀린 말도 아니네. 어쨌든 우리 병원에 배정된 지원 비용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정확하게 입금돼야 합니다. 다른 문제 다 떠나 학회를 열 컨벤션 센터는 제때 빌려야 하잖아요.”

돈! 돈! 돈!

돈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만날 때마다 거의 절반 이상은 돈과 관련된 문제를 상의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내죠.”

“알겠습니다. 진충기 교수님, 손일석 교수님과 함께 학회 준비 잘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김지훈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적극적으로 움직여도 골치 아픈 건 여전하네. 다른 학회는 무슨 돈이 있어 그렇게 잘 굴러가지?’

모든 것을 새롭게 준비해야 하는 신설 학회가 으레 겪어야 할 난관일 것이다. 실무를 맡고 있는 손일석과 진충기 교수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당연히 판을 갈았다.

똑똑똑!

이혁원과 송진우였다.

“초안은 잡았겠지?”

“예. 검토해 보시죠.”

간 이식과 소아 외과에 관한 논문을 받아 든 김지훈이 송진우를 날카로운 눈으로 보았다. 논문 주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다.

“소아 외과 하기로 한 거야?”

“아직 결정 못했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삼 년 차 되기 전에 결정하겠습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교수가 돼 자신의 세부 전공을 바꾼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을뿐더러 다른 교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손일석과 신현수가 있긴 했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분야에 가까웠고, 당시 병원 상황이 무척 특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생을 좌우하는 일인데 신중해야지. 교수만 되면 끝이라는 생각이었으면 소아 외과가 훨씬 유리할 텐데 경쟁이 심한 간 이식을 고려하고 있다니 고맙다. 정말 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하길 바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고, 후배가 어떤 분야를 택하든 격려해 주는 것이 마땅했다. 송진우 역시 마찬가지인데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유난히 아끼기 때문일 것이다.

“삼 년 차 되면 향후 진로에 따라 들어가는 수술까지 달라지니까 빨리 결정해.”

싱숭생숭 안타까운 마음은 여기까지였다.

때론 논문 하나로도 인생이 바뀔 수 있었다. 자신의 능력과 실적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가져온 초안인데 이 정도 수준이면 최종 논문이 국제 학술지에 실릴 수 있겠어?”

김지훈의 눈이 날카롭다 못해 매섭게 변했다.

“너희들이 제일 저자야. 일 저자. 교수 임용이나 창립총회를 떠나 자신의 경력을 쌓는 거야. 집도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많은 수술에서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했는지도 무척 중요해. 모든 병원에서 영입하지 못해 안달 나게 만들 생각 없어?”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논문을 쓰라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어쩌면 교수 임용만 생각했거나 국제 학술지 게재라는 말을 흘려들었는지도 몰랐다.

이혁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민하겠습니다.”

“나한테 미안한 일이 아니라 너희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야. 막막하면 종진이하고 만석이 논문 초안이라도 보며 참조할 생각은 없어? 이혁원, 펠로우가 아니라 교수라는 생각으로 써. 송진우, 너도 마찬가지야. 이런 식이면 곤란해. 이준영 선생님은 몰라도 최소 내 눈은 통과해야 돼.”

김지훈이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이혁원과 송진우가 눈가를 굳혔다.

자격이 안 된다면 교수 임용을 철회하고도 남을 김지훈이었다. 이준영 교수를 중심으로 한 외과 분위기 또한 다르지 않았다.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뭘 다시 작성해? 설마 핵심이 담겼는지, 빠졌는지도 모르고 쓴 거야?”

쓴소리가 이어졌다.

급기야 김지훈이 볼펜을 꺼냈다.

두 개의 논문 초안이 빨간색으로 물들어 갔다.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것일까?

“주제는 좋아. 마음에 들어. 그런데 케이스 숫자가 왜 이것밖에 안 돼? 같은 통계가 나와도 케이스가 열 개인 논문과 백 개인 논문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신뢰할지 빤한 거 아니야? 비교 분석 무시하지 마. 우리 병원에서 시행한 간 이식 수술 모조리 검토해.”

헉! 소리 터졌다.

그동안 전문 병원이 시행한 간 이식 수술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건수를 자랑할 정도였다. 더구나 차트 하나하나가 책을 방불케 할 만큼 두꺼워 검토하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을 요구했다.

그렇다고 논문에만 매달릴 수 없어 주제에 맞는 수술을 일부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모를 김지훈이 아닌데 비교 분석이란 말로 엄청난 과제를 던졌다.

이혁원의 얼굴이 노래졌다.

‘모조리? 지금 모조리라고 하셨나?’

김지훈의 고개가 홱 돌았다.

“송진우, 한 말 또 할 필요 없겠지?”

“예. 모든 케이스 모아 다시 작성하겠습니다.”

“간 이식에 비하면 수술 몇 개 되지도 않는데 이렇게 쓰면 성의가 부족하다는 말밖에 안 돼. 최소 전문의가 썼다는 표시는 내야 할 거 아니야?”

노란 얼굴 뒤로 붉은 석양이 드리워졌다.

“기존에 시행했던 수술을 주제로 한 논문은 머리로만 쓰는 게 아니야. 손과 발이 편하면 그만큼 수준 낮은 내용이 실릴 수밖에 없어. 시간 짜내. 국제 학술지에 너희들 이름으로 논문 하나 올리자는 게 내 욕심이야?”

이혁원과 송진우가 전공의 시절로 돌아갔다.

급기야 잊고 있었던 말까지 터졌다.

“똑바로 하자.”

화살 하나가 뇌리를 뚫고 지나갔다.

어깨가 축 처졌다.

이런 일에 있어 깐깐하기론 이준영 교수보다 더하다는 평이 돌 정도인 김지훈이었다. 하기에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눈높이조차 못 채웠다는 생각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을 요구한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다시 쓰겠습니다. 가 보겠습니다.”

그때 김지훈이 뭔가를 내밀었다.

“필요한 자료야. 내가 검토한 차트 중에 중복되는 환자가 있겠지만 도움이 될 거야. 가 봐.”

제법 양이 많았다.

일목요연하게 정리까지 돼 있어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후배들의 논문에 매달렸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논문 표지 맨 앞에 자신의 이름을 올릴 생각이 없었다.

훅 뜨거운 숨이 터졌다.

논문에 이름만 달랑 올리는 선배가 아니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다가왔다. 아마도 쌓인 피로에 눈가까지 까매진 얼굴을 본 때문일 것이다.

“감사합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제이 저자에 이름 올리려고 하는 거니까 그런 생각 할 이유 없어. 날짜는 잡았어?”

“결혼 날짜 말입니까?”

“그것밖에 더 있어?”

“다행히 창립총회 끝난 후로 잡혔습니다. 무척 바쁜데 시간 비우게 돼 죄송합니다.”

김지훈의 눈이 쭉 찢어졌다.

“평생 한 번 있는 일이야.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마. 일할 땐 일하고, 놀 때는 신나게 놀면 돼. 혁원아, 우리 힘들어도 행복하게 살자. 뭐 필요한 거 없어?”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형이 주고 싶어서 그래. 돈도 좋겠지만 이왕이면 오래 남는 걸 해 줬으면 하니까 강은미 선생하고 상의해서 알려 줘. 왜 대답이 없어? 형이 그 정도도 못해?”

“감사합니다.”

“너무 비싼 건 안 된다.”

“예? 예. 적당한 걸로 고르겠습니다.”

형 소리까지 나왔다.

송진우가 부러워 죽으려고 했다.

김지훈의 고개가 스윽 돌았다.

“진우야, 너도 이참에 늦은 선물 하나 하자. 결혼식에 참석도 못했고, 오하석 선생까지 인연이 두 배지만 혁원이 수준에서 결정하자. 냉장고 갈 때 되지 않았나?”

“요새 냉장고 오래갑니다.”

얼떨결에 대답한 송진우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 그럼 티브이 큰 거로 바꾸든지. 하여튼 제일 필요한 걸로 결정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겠지? 일단 논문 잘 쓰고, 교수 임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면 내 기분이 제일 좋을 것 같다.”

잠시 말이 사라졌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선배로서 후배를 아끼는 마음이었다. 누구도 어느 누구를 편애하면 안 되지만 가장 존경하는 선배인 김지훈의 마음이기에 가슴이 먹먹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이혁원과 송진우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홀로 남은 김지훈이 주섬주섬 자료를 챙겼다.

끙!

자료 몇 장 넣을 요량으로 마련한 가방이 시간이 갈수록 묵직해졌다. 그만큼 일이 많아졌다는 소리였지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 때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늦었다.”

김지훈이 달렸다.

아내와 자식이 있는 집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고경아가 유난히 반색하며 반긴 후 곧바로 방으로 직행했다. 강의 준비도 모자라 간호과 논문까지 써야 해 김지훈이 오기만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희연이가 잘 때까지 남은 집안일은 김지훈의 몫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건만 왜 이리 바쁘고, 힘이 드는지 헉헉 숨을 몰아쉬고 말았다.

“아빠, 힘들어? 엄마보다 힘세잖아.”

“그러게 말이다. 엄마야말로 슈퍼맨이네. 슈퍼맨. 엄마한테 더 잘해야겠다. 너도 함부로 덤비지 마.”

“나 안 덤벼.”

‘안 덤비긴!’

“그럼 어제는 왜 그랬어?”

“얘기하는 거야.”

왠지 대화가 잘됐다.

김지훈이 가끔 엄마와 말다툼을 할 정도로 큰 딸과 마루를 뒹굴뒹굴 굴렀다. 잠깐 물 마시러 나온 고경아에게 한 소리 먹고서야 각자 침대로 향했다.

드르렁! 새근새근!

써전의 칼 솜씨로 깎은 과일 몇 조각과 우유 한 잔에 고경아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아빠와 딸은 세상모르게 자고, 엄마는 늦은 시간까지 책상머리를 떠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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