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1219화 (1,219/1,329)

5화

오늘도 퇴근이 늦었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을 빤히 아는 고경아에게도 미안한데 희연이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훌쩍 컸다지만 아직도 하루 종일 엄마와 아빠의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기에 죄책감 비슷한 감정까지 느껴졌다.

문득 손일석과 고경희가 떠올랐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 정훈이를 끔찍하게 아꼈다. 배 아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잘 키우겠다고 직위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승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라지만 보통 사람은 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난 뭐지? 내 가족에게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걸까? 더 잘했어야 했어.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단순히 일과 가정의 문제라 해도 타협이 쉽지 않은 것이 세상이었다. 누구보다 소중한 가족과 생사를 오가는 환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그 이상이었다.

평생 해결하지 못할 딜레마였다.

대가, 최고의 써전,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고자 하는 일이 개인적 욕심만이 아니기를 바랐다. 훗날 희연이가 아빠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해 주었으면 했다.

깜빡깜빡 졸음이 몰려왔다.

배고프다고, 똥 쌌다고 우는 희연이, 식용유의 바다에서 미끄럼을 타며 까르르 웃던 희연이, 화분 속 흙을 입에 묻힌 채 고경아의 비명을 멍하니 바라보던 희연이가 꿈결을 따라 스쳐 지나갔다.

행복한 웃음이 퍼졌다.

나쁜 아빠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

중환자실을 찾은 김지훈이 이학재 환자를 보며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밤새 잠을 못 잤는지 눈이 뻘게진 고경철이 고함을 지르다시피 목소리를 높였지만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손 빼면 안 돼요. 가만히 있어요.”

거의 몸부림 수준이었다.

심각한 빈혈을 동반한 전신 상태 불량과 충분할 수 없는 의사소통은 물론 수술 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 함부로 재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본능에 따른 움직임은 상상 이상의 힘을 보이곤 했다. 건장한 남자조차 통제하기 힘들어 고경철이 꼼짝없이 붙들릴 판이었다.

‘후우! 우리 병원의 능력으로는 벅찬 환자가 분명해. 의식이 흐린 환자와 비슷해 어떤 보호자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해야 하지?’

하물며 지적장애를 가졌다.

해결책은 단 하나였다.

다양한 직군과 분야,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력을 가진 종합 병원만이 보다 수월하고 안전하게 환자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병원으로 이송할 생각이었으면 수술 전에 했어야 했다.

지금은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이미 실무 작업에 들어갔지만 건립 예정인 종합 병원이 어떤 방향과 목적을 가져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수술을 잘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어떤 환자가 오든 최적의 환경에서 수준 높은 의료를 제공해야 하는 병원이 종합 병원이다.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신현수와 만나기로 한 날이 하루 앞이었다. 행정적인 일이란 이유로 한 발 빼기보다 건립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원하는 생활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이 또한 환자를 위한 길이었고, 종내에는 자신의 꿈을 이루는 발판이 될 것이라 믿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환자만 보며 살고 싶은데 내 마음처럼 되질 않네. 각자 가야 할 길이 따로 있는 걸까?’

지적장애 환자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아빠와 남편의 역할.

의사이자 부원장으로서의 책임.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까지.

외과에 미친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일평생 종합 병원에 근무해도 보기 힘든 소장암 환자를 수술했다. 증상이 매우 모호하고, 일반적인 검사로는 진단이 힘든 특성까지 가졌다.

간담췌와 복강경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날이 갈수록 소재가 떨어져 가는 상황에서 주말 집담회에 강한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김지훈은 영원한 스승 바라기였다.

수술 다음 날 이준영 교수를 찾은 김에 이학재 환자에 대해 상의했다. 그간 불길을 토해 낼 곳을 찾지 못해 용암을 머금고 있던 화염방사기에 딸깍 불이 붙었다.

화기애애한 의국 분위기도 한몫했다.

이혁원과 고경철의 고생과 고민을 모른 척할 리 없는 의국원들이었다. 대장 분야를 전공했던 이경석과 최근까지 위장관에 몸담았던 오만석이 함께 상의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만 끝이 아니었다. 당연히 후배 사인방의 레이더에도 자연스럽게 포착됐다.

이학재 환자가 또 한 번의 하룻밤을 무사히 넘겼고, 김지훈의 최대 관심사였던 조직 검사 결과가 그나마 예후가 가장 좋은 육종으로 나왔지만 고비는 지금부터였다.

환자는 물론 의사에게도 말이다.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이경석이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포문을 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수 없는 이혁원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응했지만 웃음 속에 숨겨진 칼날이 너무 예리했다.

역부족이었다.

같은 펠로우를 궁지에 몰 수 없었던 오만석의 거대한 망치가 고경철의 전신을 묵직하게 난타했다. 뒷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고 또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완전히 구석에 몰렸다.

난무하는 칼과 망치에 후배 사인방이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주말 집담회 시간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남았다.

딸깍! 화르륵!

화염방사기에 불이 붙었다.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이혁원과 고경철이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변해 풀풀 날렸다. 결혼과 교수 임용을 앞둔 아들,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의 아들이기에 더욱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

고경철이 울부짖었다.

‘밤새 준비를 했는데 왜? 끝없이 모르는 질문만 이어지다니, 선생님들은 도대체 어디서 소장암에 대한 자료를 찾으신 거야? 으아아! 살려 주세요.’

속마음을 들킨 걸까?

옆에 앉아 무덤덤한 표정으로 참사를 즐긴 김지훈이 한마디 툭 던졌다.

“교과서만 보지 말고 논문도 찾아 읽어. 시간 없다는 핑계는 대지 마라. 환자는 절대 의사를 기다려 주지 않아.”

툭툭 어깨를 두드렸다.

격려인지, 위로인지 알 수 없었다.

다 끝난 마당인데 김지훈이 발언을 청했다.

“환자의 특수성을 모두 들으셨을 겁니다. 의학적인 면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어떤 장애를 가졌든 장애를 가진 환자를 치료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김지훈도 많은 경험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전공의 때 치료했던 음성 꽃동네 환자부터 이학재 환자까지 예를 들어 가며 말을 이어 갔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보며 분노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될 겁니다. 저도 구체적인 대안을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할 일이 분명합니다. 기계적으로 환자를 대하고 치료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의사 아닐까요?”

다들 십분 동의했다.

복지와 의료가 별개 사안이 아니기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부분인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아예 생각이 없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뜨겁게 시작한 집담회가 냉정하고 차분하게 끝났다. 소아 희귀 질환에 이어 장애를 가진 환자까지 접한 이상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아야 했다.

아직 일 끝나지 않았다.

김지훈이 서울로 가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설렜다.

‘이제 정말 종합 병원을 세우는구나.’

부담도 컸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기존 대학 병원들을 기준으로 삼아 진행하면 무리가 없을까? 환자들의 불만이 끊이지 않는데 우리만의 시각은 아닐까?’

서울 병원에 도착해 민정호를 만났다.

“무슨 얘기가 나올까요?”

“재정 문제는 이제 우리 손을 떠났지만, 전문 병원과 종합 병원을 별개로 취급할 수 없는 한 병원 설계나 운영에 관한 부분은 상의가 필요합니다.”

“설계요?”

돌연 김지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진지한 눈으로 민정호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했다.

“돈이 많이 들까요?”

“따져 봐야겠지만 칠백 병상이나 되는 대형 병원입니다. 부속 건물까지 고려하면 설계와 시공에 드는 추가 비용이 적지는 않을 겁니다.”

“쉽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부원장님 자신을 믿으십시오. 현실적인 오백 병상을 버리고, 실현 불가능하게 여겼던 칠백 병상을 관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어렵다고 포기한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덕분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말입니다.”

“내가 그랬나요?”

“혹시 발뺌을 하시는 겁니까? 앞으로 모든 대화를 일일이 녹음해야겠습니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농담이죠?”

“농담으로 들리십니까?”

“하하하!”

항상 고맙고 미안한 민정호였다.

김지훈이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사이 약속 시간이 됐다.

회의실을 찾았다.

신현수와 이사들이 이미 모여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현안을 처리하고 있었다.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지훈을 보자마자 급히 회의를 정리했다.

“이미 다들 얼굴을 아는 사이니까 인사는 간단히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문 병원분들께 참석을 부탁한 이유는 병원 설계를 비롯한 실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입니다.”

‘역시 민 부원장이네.’

논의가 시작됐다.

김지훈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운영 문제는 재단과 전문 병원이 상의해 가며 결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아울러 공사 진행 상황 및 감리 등에 문제없도록 김 부원장님과 민 부원장님이 신경 써 주시길 바랍니다.”

“감리요?”

“수십 년 만에 벌이는 큰 사업입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진행해야죠. 부실하게 공사가 되면 손해를 떠나 병원 전체에 먹칠을 할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관리 감독이 아니라 최소 감리를 제대로 하는지만 신경을 써도 부실 공사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민정호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자신의 일이라는 말이었다.

도면대로 시공하는 일은 건설사의 몫이고, 이를 확인하는 것이 감리의 역할이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소 규정대로 진행하는지 정도는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주체에게 확실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논의가 진행됐다.

대부분 의료 외적인 일이었다.

평생 의사로 살아온 신현수건만 막힘이 없었다. 보다 전문적인 식견을 보이는 재단 이사들과의 대화도 자연스럽기만 했다.

김지훈이 슬쩍 넥타이를 풀었다.

‘공사, 감리, 행정 절차까지 현수는 언제 저런 부분을 모두 공부했을까? 역시 아무나 이사장 하는 게 아니네.’

슬슬 막바지에 이르렀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듣기만 하던 김지훈이 예리한 눈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몇 번이나 화제를 돌려 얘기할 기회를 놓친 끝에 드디어 적절한 순간을 잡았다.

“대충 정리된 것 같은데 한 가지 제안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설계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병원은 아픈 사람이 찾는 곳입니다. 누구에게나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 장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이, 노인, 임산부, 특히 장애를 가진 분들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일조차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요.”

“모든 건물에 그런 분들을 위한 시설을 설치해 주시길 강력하게 제안합니다. 법적으로 강제된 부분만이 아니라 그분들이 정말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신현수가 잠시 김지훈을 보았다.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이해했고, 김지훈다운 제안이었지만 불행히도 모든 일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었다. 상당 부분 대출을 받아야 할 정도로 빠듯한 재정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담당 이사의 의견이 필요했다.

“윤 이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법적인 부분 이외에 추가 시설이나 설비를 갖춰야 한다면 설계부터 기존과 달라야 하는 데다 필요 인력까지 새로 구해야 할 겁니다. 공사하는 측에서 난색을 표할 것이 빤합니다. 설계 비용부터 공사 비용까지 예산을 초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추산 가능합니까?”

“우리 능력 밖입니다.”

결국 돈 문제로 귀착됐다.

김지훈은 물러서지 않았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이 아니라 해도 환자 복지에 관한 문제인 만큼 병원이 가장 먼저 앞장서야 할 일입니다. 깊게 고민해 주십시오.”

김지훈이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진심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다들 난감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신현수 역시 다음에 논의하자는 무책임한 말로 마무리 짓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김 부원장님의 의견을 설계에 반영하도록 조치하겠습니다. 단, 비용이 너무 들면 일부 조정하거나 혹은 법이 규정한 한도 내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더 이상의 답은 없었다.

어렵다 해도 새롭게 구성된 이사회의 첫 사업인 만큼 최대한 고려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최고의 병원은 단지 규모로만 따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김지훈이 다시 한번 깊게 허리를 숙였다.

0